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적부터 말 잘 듣는 착한 아이였다. 학교에서 문제를 일으키지도 사고를 치지도 않았다. 엄한 부모님 밑에서 거짓말도 한번 안 하고 자랐다. 장난으로라도 거짓말을 하면 얼굴이 벌게 지고 티가 나 누구나 눈치챌 수 있을 정도였다.
그 때문이었을까, 거짓말을 싫어하는 나는 유난히 솔직했다. 좋고 싫음이 분명하고 기준이 명확했다. 내 기준에 들지 않는 사람, 예를 들면 거짓말을 밥먹듯이 하거나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을 멀리했다. 때문에 커서는 다툼도 있었고 융통성 없다는 핀잔도 들었다. 말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위치가 되어서는 팀을 위한다는 명분아래, 프로젝트를 위한다는 말로, 돌려 말할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가시 돋친 말들을 내뱉었다. 그리고는 자신은 솔직한 사람이라고 포장하고 으쓱하기까지 했다.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이곳 태국에 와서 처음에 들었던 말들 중 많이 들었던 것이 사람을 너무 쉽게 믿지 말라는 것이었다. 겉으로는 웃고 마냥 친절해 보여도 거기에 속아 뒤통수를 맞을 수 있으니 조심하라는 이야기들이었다. 구체적으로 어떤 뒤통수를 어떻게 맞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잊을만하면 듣게 되는 이야기 중 하나였다.
뒤통수를 맞아본 적은 없지만 여기서 오래 살다 보니 어떤 뉘앙스의 말이었는지는 자연스레 알게 되었다. 집에 수리할 일이 생겨 사람을 불러 "이렇게 이렇게 수리해 주세요. 가능하죠?"라고 물어보면 대부분 웃으며 "네, 물론이죠"라고 대답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들도 확신이 없거나 어려운 일인데도 거절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한 번은 태국 친구들을 집에 초대해 파티를 열기로 했다. 한국 음식을 좋아하는지 미리 물어봤고, 모두들 "물론이지, 좋아해" "정말 기대돼" 같은 반응을 보였다. 나는 갈비찜, 잡채, 떡볶이까지 한국 음식을 넉넉하게 준비했다. 장을 보고 요리하느라 하루 종일 시간을 쏟았다.
하지만 막상 친구들이 도착하고 식탁에 음식을 차렸을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한 친구가 "음식 주문해도 될까?"라고 물었고, 이내 다른 친구들도 각자 태국 음식을 배달 앱으로 주문하기 시작했다.
"이미 음식을 많이 준비했는데..."라고 말하자, 그들은 "네 요리도 맛있어 보여! 조금씩 맛볼게. 하지만 지금은 태국 음식도 먹고 싶어"라고 대답했다. 그제야 알게 되었다. 그들은 단지 내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 한국 음식을 좋아한다고 말했고 빈손으로 오는 걸 실례라 생각해서 뭐라도 시켜서 같이 쉐어하는 문화가 있었던 것이다.
나는 속상했다. 일부러 시간과 정성을 들여 준비했는데 그것만 먹는 게 실례라 다른 음식을 시킨다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보다 더 답답했던 건, 그들이 미리 말해주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솔직히 말해줬다면 나도 이렇게 많은 음식을 준비하지는 않았을 텐데.
여기서 오래 살다 보면 처음에 느꼈던 해맑은 태국 사람들의 모습이 때로는 답답할 때가 있다.
미소가 갖는 힘
나중에 알고 보니 이는 태국인의 온화하고 갈등을 피하는 문화로 오랜 역사와 종교적 가치관에서 비롯된 예의 이상의 것임을 알게 됐다. '싸바이 싸바이'는 태국어로 "편안하게, 여유롭게"라는 뜻이다. 생활 전반을 관통하는 단어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항상 예의 바르게 행동하려고 한다. 문제가 생겨도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않고, 부드럽게 해결하려는 경향이 있다. 작은 일에 집착하기보다는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성향이 강하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 민폐 끼치는 걸 극도로 꺼려하고 이런 태도로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하지 않고, 갈등을 최소화하려 한다.
태국 친구들과 저녁 식사를 하기로 했을 때의 일이다. "어떤 음식점에 갈까?"라고 물었더니 모두 "네가 좋은 곳으로 정해"라는 대답만 돌아왔다. 그래서 내가 피자를 파는 서양 레스토랑을 제안했더니 모두가 웃음과 함께 "좋아"라고 했다. 하지만 막상 식당에 가려고 할 때쯤 메뉴를 바꾸면 어떻겠냐고 넌지시 물어왔다. 친구 중에 외국인이 있어 자주 접한 피자보다는 태국음식이 어떻겠냐는 것이었다.
이런 경험들을 통해 태국인들의 소통 방식이 단순한 눈치나 비겁함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문화에서 비롯됨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들에게는 개인의 선호보다 함께하는 조화와 누군가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한 가치였던 것이다.
이를 알고 나니 그동안 나의 행동들이 너무 부끄러워졌다. 그동안 나는 살면서 솔직함이라는 핑계 뒤에 숨어 다른 사람들에게 얼마나 상처 주고 무례하게 대했던가. 솔직함과 무례함은 엄연히 다른 건데 말이다. 상대방의 기분을 배려하는 마음을 솔직하지 않다며 답답함과 우유부단함으로 치부해 버리고 본인은 정작 철부지처럼 행동한 것은 아닐까?
서툴지만 괜찮아
태국 생활을 시작하고 처음에는 차가 없어 매일 그랩(공유 택시)을 타고 다녔다. 돈 한 푼이 아깝고 내가 이곳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를 고민하던 그 시절에, 어떻게든 쓰는 돈 이상의 것을 얻어보겠다고 열심이던 때가 있었다. 호출한 차를 타자마자 나는 먼저 반갑게 인사를 건넨다.
"싸와디캅"(안녕하세요) "쿤 뺀 양라이 캅?"(오늘 어때요?)
이 서툰 한 문장에 대부분의 운전기사가 칭찬을 쏟아낸다.
"풋 파싸 타이 깽 막!"(태국어 정말 잘하네요!)
그들의 칭찬은 분명 거짓이었다. 내 태국어는 형편없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 '거짓말'에 담긴 따뜻함은 진실했다. 내 불완전함을 인정하고 격려해 주는 그 마음이 오히려 더 큰 진실이었다. 마사지 샵을 갈 때도 과일가게에서 과일을 살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내 말을 들어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나는 자신감을 얻어 서툰 태국어로 대화하며, 때론 오해도 하고 실수도 했지만, 그 과정에서 배우는 기쁨이 컸다. 그들의 환한 미소와 대답에 공부하는 보람을 느꼈다. 그리고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말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가치가 있다는 걸 조금씩 깨달아갔다.
저녁을 먹기 위해 미리 앱을 통해 주문을 하고 포장이 완료된 음식을 가지러 갔다. 앱의 화면을 보여주니 종업원의 표정이 안 좋다. 바로 매니저가 온다. “뭔가가 잘못되었구나.” 속으로 생각했다. 이것저것 확인하더니 10분만 기다려달라고 바로 준비해주겠다고 한다. 주문이 안 들어갔고 이제 조리를 시작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에 대한 아무런 설명이 없다. 한국이었다면 화를 냈을 법도 한 상황이었지만, 태국에서 배운 대로 미소를 지으며 "마이 뺀 라이"(괜찮아요)라고 말했다. 매니저는 미안해하며 분주하게 움직였고 곧 음식이 포장되어 나왔다. 종업원과 매니저는 미안하다며 미소와 함께 인사했고 나는 집에 와서 기분 좋은 저녁을 먹었다. 이런 작은 경험들이 쌓이면서 '솔직함'에 대한 나의 관점도 서서히 바뀌어갔다.
미소 속의 진실
한 번은 아내에게 물었다. “치앙마이 사람들은 어떻게 도로에서 경적을 안 울릴 수가 있어? 이렇게 차가 막히고 교차로의 신호가 길어서 답답해서 짜증이 나는데 말이야. 다들 화 낼 줄을 모르는 거야? 부처님도 울고 가시겠는데?” 살짝 빈정거리는 투로 물었다.
"치앙마이 사람들도 속으로는 지금 욕하고 있을걸?” 아내가 웃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내가 화를 못 이겨서 경적이라도 울린다면 그것을 들은 다른 사람이 깜짝 놀랄 테고 상대방을 불편하게 하면 나도 불편해져. 가만히 있는 것이 때로는 존중의 표현이고, 상대를 편안하게 해 주려는 배려라고 생각해."
아내의 말을 듣고 나는 브레이크에서 발을 떼지 못해 답답했던 건지 아니면 나의 모자란 마음을 들켜 답답한 척했던 건지 여튼 그랬었다.
진실의 여러 얼굴
이제 나는 안다. 진실에도 여러 형태가 있다는 것을. 솔직함이란 단순히 자신의 생각을 여과 없이 내뱉는 것이 아니라, 때와 장소, 상대방의 감정을 고려하여 가장 적절한 방식으로 진심을 전하는 것이다.
태국의 찌는 듯한 더위 속에서도 시원한 미소를 잃지 않는 사람들, 불편함 속에서도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 '마이 뺀 라이'(괜찮아)라는 말로 작은 갈등을 쉽게 넘기는 태도... 이 모든 것이 거짓이 아닌 다른 형태의 진실임을 이제야 깨닫는다.
솔직함과 예의, 진실과 배려 사이의 균형을 찾는 여정은 아직 진행 중이다. 때로는 여전히 직설적인 말이 튀어나올 때도 있고, 가끔은 너무 말을 아껴 오해를 부를 때도 있다. 하지만 이제 나는 '솔직함'이라는 단어를 방패 삼아 무례함을 정당화하지 않는다.
동네 단지를 산책하다 산 뒤로 넘어가는 저녁노을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한국의 직설적인 문화와 태국의 부드러운 소통 방식, 어느 것이 옳고 그르다기보다는 각자의 가치가 있다. 중요한 것은 그 사이에서 균형을 찾는 일 일 것이다.
한국에 있을 때는 늘 시간에 쫓기듯 살았고, 효율성과 명확함을 최우선으로 여겼다. 그래서 돌려 말하거나 모호하게 표현하는 것을 시간 낭비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태국에서의 시간은 나에게 다른 관점을 가르쳐주었다. 때로는 천천히 돌아가는 길도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관계가 깨진 후에 효율을 찾아봤자, 함께할 사람이 없다면 그 효율이 무슨 소용일까?
이제 나는 솔직하지 않은 사람들을 조금 더 이해한다. 그들이 정말 솔직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다른 형태의 진실을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때로는 그러한 우회로가 더 깊은 곳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태국 드라마에서 본 승려의 말이 떠오른다.
"진정한 지혜는 말할 때와 침묵할 때를 아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