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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지에서 산다는 것

삶이 여행이되고 여행이 삶이되는 모호함

"아침에 일어나 산미 가득한 커피를 내리며 하늘을 바라봤다. 이곳에서의 삶은 천국일까? 잠시 생각하다 오늘은 뭐 먹지?라는 현실적인 생각이 혀를 감싸 안았다. 생각에 산미가 가득했다."


한 달 머무는 사람

처음 시작은 한 달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3일이었다. 오래전 친구 따라 무작정 여행 온 이곳이 삶이 힘들 때마다 기억 속에서 떠올랐다. 서울의 회색빛 하늘 아래, 지하철 손잡이를 붙잡고 흔들릴 때면 푸른 하늘과 따스한 햇살이 내 몸을 가득채우던 그날들이 생각났다. 그 후로 매년 추운 겨울을 피해 도망치듯 이곳으로 왔다. 무엇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는지 실체도 없는 그것으로부터 잘도 도망 다녔다. 이곳에만 오면 괜히 마음이 놓이고 진짜 집에 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한국인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이곳은 서양인들의 배낭여행지, 일본인들이 찾는 조용한 도시로 알려져 있었다. 바다도 없고 마땅히 즐길만한 액티비티도 없고 그저 평화로운 태국의 한 도시였다. 오래된 사원 벽에 부딪히는 햇살처럼,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곳이었다. 지금은 한국, 중국의 TV프로그램에서 수도 없이 방영되어 성수기만 되면 관광객들이 넘쳐난다. 한적했던 골목길은 이제 셀카봉을 든 사람들로 가득하고, 조용했던 카페들은 인생샷을 위한 배경이 되었다. 거기에 골프를 치러 오는 사람들도 한가득이다.


처음 치앙마이에서 한 달 살기를 할 때 매일이 새로웠다. 매일 똑같은 것을 반복하는데도 그저 좋았다. 아침에 일어나 창문 너머로 보이는 콘도의 수영장, 내리쬐는 햇볕과 선선한 공기, 도이수텝이라는 산의 실루엣, 거리에 가득한 오토바이, 골목마다 풍기는 향신료와 길거리 음식 냄새까지. 모든 것이 이국적이었고, 내가 살던 곳과는 달랐다.


땀을 식히는 사탕수수 주스의 달콤함, 팟타이의 새콤달콤한 맛이 혀끝에서 놀고, 시원한 맥주가 목을 타고 내려가는 느낌까지. 모든 순간을 카메라에 담고 싶었고, 매일이 새로운 발견의 연속이었다. 새로운 메뉴들로 배를 채우고 작은 커피숍에서 커피를 마신다. 내리쬐는 태양 아래서 일광욕을 하고 맥주 한 잔으로 하루를 마무리한다. 그렇게 여러 번의 한 달 살기를 하고 돌아가는 캐리어엔 아쉬움만을 꾹꾹 눌러담아 다시 내가 있던 곳으로 돌아갔다. 떠나는 날이면 언제나 '조만간 다시 올게'라는 약속을 스스로에게 했다.


8년을 사는 사람

그리고 이제 8년째 이곳에서 살고 있다.

얼마 전 건강 검진으로 피검사를 했는데 의사가 놀라서 물어왔다. "체내의 비타민 D 수치가 높아요. 이건 약으로도 만들 수 없는 수치인데... 특별히 하는 게 있나요?" "그런 건 딱히 없습니다. 그냥... 여기 살아요."


나는 이제 비타민 D가 넘치는 사람이 되었다. 더 이상 캐리어는 창고에서 꺼내지 않아도 되고 시내의 골목골목까지 훤히 꿰뚫고 네비 없이도 자신만만하게 다닌다. 산미 강한 커피가 입에 맞고 음식에 고수가 없으면 바로 이상함을 알아챈다. 태국 사람들과 편하게 대화를 하고 영어보다 태국어가 더 자연스럽다. 더운 날씨에도 이제 익숙해져 30도가 넘는 날에도 '오늘은 시원하네'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관광지는 안 가본 데가 없고 지인분들이 오면 가이드를 자처하며, 물어보지도 않은 태국 문화에 대해 마구 얘기한다. "여기서는 말이죠..." 하면서 시작하는 내 설명에 친구들은 귀를 쫑긋한다. 하지만 코끼리를 보면 여전히 신기하고 어린아이가 된 것처럼 신나는 기분이 들지만 이곳에서의 생활도 벌써 8년차이다. 더 이상 관광객이 아닌, 그러나 완전한 현지인도 아닌 그 어딘가에 위치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일상과 휴가의 경계가 희미해진다

시간이 지나면서 처음의 그 '특별함'은 서서히 일상이 되어갔다. 관광객들이 신기해하는 것들이 내게는 그저 평범한 일상의 일부가 되었다. 사원에서 울리는 종소리, 탁발하는 스님, 밤이 되면 화려하게 변신하는 야시장, 뜨거운 햇볕 아래 익어가는 과일들의 달콤한 향기.


한국에서 오는 지인들은 내가 부럽다고 난리다. "너 진짜 천국에 사는 거잖아!", "평생 휴가 아냐?", "하루종일 망고 먹고 그러는 거야?" 하지만 현실은 조금 다르다. 관광지에 살아도 나에게는 일상이 있다. 장을 봐야 하고, 집안일을 해야 하며, 일도 해야 한다. 인터넷이 갑자기 끊기고, 에어컨이 고장 나는 날도 있다. 비자 연장을 위해 이민국에서 하루 종일 기다리는 지루함도 안다. 단지 그 배경이 다른 이들의 '인생샷' 장소일 뿐이다.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은 대부분 1주~한 달 정도 머물다 간다. 그들에게 태국은 호캉스, 휴가, 탈출, 힐링, 모험의 장소다. 하지만 내게 치앙마이는 생계를 꾸려가는 삶의 터전이다. 같은 공간을 공유하지만, 경험하는 현실은 전혀 다르다. 그들은 일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왔지만, 나는 그 일상 속에 있다.


가끔은 이런 괴리감이 웃음을 자아낼 때도 있다. 여유롭게 카페에 앉아 태국의 '슬로우 라이프'를 만끽하는 여행객들 사이에서 나는 업무를 보고 있다. 노트북을 열고 마감에 쫓기며 커피를 들이키는 내 모습은 여행객들의 로망과는 거리가 멀다. 업무 뒤엔 대형마트에서 카트 가득 장을 봐서 집으로 돌아간다. 그들은 내가 부러울지 모르지만, 나는 오히려 그들이 부럽다. 최소한 그들에겐 '돌아갈 곳'이라는 확실한 현실이 있으니까.


나는 '이방인'이다

관광지에 산다는 것의 또 다른 면은 '이방인'이라는 정체성이다. 8년이 지났지만, 나는 여전히 현지인이 아니다. 시장에 가면 바가지를 쓰지 않을까 걱정하고 길을 걷다 보면 "택시? 툭툭?" 하는 소리를 듣는다. 내가 아무리 현지 생활에 녹아들려 해도, 내 얼굴은 여전히 '관광객'임을 말해준다. 태국어로 유창하게 대화할 수 있어도, 가끔 돌아오는 영어 대답이 나를 현실로 돌아오게 한다.


하지만 그런 이방인의 위치가 주는 특별한 시선도 있다. 나는 한국인의 눈으로 태국을 보고, 태국에서의 경험으로 한국을 다시 바라본다. 두 문화 사이에서 균형을 찾아가는 과정은 때로는 혼란스럽지만, 그만큼 넓은 시야를 선물한다. 그 어느 곳에도 완전히 속하지 않지만, 두 곳 모두를 잘 알고 있는 사람.


'일상'과 '특별함' 사이

관광지에 산다는 것은 결국 '일상'과 '특별함' 사이의 경계에서 사는 것이다. 내게는 평범한 일상이지만, 다른 이에게는 꿈꾸는 휴가지. 이제는 이 독특한 삶의 방식이 내게도 특별하게 느껴진다. 가끔은 일상에 지쳐 무뎌질 때, 이 도시를 처음 방문한 여행자의 눈으로 돌아보려고 노력한다.


아침에 커피를 내리며 보는 하늘이 매일 같은 하늘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려 한다. 시장에서 만나는 과일 판매상의 미소, 길가에 핀 이름모를 꽃의 선명한 색깔, 저녁 무렵 사원에서 들려오는 염불 소리, 도이수텝을 뒤로 붉게 물들어가는 노을, 이런 작은 순간들이 모여 내 삶을 특별하게 만든다.


결국 관광지에서 산다는 것은 매일이 휴가는 아니지만, 일상 속에서도 특별함을 발견할 수 있는 삶이 아닐까. 그리고 그 특별함을 간직하는 법을 배우는 것, 그것이 내가 이 곳에서 얻은 가장 큰 선물인지도 모른다.


매일 아침, 산미 가득한 커피를 내리며 생각한다. 이곳에서의 삶은 천국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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