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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면 된다

일 년 같은 십분

일 년 같은 십분

길에서 서 있는 것도 10분이 지나고 있다. 교차로의 신호등은 바뀔 생각을 안 하고, 시간은 끈적하고 느리게 흐른다. 땡볕에 에어컨마저 힘을 쓰지 못한 채, 나는 답답한 차 안에 갇혀 있다. 태국 치앙마이 시내에는 항상 정체되는 교차로가 몇 군데 있는데, 출퇴근 시간과 아이들 등하교 시간에는 정말 천사 같은 인내심을 요구한다.


매일 이렇다면 무언가 대책이 필요한 게 아닐까? 원인을 분석하고 나은 방향을 찾아야 하는 게 아닐까? 이곳의 수많은 차들이 오도 가도 못하고 매일 이렇게 막히는 도로 위에서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는 게 말이 되는가? 마음속에서 온갖 불평불만이 쏟아진다. 창밖으로는 에어컨도 없이 더위와 매연 속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 수많은 오토바이들이 함께 보이지만, 그 풍경이 내 불타는 마음을 달래주진 못한다.


자꾸만 타들어 가는 속


한국 사람들이 이곳에서 장기거주를 하면 가장 힘들어하는 것이 기다리는 것이다. 한국의 빨리빨리 문화와는 거의 반대편에 있는 이곳의 문화가 사람들을 지치고 힘들게 한다. 마치 거북이와 토끼의 동화에서, 우리는 항상 토끼였던 것처럼.


이민국에 갈 때마다 길게 늘어선 줄은 못 본 척할 수도 없고, 영혼을 빼앗기듯 사람을 무기력하게 한다. 어떤 업무든 기본 한 시간을 예상해야 하고, 비자 연장 같은 큰 일일 경우에는 4~5시간이 기본이다. 문 열기 전 새벽같이 도착하더라도 점심시간 전에 끝내는 걸 목표로 하는 게 큰 욕심일 때도 있다.


일처리는 또 어찌나 느린지... 전산화가 덜 되어있어 일일이 수기로 서류를 확인하고 처리한다. 확인 절차도 2중 3중으로 되어 기다림에 속이 타들어 간다. 이런 걸 보면 정말이지 한국의 일처리 속도는 박수가 절로 나온다. 지하철이 2분 늦게 와도 짜증 내던 그때가 그립기까지 하다.


이유는 알려줘야지


한 번은 쇼핑몰 푸드코트에서 아내가 음식을 주문했는데 음식이 나오지 않는다. 한참을 기다려도 음식은 나올 생각을 안 한다. 내가 주문한 음식은 먼저 나왔기에 배고파서 먼저 먹기 시작했다.

"곧 나오겠지 뭐" 하며 기다렸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나오지 않았고 해당 코너에 가서 물어보니 가스가 떨어졌단다. 먹던 밥 숟가락을 떨어뜨릴 뻔한 어이없음이었지만, 그걸 이제야 말해준 가게도, "곧 나오겠지"라며 이제까지 참은 아내도 대단했다. 어디까지 참을 수 있는지 누가 일부러 시험이라도 하는 듯한 일상이 물결처럼 끊임없이 이어진다.


여름이 지나면 여름이지만


누군가는 태국이 일 년 내내 무더운 여름일 거라고 생각하지만 여기도 나름 계절이 있다. 선선한 여름이 지나면 뜨거워서 정말 타들어갈 것 같은 여름이 찾아온다. 그리고 그 여름의 끝에는 하루 한두 번 퍼붓는 비에 수시로 변덕 부리는 하늘을 품은 여름을 만날 수 있다.


첫 번째 여름은 한국의 가을과 같아서 아침저녁으로 선선하고 때로는 춥기까지 하다. 흔히 말하는 성수기로 나를 비롯해 누구나 반하는 계절이다. 공기는 맑고 하늘은 푸르러 마치 동화 속 세상에 들어온 듯하다. 일 년 중에 3개월 정도인 이때를 매년 손꼽아 기다리지만, 애타게 그리고 간절하게 기다린다고 해서 절대로 빨리 오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실은 누구나 알고 있다) 마음을 심란하게 설레이게 할 계절은 온다고 말이다. 어느 해엔 화전으로 미세먼지가 심하고, 어느 해엔 전국적인 폭우로 홍수가 나도 그 계절은 때가 되면 오곤 한다. 내가 기다려도, 기다리지 않아도 그냥 때가 되면 올뿐이다. 마치 인생의 모든 것들처럼.


저속 나라의 고속 인터넷


모든 게 느린 이 나라에서 희한하게 인터넷은 빠르다. 대한민국에 뒤지지 않는 속도로 어디서든 편하게 일을 할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이 덕분에 SNS에 중독되기 십상이다.


자꾸만 들여다보고 새로운 걸 찾고 순식간에 나오는 결과에 도파민은 샘솟는다. 손가락 하나로 세상을 움직이는 듯한 착각 속에 빠진다. 이 때문일까? 요즘 사람들은 여유를 잃어간다. 의지대로 지속할 힘이 부족하고 빠른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실망한다. 자꾸만 조바심이 나고 초조하다.


나조차도 이것저것 하고 싶은 것도 많고 해야 할 것도 많은데, 막상 하다 보면 금방 싫증내고 실행력은 고갈된다. 마치 모래시계의 모래처럼 서서히 빠져나가는 느낌이다. 무엇을 잊은 것일까?


커먼센스


혹자는 이 글을 읽으면 그렇게 느려터진 곳에서 어떻게 사냐고 하겠지만, 다행히 여기도 상식은 통하는 곳이다. 십 분이 일 년 같은 교차로에서의 기다림은 신호가 바뀌기만 하면 내 앞에서 끊어지진 않을까라며 조마조마하게 액셀을 밟고 있는 자신을 걱정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정말 길게 길게 신호를 준다. 체증이 내려가고 묵은 변이 나오는 듯한 기분이다. (태국 사람들은 이런 걸 좋아하나?라는 이상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ㅎㅎ)

그리고 이민국에 갈 때는 책을 한 권 꼭 들고 간다. 핑계만 대느라 읽지 못한 책꽂이의 책을 한 권 들고 가면 이민국 업무 처리 후에도 더 앉아서 읽고 싶을 정도이다. 책 속에 빠져들면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모르니, 이 또한 기다림을 이기는 작은 지혜다. 아무리 늦은 일처리도 결국엔 처리가 된다.

또 가스가 떨어져 음식 주문이 밀렸어도 환불은 불가하지만, 늦더라도 포장해 갈 수 있게 준비해 준다. 당연한 거 아니냐고 할 수도 있는 일들이지만 한편으론 이 당연함에 마음 놓고 기다릴 수 있는 게 아닐까?


기다리지 않으며 기다리기


처음에는 적응하기 힘들었지만, 이제는 천천히 가보려 한다. 시간의 강물에 몸을 맡기듯이. 계절마다 바뀌는 제철 과일을 먹으며, 쏭크란이라는 새해 축제에 물놀이도 하면서 성수기를 두근거리며 기다린다. 원하는 목표가 있다면 앞만 보고 달려 나갈 게 아니라 느리지만 천천히 걸으며 지금의 순간을 음미하려 한다.


기다리면 된다. 단지 시간이 다를 뿐이고 아직 그것의 시간이 안 되었을 뿐이다. 나는 조금씩 기다리지 않으며 기다리는 것을 배운다. 그리고 그것이 나를 조금 더 단단하게 만들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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