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기린 Apr 27. 2023

기린 / 송찬호

필명을 바꾸며...

사진출처 : 픽사베이


기린 / 송찬호


길고 높다란 기린의 머리 위에 그 옛날 산상 호수의 흔적이 있다 그때 누가 그 목마른 바가지를 거기 다 올려놓았을까 그때 그 설교 시대에 조개들은 어떻게 그 호수에 다다를 수 있었을까


별을 헤는 밤, 한때 우리는 저 기린의 긴 목을 별을 따는 장대로 사용하였다 기린의 머리에 긁힌 별들이 아아아아- 노래하며 유성처럼 흘러가던 시절이 있었다


어렸을 적 웃자람을 막기 위해 어른들이 해바라기 머리 위에 무거운 돌을 올려놓을 때, 나는 그걸 내리기 위해 해바라기 대궁을 오르다 몇 번씩 떨어졌느니, 가파른 기린의 등에 매달려 진드기를 잡아먹고사는 아프리카 노랑부리 할미새의 비애를 이제야 알겠으니,


언제 한번 궤도열차 타고 아득히 기린의 목을 올라 고원을 걸어보았으면, 멀리 야구장에서 홈런볼이 날아오면 그걸 주워다 아이에게 갖다 주었으면, 걷고 걷다가 기린의 뿔을 닮은 하늘나리 한 가지 꺾어올 수 있었으면


기린이 내게 다가와, 언제 동물원이 쉬는 날 야외로 나가 풀밭의 식사를 하자 한다 하지만 오늘은 머리에 고깔모자 쓰고 주렁주렁 목에 풍선 달고 어린이날 재롱 잔치에 정신없이 바쁘단다 저 우스꽝스런  기린의 모습을 보아라 최후의 詩의 족장을 보아라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문학과지성사, 2009)




2023. 4.26. 새벽 4시 26분.

필명을 '반달눈'에서 '김기린'으로 변경했습니다.


기린아 같은 시인이 되고 싶었던 것도 아닌데,

기린에 꽂혀서 새벽을 새벽 아닌 것처럼 멀뚱거렸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내 이름에서 한 글자(태)를 빼고, 새로운 한 글자(린)를 가져와 '김기린'이 완성되었습니다.


반달눈이 나쁘지 않았으나, 너무 동시에 특화되어 디카시를 쓰면서 시가 잘 안 써 지는게 필명 때문은 아닌가 하는 투정만 들어 갔더랬죠.


다행히 얼마 전 읽었던 송찬호 시인의 '기린'이라는 시도 생각나 필명.  망설임의 시간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었습니다.


별을 따는 장대가 되고 싶은 

기린이 써나갈 시들을 봄을 기다리는

꽃처럼만 기대해 주신다면 참 좋겠습니다.


이제...애꿎은 필명 핑계도 못 하겠으니

잘 쓸 일만 남았네요.


작가의 이전글 나는 짜장면 배달부가 아니다 / 최정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