연애를 막 시작했을 때, 혹은 무언가에 빠져들었을 때처럼 생각이 갇혀 다른 일을 하지 못한 적이 있다. 보고 싶은 마음 하나로 하루를 견디기 힘들던 시절.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그 뜨거운 감정은 조금씩 잦아든다. 아마도 신뢰와 익숙함이 자리 잡기 때문일 것이다.
커피는 달랐다. 배움의 과정이 그토록 즐거웠다. 일주일이 한 달처럼 길게 느껴질 만큼 다음 수업이 기다려졌다. 나는 흥미로운 대상을 만났을 때의 마음이 연애와 닮았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목적을 이룬 뒤엔 열정이 식어야 옳을 텐데, 이상하게도 커피는 그렇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도 그 열기는 식지 않았다.
커피를 배우고 나서 거의 다섯 해 동안 스스로 훈련했다. 그 덕에 자신 있게 매장을 열었다. 그때의 나는 자신감으로 빛났다. 그러나 그 자신감은 오래가지 않았다. 오픈한 지 여섯 달쯤 지나자, 자신감은 자만으로 바뀌었고 커피 맛은 변했다. 어제는 맛있던 커피가 오늘은 밍밍했다. 마치 마술 같았다.
이유를 찾는 데 한참이 걸렸다. 손님이 많지 않아 원두가 금세 소진되지 않았고, 2주쯤 지난 시점부터 맛이 떨어졌다. 원인은 단순했다. 볶는 기술이 부족했던 것이다. 남은 재료 덕에 손해는 봤지만, 다시 공부할 기회를 얻었다는 점에서는 행운이었다.
그때부터 커피는 나를 다시 휘감았다. 맛이 떫어진 원인을 찾는 데 꼬박 2년이 걸렸다. 다른 생각을 할 여유조차 없었다. 꿈속에서도 커피를 떠올렸다. 그건 분명 연애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하지만 누구에게서도 답을 얻지 못했다. 매일의 생각이 커피로 가득했다. 완전한 해답은 아니었지만 어느 정도 문제를 해결하고, 커피에 익숙해졌다고 느낄 무렵, 커피는 또 다른 얼굴을 보여주었다.
어느 날 우연히 1979년에 발행된 책을 읽게 되었다. 산업적 관점에서 커피를 다룬 기술서였다. 그 무렵 라디오에서 들은 인스턴트커피 광고가 문득 떠올랐다. 추출 온도에 관한 내용이었다. 그제야 이해됐다. 스페셜티커피가 막 태동하던 시기에 인스턴트커피 업계도 비슷한 개념을 실험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반인들에게는 다소 낯선 과학적 언어였기에 그 광고는 오래가지 못했다. 그러나 그 짧은 순간, 나는 커피를 다른 눈으로 보기 시작했다. 추출 온도 하나에도 세계가 숨어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스페셜티커피가 막 우리나라에 들어올 무렵, 커피 문화는 일본식에서 미국식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문화는 언제나 가까운 곳에서부터 번진다. 작은 로스터리들이 생겨나고, 재료는 일본을 거쳐 들어왔다. 이후 스몰 로스터들은 직접 산지에서 콩을 들여오기 시작했다.
진짜 변화는 재료를 고르는 기준에 있었다. 자연의 맛과 향을 존중하기 시작한 것이다. 수확기가 되면 샘플을 받아 맛을 보고, 한 해의 기후에 따라 달라진 향을 기록했다. 우연히 내 입맛에 꼭 맞는 커피를 만나면 세상을 다 얻은 듯했다. 적어도 그 한 해 동안은 볶는 일 자체가 행복이었다.
커피를 마신 지 이제 50년이 조금 못 된다. 처음엔 단순히 카페인이 필요해서 마셨을지도 모른다. 한때는 하루 아홉 잔을 물처럼 마셨다. 물은 안 마셔도 커피는 마셨다. 커피의 맛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즐기게 된 건 그 절반쯤의 세월부터였다.
커피는 내게 감각을 일깨워 주고, 사색의 시간을 주었으며, 삶을 들여다보게 했다. 이제는 단순한 음료가 아니라 나의 일부가 되었다.
연애의 열정은 식어도, 커피에 대한 사랑은 여전히 식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