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그놈을 질투하는 놈도 생겼다
우리집을 소개합니다
내가 사는 주택 단지는 다른 곳에 비해 규모가 있는 편이라 골목골목을 다니며 산책하기 좋다. 신축이라 동네도 조용하고 깨끗하며 무엇보다 건물의 디자인이 모던한 게 마음에 들어 시내와 가까운 이곳을 선분양으로 계약한 집이다. 처음 입주했을 때는 다 똑같은 디자인의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어 흡사 한국의 아파트 같은 일률적인 모습을 연상시키기도 했지만, 그 모습은 오래가지 않았다.
처음에 지어질 땐 천편일률적인 모습이었지만, 시간이 흐르며 집집마다 각양각색의 변화가 찾아왔다. 누군가는 정원에 열대의 싱그러운 나무를 심고, 또 다른 이는 남는 땅에 확장 공사를 시작했다. 인테리어는 확인할 수 없지만 밖에서 보는 모습은 집주인의 성향에 맞게 각자의 색깔로 물들어갔다. 매일 산책길에 달라지는 집들을 구경하는 재미는 이곳 생활의 작은 행복 중 하나였다.
이름 지어주기
이렇게 산책하다 보면 한국에서는 보기 힘든 온갖 파충류와 길고양이들을 마주하게 된다. 태국은 불교의 나라답게 살생을 금기시한다. (이에 대한 이야기는 다른 글에서 더 자세하게 풀 예정이다) 살생을 금기시할 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체를 따뜻한 시선으로 품어준다. 먹이도 주고,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보살펴 준다. 밥도 주고 물도 주고. 때문에 몇몇 집들은 벌써 길고양이에게 선택받아 그들의 집과 집사가 되었다.
나와 아내는 매일 저녁 노을이 물들기 시작할 무렵,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산책을 한다. 새로운 고양이를 만나면 우리만의 이름을 지어주고 부르면 다가와 애교를 부린다. 그렇게 동식물, 파충류 할 것 없이 이름을 지어준 게 벌써 여러 마리다. 개똥이, 미드데이, 노랑이, 오렌지, 리오, 쫄보, 쫄보 친구, 하트, 황소, 삼색이 등등.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친구도 있고 반가운 뉴페이스도 등장하곤 한다. 산책하다 보면 매일이 같은 길인데 매일이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하다.
어느날 무전취식하는 놈이 생겼다
어느 햇살 가득한 오후, 우리집 마당으로 고양이 한 마리가 슬그머니 찾아왔다. 갈색 줄무늬를 가진 암컷 고양이인데, 첫 만남부터 까칠한 성격이 묻어나는 고양이였다. 따가운 햇볕을 피해 차 밑에 들어가 쉬기도 하고, 앞베란다에서 우리가 있는 안을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훔쳐보기도 했다. 이 녀석을 아내가 가만둘 리 없었다. 츄르를 사다 바치고 장난감을 하나씩 사들이는데, 나는 그런 아내의 마음을 막을 수 없었다.
이 녀석은 거의 매일 우리집을 자신의 식당처럼 드나들었다. 어디서 무엇을 하다 왔는지 너무 궁금했지만 물어볼 수도 없고, 때가 되면 집에 와서 사료를 먹고는 밤이 되면 오토바이 위에서, 키우는 화분 위에서, 의자 위에서, 박스 속에서 자기가 원하는 곳에서 편안히 잠을 청했다. 아침에 일어나 밖에 나오면 문 여는 소리에 반짝이는 눈으로 일어나 반갑다고 울어대는데, 가장 놀라운 건 저녁마다 우리를 따라서 산책을 한다는 것이다. 한두 번 하다 말겠지 싶었던 산책은 열 달이 넘게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산책하는 고양이라니! 이 녀석은 어느새 내 마음의 문을 열심히 두드리고 있었다.
사랑은 그런 게 아니야
나는 솔직히 고양이가 무서웠다. 세로로 가늘게 뜬 신비로운 눈동자가 무섭고, 발걸음 소리가 나지 않는 것도 은근히 두려웠다. 잠시만 한눈을 팔면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기도 하고, 예고 없이 내 옆에 와서 꼬리를 스치기도 하는데, 그때마다 나는 깜짝깜짝 놀라곤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온 집안을 뒤덮는 털이 싫었다. 하루 종일 청소해야 하고, 검은 옷이라도 입은 날엔 털이 옷에 한가득 달라붙어 좌절감을 안겼다. 나는 입버릇처럼 아내에게 말했다. "나는 고양이를 사랑하지만 털 때문에 집에서 키우기는 힘들 것 같아." 그때 아내가 잔잔한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사랑은 그런 게 아니야." 순간 나는 뜨끔했다.
알고 싶어지기 시작할 때
평소 고양이를 무서워한 탓에 고양이에 대해 무지했던 나는 이 녀석과 진심으로 친해지고 싶어졌다. 함께 즐겁게 놀다가도 갑자기 흥분해서 물기 일쑤였고, 할퀴고 도망가는 일도 다반사였다. 팔다리에 상처가 아물 때쯤 새로운 상처가 생기곤 했다. 훈련도 안 되고 혼내면 금세 삐지는 모습에 때론 답답함이 밀려왔다. 한번은 서운한 마음이 불쑥 튀어나와 나도 모르게 소리쳤다. 밥주고 먹여주고 재워주는데 왜 무냐고, 왜 할퀴냐고. 속상한 마음 그대로가 솟구쳤는데, 생각지도 못한 나의 이면이, 내가 숨기고만 싶었던 나의 부끄러운 모습을 들킨 것 같아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즈음 나의 유튜브 알고리즘은 온통 고양이 영상으로 채워졌다. 알고 싶었다. 내 기준에 고양이를 맞추니 고양이도 힘들고 나도 지쳤다. 그 녀석을 진정으로 위한다면 그의 눈높이로 세상을 바라봐 주어야 했다. 그리고 두 가지 사실에 집착적인 마음을 조금 내려놓았다. 첫째, 고양이는 성묘가 되어서도 세 살 아이의 지능만을 갖고 있다는 것. 둘째, 고양이 뇌는 고작 25g에 불과하다는 것. 본능에 충실한 이 녀석에게 너무 많은 것을 기대했는지도 모르겠다. 아이를 키우는 기분이 이런 느낌일까? 문득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같이 살아보자
어느 비 갠 후의 맑은 오후, 이 녀석이 밖에서 놀다 왔는데 왼쪽 뒷다리를 절뚝거리고 있었다. 겉으로는 큰 문제가 없어 보여 며칠 지켜보기로 했는데, 사흘이 지나도록 차도가 없어 결국 병원에 데리고 갔다. 병원에서 다리 쪽 털을 밀고 살펴본 결과, 어떤 이유에선지 상처가 생겼는데 상처 안쪽으로 염증이 번져 피가 고여있다고 했다. 수의사는 상처 부위를 째고 고인 피를 빼낸 후 정성스레 꿰매고 하얀 붕대를 감았다. 하루 한 번 병원에 와서 소독 후 붕대를 갈아야 하고, 상처가 나을 동안 집 밖 생활은 지양하면 좋겠다는 안내를 받았다.
그렇게 우리의 동거가 시작되었다. 집 안이 심심했는지 고양이는 끊임없이 밖으로 나가려 했지만, 우린 열흘 넘게 한 지붕 아래 머물렀다. 집에는 고양이 화장실도 생기고, 아침마다 약도 먹이면서 하루 종일 고양이와 함께 생활했다. 소심한 건지 똑똑한 건지 집안에서는 말도 더 잘 들었다. 입질도 눈에 띄게 줄어들며 서로를 맞춰가는 과정이 느껴졌다. 병원에도 매일 가고, 상처도 차츰 아물어갔다. 절뚝거리던 다리로 다시 신나게 뛰어다니는 모습을 보니 가슴 한켠이 따뜻해졌다. 우린 그 뒤로도 같은 공간에서 숨을 쉬며 살고 있다. 집에 고양이 용품은 날이 갈수록 늘어나고, 때론 알아들을 수 없는 고양이 울음소리에 인내심이 시험당하기도 하지만, 아내의 행복한 미소를 보면 이 정도쯤은 충분히 감내할 수 있겠다 싶다.
그리고 그놈을 질투하는 놈이 생겼다
고양이를 들이고 얼마 지나지 않아, 태국 사람들 사이에서 개나 고양이를 키우면 부부 사이에 아이가 빨리 생긴다는 오래된 믿음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 이유인즉슨 엄마 아빠가 고양이를 하도 이뻐하니 아이가 질투심에 못 참고 원래 계획보다 빨리 온다는 것인데, 그 오랜 미신이 현실이 되었을까? 지금 아내의 따뜻한 뱃속에는 고양이를 질투하는 작은 생명이 꿈틀거리고 있다.
우리의 식탁에 무전취식하러 온 고양이가 가져다 준 예상치 못한 선물. 때로는 사랑이란, 원하지 않았던 것을 받아들이는 데서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