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수술 과정은 꽤나 힘이 들었다.
캐나다에 와서 크게 불편한 게 없었다. 그만큼 나도 아이들도 이곳 생활에 잘 적응했다. 매일 영어를 써야 한다는 게 힘들긴 했지만, 일상생활을 방해할 수준은 아니었다. 말이 아니어도 손짓 발짓으로 의사소통은 가능했다. 하지만 병원에서는 달랐다. 아이가 아파서 병원에 오니, 내가 이방인이라는 사실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그럭저럭 자신있었던 영어가, 내 발목을 잡았다. 병원에서 쓰는 용어가 낯설었고, 아이가 아픈 상황을 제대로 설명하는 게 힘들었다. 아이 배가 어떻게 아프냐는 질문에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 지 몰라 의사 얼굴을 말뚱히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오른쪽 배가 콕콕 찌르듯이 아프다가 가끔씩 뒤틀리기도 해요."
영어로 표현하고 싶었지만, 나의 영어 실력은 그렇게 대단하지 않았다. 바디랭귀지로도 한계가 있었고.
말이 잘 안통하다보니, 병원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시츄에이션도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응급환자를 오랫동안 기다리게 하는 것도, 실컷 검사하고 자기네들은 수술을 못한다며 어린이 병원으로 옮기는 것도 이상했다. 맹장이면 당장 수술해야 할 것 같은데, 다음날 수술할 것이라는 말도 받아들이기는 어려웠다. 한국이었다면 죽자고 따졌을텐데, 여기서는 그렇게 하기 어려웠다. 영어로 대화하는데 한계가 있으니 그냥 받아들이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게다가 나는 외국인에 보험도 없는 사람이었다. 스스로 약자라고 생각하니, 더 쪼그라들 수 밖에 없었다.
납득이 되지 않는 상황은 입원을 하고, 다음날에도 발생했다. 응급실에서 병실로 옮길 때, 의사는 다음날 아침 일찍 수술할 예정이라고 우리에게 이야기했다. 우리는 의사의 말을 철썩같이 믿었다. 이미 수술을 받아들이기로 한 나로서는 한시라도 빨리 수술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수술을 해야 아이가 더 이상 아프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언제 수술실에 들어갈 수 있을지 괜히 병동 주변을 서성이기도 했다. 하지만 아침 7시 의사들의 회진 때, 나의 기대는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다.
한국 병원과 마찬가지로 아침 7시, 의사들이 다같이 병실을 돌며 회진을 했다. 그리고 여러 명의 의사들이 우리 아이의 배를 만져보며 아이 상태를 살펴봤다. 대표로 보이는 의사가 아이 상태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맹장이 터져버렸기 때문에, 조금 심각한 수준이라며 수술과 5일 이상의 치료가 필요하다고 했다. 그리고 수술은 곧 할 예정이지만 언제 할 수 있을지는 수술실 상황 등을 고려해야 한다고 했다.
"아니, 어제 분명히 아침에 수술할 것이라고 했는데요?"
안되는 영어로 더듬더듬 이야기 했다. 하지만 의사는 단호했다. 수술실은 여러 변수가 있기 때문에 언제 수술할 수 있다는 확답을 줄 수 없다고 했다. 어제 우리에게 아침 일찍 수술할 것이라고 이야기 했던 그 의사도 의사들 무리에 있었지만, 그는 우리의 눈을 회피할 뿐이었다. 부아가 치밀어 올랐지만, 참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빨리 수술하게 도와달라고 부탁할 수 밖에 없었다. 괜히 화를 냈다가 미운털이 박혀 수술시간이 더 늦춰질까봐 무서웠다.
의사에게 수술을 받으면 언제 퇴원할 수 있느냐고도 물어봤다. 퇴원을 빨리 하고 싶었다. 돈 때문이었다. 보험이 없는 외국인에게 병원비는 너무 비쌌다. 하루에 5백만원 정도의 입원비가 꽤나 부담스러웠다. 수술도 안 한 상황에서 말도 안되는 질문이었지만, 그래도 퇴원을 언제 할 수 있을지 체크해보고 병원비가 얼마나 들 지 가늠해보고 싶었다.
"아들의 건강만 걱정하세요"
속물같은 질문에 의사가 내게 건넨 대답이었다. 수술 후 경과를 봐야겠지만 보통은 5일은 있어야 한다며 빨리 퇴원하는 게 좋은 것은 아니라고 빠른 퇴원을 생각하는 나를, 의사는 타박했다. 아이만 생각하라는 의사의 말에 뭔가 정곡을 찔린 것 같아 가슴이 아팠지만, 한편으로는 수술도 빨리 안 시켜주면서 교과서같은 대답만 하는 의사가 얄밉기도 했다.
실망스러운 아침이었다. 나도 아이도 허탈했다. 수술을 해야 아픈 것도 낫고 퇴원도 빨리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니 자꾸 조급해졌다. 불안한 마음에 오전 내내 나는 병동을 돌아다녔다. 의사와 간호사를 만날 때마다 그들을 붙잡고 수술을 빨리할 수 있게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그렇게 물어보고 또 물어봤다. 그렇게라도 이야기해야 수술을 빨리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 I beg you"
구걸하는 심정으로 그렇게 외치며 다녔다. 하지만 나의 구걸은 그리 큰 효과는 없었다. 오후 늦게까지 기다려야 했다. 결국 저녁 5시가 다 되어서야 수술시간이 잡혔다는 연락을 받았다. 5시라도 수술할 수 있었던 게 구걸의 효과라고 생각하는 게 나으려나? 어찌됐든 그래도 다행이었다. 수술을 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아프지 않아? 마취는 어떻게 해? 수술이 잘못되면 어떻게 하지?"
막상 수술을 받는다고 생각하니 아이는 무서웠나보다. 침대에 누워서 수술실로 가는 내내 아이는 나에게 이런 저런 걱정을 늘어 놓았다. 걱정하는 아이를 보며 마음이 아팠다. 나로서는 아이 수술이 잘 되기를 바라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잠깐 자고 나면 괜찮아질 거라며 아이를 위로했다. 그렇게 아이는 수술실로 들어갔다. 다행히 아이는 울지 않고 씩씩하게 수술실로 들어갔다. 오히려 내가 눈물이 났다. 혼자 수술실에 들어가는 아이를 보니 가슴이 아팠다.
'울지 말자, 분명 잘 될거니까. 나약해지지 말자'
마음을 다독이며 수술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열다섯시간 같게 느껴진, 한 시간 반 정도의 시간이 지나고 드디어 수술이 끝났다. 의사가 수술실에서 나왔다. 이해가 조금 안되는 상황이었지만, 수술을 한 의사는 아침에 회진을 돌던 의사가 아니었다. 병원 시스템에 또 화가 날 뻔 했지만 따뜻한 의사의 이야기 덕분에 화가 누그러 들었다. 의사는 수술 경과부터 우선 설명했다. 아이가 맹장이 터져서 장기를 다 해집고 균들을 제거하고 소독하느라 힘들었지만 수술은 잘 되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의사는 보험이 안되는 우리 사정을 들었다며 최대한 빨리 퇴원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며 앞으로도 최선을 다해 보자고 위로했다. 갑자기 훅 들어온 위로의 한 마디가 나를 감동시켰다. 내가 병원에서 바랬던 건 수술을 빨리 해주는 것도, 퇴원을 빨리 시켜주는 것도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누군가로부터 따뜻한 위로 한마디를 듣고 싶었다.
몇 분 후 회복실에서 드디어 아이를 만났다. 마취가 덜 깬 아이는 멍하니 TV 속 만화만 쳐다 봤다. 정신이 없었다. 하지만 그런 아이가 나는 너무 반가웠다. 아이를 꽉 안아주었다.
"이제 안아플거야. 수술도 잘 되었다고 하니 얼른 회복하고 집에 가자"
그날 저녁 마취가 덜 깬 탓인지 아이는 푹 잠을 잤다. 나도 간만에 다리를 뻗고 잘 수 있었다. 아침에 일어난 아이는 예상과 달리 여전히 복통을 호소했다. 수술을 하면서 아이의 장기들을 하나씩 해집으며 소독을 해야 했다. 그러다보니 장기들이 기존의 자리가 아닌 다른 곳에 위치하게 되었고 자리를 다시 찾아가는 과정에서 배가 아플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수술만 하면 괜찮을 줄 알았는데 계속 아프니 아이는 속상해했다. 결국 얌전한 아이는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배가 아프니, 걸을 때에도 힘들어 했다. 한번은 화장실에서 돌아오는 길에, 아이가 침대 옆 테이블에 머리를 찧고 말았다. 그렇게 세게 찐 것도 아니었는데 아들은 짜증을 내며 울어 버렸다. 그동안 참았던 설움이 폭발한 것 같았다. 맹장이 터져 버린 상황에서도 수술실에 혼자 들어가는 상황에서도 눈물을 보이지 않던 아이었는데, 수술이 끝나고 나서 오히려 아들은 더 힘들어 했다. 여전히 아프다는 사실이 아이를 힘들게 했다. 우는 아들을 보고 있으니 나도 울고 싶었다.
의사도 그렇고 간호사도 그렇고 지금 상황은 어쩔 수 없는 것이라며 잘 걷는 게 최선이라고 우리에게 말했다. 잘 걸어야 장기들이 제자리를 찾아갈 것이라고 했다. 나는 다시 독한 마음을 품었다. 힘든 아들을 일으켜 세우고, 아들을 걷게 했다. 빨리 퇴원하려면 걷는 수밖에 없다며 그렇게 병동을 몇 바퀴 돌렸다. 아들이 힘들어 할 수록 더 채찍질을 하며 빨리 집에 가자고 종용했다.
빨리 나아서, 퇴원하려면 어쩔 수 없었다. 아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