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린, 염소를 모는 여자
처음이나 마지막이 아니고 중간에 위기를 겪으면 전진과 후퇴가 동시에 이루어진다. 더 나은 무언가를 바라는 마음이 우리를 전진하게 한다. 동시에 지금껏 획득한 것을 놓기 싫은 마음이 우리를 후퇴하게 한다. / 데이비드 런시먼
어떤 소설가도 억압적인 국가에서 경쟁이 얼마나 유용할 수 있는지 예측하지 못했다. 대부분의 학생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감시 카메라나 역사수정주의, 혹은 국가 통제와 흔히 결부되는 도구들이 아니었다. 학생들은 서로를 두려워했다. 성적과 일자리를 위해 똑같이 고군분투하는 모든 재능 있는 젊은이들이 걱정이었다.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는 경쟁이 신앙만큼 강력해지면 사람들 사이에서 아편처럼 작용한다. / 피터 헤슬러
강 건너 저쪽, 그곳을 피안이라 한다. 번민이 없는 곳, 고통이 없는 곳. 오욕칠정이 끊어진 초탈의 언덕. 구도자들이 화두의 바랑을 짊어지고 기어오르는 가파른 물 언덕. 누가 이쪽 언덕과 저쪽 언덕을 갈라, 그 사이로 강을 흐르게 했을까. 마디마다 아픈 이 삶을 고통이라 하고 / 전경린
창을 때리는 소리가 포탄같다. 비가 오다가 마는 소리다. 속이 울렁거리고 머리가 아프다. 눈은 무겁고 생각 외로 손은 팔팔하다. 일하던 버릇 때문일까. 글을 쓸 때는 어느정도 앞뒤 상황을 무시하는 버릇이 있다. 이렇게 새벽녘까지 버티는 이유는, ... 어느새 새로운 직장을 구하고 터를 잡는 중이다. 부모에게는 벼랑 끝에 나를 세우지 않거든, 서른을 버틸 재간이 없다고 설명했다. 혹독한 말이지만 제법 잘 통했다. 이렇게 순간의 짐을 덜어내는 선택이 또 한 번, 종교는 없지만 쉬는 동안 자주 절을 찾았고 예법과 도리를 모르면서도 두 손을 모아 마음을 전했다. 내가 가야하는 방향으로 나를 놓아주십시오. 부끄럽지 않게 살고 싶고, 그렇게 살 수 있는 길로 나를 떠밀어라도 주십시오. 금화살 같은 늦여름의 햇빛이 어른대고 색이 깜깜한 감잎, 윤기가 흐르는 상수리 잎이 가지에 맺혀 흔들린다. 돌길 자갈밭을 발로 구르며 대웅전을 돌고 익어 부르튼 황매실을 으깨 단맛을 보던 찬란한 시간들. 알알이 맺힌 기억마다 어슴푸레한 구역이 위치해 있다. 기원의 시간이 끝나고 대청마루에 앉아 찌는 열기를 더운 찻물로 씻어내고 있으면 마당에 휘도는 향긋한 바람이 마음을 단단하게 굳히곤 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뤄져야 할 일은 언젠가 이뤄질 것이다. 앞선 감상에서 느낄 수 있듯이 이번 도전 역시 자신이 있다거나 열렬하지는 않다. 그러나 하나씩 해치워가는 것이 인생이 아니겠는가.
짐이 될 것을 고르고 캐리어를 싸고 집을 나서면서 안녕, 나의 스물. 끈끈하고 안락하고 달콤하고 슬픈 기억들. 금세 새로운 사건들로 잊히겠으나 종종 떠올라 나를 뒤숭숭하게 만들 도시, 수원. 오래 머무른만큼 사랑했던 길목과 타성에 젖어 지루해하던 카페와 단골 가게, 하지만 돌이켜보면 학교 바깥에서는 그 흔한 인연 하나 제대로 맺지 못한 채 떠나간다. 그리고 예언은 적중했다. 함께 살 룸메이트와 함께 가구를 고르고 집안 곳곳을 배치하는 일에 열중하는 일을 뒤처진 추억은 이겨낼 재간이 없다. '침대 받침대는 노란색, 가구는 짙은 녹색이었으면 좋겠어. 침구는 횟빛이 섞인 뮤트한 녹색, 그 위로 토마토가 알알이 박힌 키치한 담요를 덮어 포인트를 주려고 해. 발매트는 안개에 싸인 숲을 그린 몽환적인 풍경이면 어떨까 싶어. 가구는 원목으로, 그럴 수 없다면 톤이라도 맞추자. 서재 책장은 검은색, 어쩐지 무게감 있는 느낌이 썩 괜찮잖아. 난 검은색을 원래도 좋아했어.' 비틀대던 계획에 어느정도 무게추를 달자 앞으로 나아가는 느낌에 휩싸인다. 무언가 이뤄지고는 있으나 실제 손으로 쥔 것은 드문데, 전진하는 중이라는 실루엣에 쉽게 취했다. 매순간이 그러했듯이 이번 갈래로 하여금 삶은 위기를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추돌하게 됐다. 이럴 때면 점쟁이의 말을 떠올리고 만다. 아가씨는 환경이 박복하지만 옳은 길을 가게 될 거야. 마음이 향하는 곳으로 가야 해. 더 크고 밝은 곳으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