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은 어쩐지 멀다. 태어난 인간이 나이를 먹고 늙어가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다 언젠가 죽음에 이르는 것이 삼라만상의 법칙이다. 그렇지만 세상 사람들은 죽음을 없는 것으로 치부한다. 좋아하는 만화영화 시리즈의 나쁜 결말을 모르는 척 미뤄두고 싶은 어린아이처럼. 지난 주말 할머니가 위독하다는 이야기를 건네 들었다. 바쁜 일상 속 숱한 병치레를 겪은 노인의 위급함은 순차적인 에피소드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건성으로 대답하며 약속을 잡았다. 주중에 꼭 시간을 내겠다고. 그렇게 얼굴을 마주한 게 바로 어제였다. 잠든 노인의 얼굴 위로 옅고 진한 주름살이 가득했다. 미간을 찌푸린 채 내쉬는 거친 숨은 도리어 살아있다는 하나의 증거로 느껴졌다. 6인실 병동은 언제든 말소리가 난잡했고 묵은 체취로 소란했다. 면회 시간을 핑계로 카운터로 나오자 말쑥한 차림새의 간호사가 차트를 넘기고 있었다. 날씨 때문에 그래요. 노인네들은 날씨 영향을 더 받으니까. 노련하게 다듬긴 거친 말솜씨는 환자의 가족들을 에두르는 장기가 있었다. 모두 곧 지나갈 일이지. 다시 말끔한 얼굴로 손주 자식들의 걱정을 웃어 넘길 거야. 이상한 위안을 껴안은 채로 병원 밖을 나오자 눈싸라기 같은 빗발이 날리고 있었다. 심각할수록 비이성적인 위로에 몰두하게 됐다. 고작 날씨 때문에 사람이 죽을 수도 있다니. 하지만 어떤 위로는 이상할 수록 힘이 강했다. 잰걸음으로 좁은 골목을 걷는 사이 심상함은 쉽게 씻겨 내렸다. 따뜻한 달방 40만원. 살아 이 더러운 거리를 겪어내는 사람들의 생기가 강했다. 허허롭게 기울어지는 술잔 속에 결코 용서할 수 없었던 과거는 어쩌면 용서할 수 있는 사건으로 변질됐다. 때묻은 한탄 속에 병든 노인의 삶은 단단하게 굳어 둥글게 뭉쳤다. 그러더니 주고 받는 말 속에서 데굴데굴 왔다 갔다를 반복했다. 그렇게 오래도록 사는 것이 살아 남은 자의 마지막 형벌이라도 된다는 듯이. 그러더니 헛소문처럼 부고가 전달됐다. 선종. 잘 깎아 빛이 나는 아름다운 단어였다. 품위 있는 말씨가 남겨진 사람들의 슬픔과 억울함을 씻어 닦아낼 수 있다는 듯, 믿기지 않을 만큼 생소하게 느껴지는 위로였다. 성탄 전야 늦은 전화를 받은 뒤 자꾸만 반복했다. 한 사람이 어떻게든 태어나 불쌍하게 살다 불쌍한 채로 죽다니. 나는 노인의 말년 위로 억울함을 덧칠했다. 그의 젊은 날을 모르기 때문에. 더는 생생하게 들을 수 없다. 닫힌 한 세월이 무상하고 쓸쓸해 나는 계속해서 이해할 수 없다고 반복해 말했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이해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둥글게 공 모양으로 뭉친 억울함이 어떤 결론도 없이 사라졌다. 있는 둥 없는 둥 오래 쳐다보지 않았지만, 그곳에 존재한다는 것만큼은 잊어본 적이 없었다. 살아 있었기에 … 그러나 이제 노인의 한 세월은 죽음을 건너 희미하게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이 헛헛함은 언젠가 온전히 비워질 테다. 지금이야 잠들기 어려운 어지럼증으로 날 소란케 하지만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