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눈이 뜨이는 기적

by 태국사는 한국아빠
부서진 라면같이…

"이게 뭐야. 라면을 부숴서 대충 흩어놓은 것 같네ㅋㅋ"

아내는 심드렁하다. 태국어를 읽지도 못하는 내가 글씨 생김새로 놀렸으니 당연한 반응이다.


내가 태국어를 배울 거라고 살면서 한 번이라도 생각이나 해봤을까? 이국적인 문자가 낯설게만 느껴지던 그때는 단 한 번도 상상하지 못했다. 멋도 모르고 친구와 처음 태국을 여행했던 때가 생각난다. 문자 그대로 '이.국.적.인.' 도시에서 나는 세 가지 문장만 외우고 다녔었다.


"싸와디캅" (안녕하세요)

"컵쿤캅" (감사합니다)

"마이 싸이 팍치캅"(고수 빼주세요)


그게 전부였다. 낯선 거리, 이해할 수 없는 간판과 안내문 속에서 세 문장은 내가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언어적 도구였다. 당시에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여행자의 시선으로 바라본 세계는 그저 스쳐 지나가는 풍경에 불과했으니까.


난해한 언어의 매력

태국에 살면서 태국어를 못하더라도 불편함도 없고 웬만한 곳은 영어로 병기되어 있다. 물론 영어 발음은 한국과 다르지만, 그마저도 익숙해지면 다 알아듣게 된다. 그러니 굳이 새로운 언어를 배울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편안함 속에서 안주하는 것은 너무 쉬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지금 열심히 태국어를 배운다. 영어 공부를 게을리한 나는 이제 영어보다 태국어가 더 쉽게 느껴진다.


태국어는 한편으론 참 쉽다. 말이 쉽다. 어순이 영어와 비슷한 것만 빼면 딱히 시제에 엄격한 것도 아니고, 문어체와 구어체를 명확히 구분하기보다는 구어체가 그대로 문어체가 된다. 물론 격식을 차리거나 전문적인 글 또는 전문 분야에서는 구어체보다 더 격식 있는 문장을 쓴다. 동사의 변형도 없고 단어와 단어를 조합하여 새로운 단어를 만드는 식이니 단어만 많이 외우면 의사소통은 곧 잘하게 된다.


복잡한 문법적 규칙보다는 직관적 이해가 더 중요한 언어라는 점이 태국어의 매력이다. 언어 학습에서 가장 큰 장벽인 문법의 벽이 상대적으로 낮기에, 말하는 것만큼은 빠르게 익힐 수 있었다. 많이 듣고 많이 말하고, 모든 언어가 그렇듯 연습이 최고의 선생님이다.


라면 부스러기와의 싸움

하지만 문제는 글씨다. 처음 봤을 때는 라면 부스러기 같은 글씨가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열심히 따라 쓴다. 아니, 따라 그린다. 그리고 또 그려본다. 마치 어린아이가 처음 글씨를 배우듯 손가락으로 공중에 글자 모양을 그리기도 했다.

연습장은 금세 까만 글씨로 가득 찼다. 알 수 없는 형태의 글자들을 따라 그리다 보면 손목이 저리고 눈이 피로해진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느끼는 작은 성취감은 어떤 피로도 견딜 수 있게 만든다. '이 글자가 이런 발음이구나' 하고 깨달았을 때의 기쁨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다.


글자도 어려운데 한국어에는 없는 성조가 또 발목을 잡는다. 발음 나는 대로 글씨를 쓰면 항상 성조 표기를 틀리기 마련이다. 이건 읽을 때도 비슷하다. 소리의 높낮이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는 언어는 무척이나 난해하다. '마이' 하나로도 '아니', '새로운', '나무', '불타다' 등 여러 의미가 되는 것을 보면 성조의 중요성을 깨닫게 된다.


최고의 선생님

나에게는 평생 함께할 원어민 선생님이 있다. 선생님 덕분에 짧은 시간 그나마 이 정도 실력을 갖출 수 있었다. 아내는 나를 끊임없이 칭찬해 주고, 지치지 않고 질문하는 나를 인내심 있게 받아준다. 작은 진전에도 "잘했어요"라는 말로 용기를 북돋아 주는 그녀의 격려는 어떤 교재보다 값진 것이었다.


한 번은 이미 물어본 단어를 또 묻고 또 묻는데 괜히 미안해져서 아내에게 물었다.

"왜 매번 똑같은 걸 물어도 화 한번 안 내고 알려줘?" 미안함과 궁금함이 뒤섞인 목소리로 조심스레 물었다.

"모르니까 묻는 거잖아. 그럼 알려줘야지." 의외로 간결하고 단호한 대답이었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배움에는 부끄러움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아내는 알고 있다. 내가 자신을 귀찮게 하거나 일부러 괴롭히려고 공부하는 게 아니란 걸. 사람이니 까먹을 수도 있고, 모르면 또 물어볼 수도 있는 거고, 그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질문이 멈출 때까지 그저 인내심을 갖고 알려준다.


지금은 기억나지 않지만 나의 부모님도 나를 기다림으로 인내로 지켜보며 키우셨을 것이다. 순간 나는 어린아이가 된 느낌이 들었다. 첫 글자를 배우는 아이처럼, 세상과 소통하는 법을 다시 배우는 기분이었다. 그 과정에서 아내는 때로는 선생님이, 때로는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주었다.


잊고 있던 기쁨

이젠 얼추 더듬더듬 태국어 글씨를 읽을 수 있게 되었다. 문자를 읽을 수 있다는 기쁨이 이런 것인지 새삼 느껴본다. 길을 걷다가 간판의 글자가 하나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한 글자, 두 글자씩, 이제는 문장을 읽어내는 순간이 오면 가슴이 벅차오른다. 무의미하게 보이던 기호들이 의미를 갖게 되는 순간, 내적 뿌듯함은 기준치를 초과한다.


간판을 읽고 표지판을 읽으며 삶의 퀄리티가 급상승한다. 예전에는 그저 지나치던 글자들이 이제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길거리의 작은 음식점 메뉴판을 혼자 읽어내며 느끼는 성취감, 상점 주인과 짧은 대화를 나누며 얻는 친밀감은 언어를 배우는 가장 큰 보상이다.


까막눈으로 불편하지 않았던 날들이 괜히 부끄러워진다. 언어의 장벽 뒤에 숨어있던 풍요로운 세계를 보지 못했던 것이 아쉬울 뿐이다. 마치 흑백으로만 보던 세상에 색이 입혀지는 느낌이랄까. 그것은 단순히 의사소통의 도구를 얻는 것을 넘어, 새로운 세계관을 얻는 과정이었다.


눈이 뜨이는 기적

그들의 말을 배우고 시답잖은 농담을 던지고 새로운 언어를 배우며 새로운 사람들을 마주한다. 가벼운 농담이 통했을 때의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오랜 벽을 넘어 다른 세계의 사람과 손을 맞잡는 기분이다.


이곳으로 온 후 많은 것이 변화하고 새로운 것들이 찾아왔다. 사는 환경이 180도 바뀌었지만, 나의 행동을 바꾸지 않으면 어제와 같은 하루, 이전과 같은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적응은 단순히 환경에 익숙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자신을 변화시켜 나가는 과정임을 배웠다.


문맹에서 벗어나는 과정은 쉽지 않지만, 그 끝에는 세상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눈이 열린다. 라면 부스러기 같던 글자들이 이제는 내게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 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만으로도 나는 매일 조금씩 성장하고 있다.



005.jpg


keyword
작가의 이전글무전취식하는 놈이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