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12월이다. 창백한 겨울 햇빛에도 따스한 공기로 옷깃이 부풀어 오르는 초겨울. 여느 점쟁이의 말처럼 게으른 마음으로 나날을 허비하고 있다. 통찰 엇비슷함을 시늉하며 겨우 하루를 넘기고, 또 이튿날을 지워가면서 사는 일이 거북스럽고 얄팍하게 느껴진다. 지난주 머리를 깨끗하게 씻고 싶어 극장을 찾았다. 괜히 유난이다 싶었다. 생각이 뭐라고, ... 하지만 생각해보면 이런 마음이 드는 것치고는 당장 봄만 해도 SNS를 뒤져가며 성가실 정도로 영화표를 끊었다가 취소하길 반복했었다. 사실상 유랑의 행보였다. 신통찮은 주머니 사정에 자존심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성찰의 시간이었다. 그렇게 어둔 극장에 외따로 앉아 희미한 영상을 쫓고 있으면 머리가 터질 듯이 바빠왔다. 귀와 마음을 기울일 사건이 적은 만큼 남의 경험에 기생해서라도 지극한 자기 위안에 빠지고 싶었던 것이다. 싸늘한 불안은 인간의 영혼을 거칠게 담금질한다. 스크린 밖과 달리 세상과 불협하는 인물의 실루엣이 여러 갈래로 겹쳤다 흩어진다. 대부분은 갈피를 잃은 물고기처럼 같은 자리를 돌면서 무력하게나마 분노한다. 상업 예술의 특성상 관객의 머리를 깨기 위해서는 일종의 파격이 필요하다. 작금의 관객들은 피와 향수에 익숙하므로 창작자가 치러야 할 고뇌의 시간은 더 깊다. 하지만 부재한 시대 정신 때문일까. 깜짝 놀랄 법한 반전은 없다. 눈물로 참회할 메시지 역시도. 뜻도 길도 없는 생에 의미를 부여하려 애쓰다 보면 앞서 죽은, 선지자들의 마음가짐 따위를 흉내내는 게 가장 빠른 법이다. 하지만 무엇이 생이냐는 원초적인 질문이 공동空洞으로 남아있는 한 허위는 쉽게 무너지기 마련이다.
최근 업무 미팅에서 마주한 정중한 질문 하나. '쉬는 동안 힘들지 않았습니까' 대답은 간단했다. '글쎄요' 생각해보면 나는 인연과 사건을 징검다리 삼아 의미 모를 삶의 굴레를 빠듯하게 돌아왔다. 많은 사람들은 날카로운 지성만이 삶의 번민을 끊어 순간이나마 사람을 해방시킨다고들 하지만, 나는 사사로운 에피소드 따위에 스치는 데에 온 마음을 기울여왔다. 비즈니스는 비즈니스였으므로 때에 맞춰 질문과 문장을 다듬었지만 확신은 없었다. 온통 내 것이 아닌 이야기를 떠들고 다닌 셈. 부끄러운 일이다. 그러나 내 오랜 게으름의 근원은 여기에 있다. 오랜 공백기를 갖고 컴백했지만 마음가짐의 변화가 없다는 것. 슬프고 약하고, 그렇기 때문에 간혹 악해지는 사람들 사이에서 듣는 많은 이야기들이 여전히 지루하기 때문일까. 그럴 때마다 독야 속 칼날처럼 빛나는 선명한 한 사람의 시대 정신을 맛보고 싶지만 무리인지도, ...
돌고 돌아 무대 이야기. 지난 달까지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된 연극 트랩을 보고 왔다. 올드한 대사가 지지부진했으나 세련된 연출에 눈이 즐거웠다. 마음에 들었던 건 에두른 비판이다. 부유한 낙향은 힘과 권력의 논리에 부역한 지식인만이 누릴 수 있는 사치다. 6070년대 그들은 금권을 위해 양심을 폐기하고, 이 도시에 새로운 질서를 세웠다. 그리고 모든 것이 끝난 뒤 손가락을 치켜 세우기 시작했다. 꿈, 희망, 신의, 선한 사람은 복을 받는다는 각종 아름다운 메시지를 번번이 배신하고 낡아 빠진 것으로 치부한 건 이전 시대의 지식인, 낙향한 죽은 권력이다. 내 생각으로는, 어떤 노인에게도 '세상을 다 살아보니 이렇다더라'는 핑계로 젊은 사람들을 손가락질 할 자격이 없다. 현 시대는 그들의 삶이 모여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주인공의 세상에 삶의 시비를 가리는 절대적인 기준은 돈이었다. 그렇게 하도록 만들어진 세상, 젊은 세대는 눈에 보이는 법칙을 따라 움직였을 뿐이다. 노인은 통렬한 자기비판 없는 비난으로 젊은 세대의 수치심을 일깨웠다. 주인공은 무지했을 뿐이지 위악적이진 않았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알아버린 뒤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는 죽음뿐이다. 삶은 순간의 에피소드도 놀이도 아니다. 이어져 왔고 앞으로도 이어질 삶, 고쳐 살기에 너무 늦었다는 판단이 들었다면 멈추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