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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호진 Feb 07. 2020

요리를 못한게 아니라 안한거였구나

캐나다에서 요리를 하며 깨달은 몇가지

 

요리를 못하는 남자


“설거지는 여자가 하는 일이지”


큰 아이가 다섯살때, 어처구니 없는 말을 했다. 하필이면 처가집 식구들이 다 같이 밥먹는 곳에서 이런 말이 나왔다. 물론 다들 웃어 넘겼지만 나는 좌불안석이었다.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도대체 아빠가 어떻게 했길래 어린 아이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오냐고 농담으로 던진 처제의 한마디가 뼈를 때렸다. 장인어른, 장모님께도 면목이 없었지만, 가장 미안한 사람은 아내였다. 아이의 이야기에 부정할 수 없을정도로 나는 게을러터졌고 가사일에 무관심한 남편이었으니까.


그때부터였다. 다시는 피곤하다는 이유로, 귀찮다는 이유로 집안 일을 미루지 않았다. 집안일을 "도와준다"라는 생각부터 버렸다. 그것은 당연히 함께 해야  일이었지  담당자와  담당자가 있는 "업무" 아니었다. 하지만 집안일을 하면서도 넘지 못할 산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요리"였다. 나름의 요리를 여러 번 시도했지만,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라면 끓이는 것 외에는 제대로 된 요리를 하기 어려웠다. 요리를 못한  순전히  둔한  때문이었다. 짜고 싱겁고를 잘 구분하지 못했다. 요리의 생명은 간을 맞추는 일인데, 혀가 이를 잘 느끼지 못하니 요리가 잘 될리가 없었다.


캐나다로 아이들과 70일 동안 여행을 떠나면서 느꼈던 두려움 중 하나가 바로 "요리"였다. 아이들에게 제대로 된 요리를 해줄 수 있을까 걱정됐다. 요리를 한다는 게 두려웠다. 그렇다고 아이들에게 매일 피자와 햄버거만 먹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닥치면 어떻게 되겠지 싶었지만, 막상 출발하려고 보니 요리에 대한 부담감이 물밀듯이 몰려왔다. 게다가 캐나다 도착후 일주일동안은 누나도 없었다. 누나네 가족은 휴가로 한국을 간 상태였고 나는 캠프 일정 때문에 일주일 먼저 캐나다에 도착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누나에게 기댈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누나에게 기대지 않고, 힘들게 이민생활을 하고 있는 누나에게 도움을 줘야한다고 생각했던 터라 아이들 음식은 내가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요리를 하면서 알게된 것들


“김치 찌개 할 때는 삼겹살을 참기름에 먼저 볶고, 나중에 김치와 함께 볶은 다음에 물을 붓고 끓이면 돼.”


“된장찌개 끓일 때는 처음부터 된장을 풀어서 멸치와 같이 끓여도 괜찮아. 아이들은 차돌박이 된장찌개를 좋아하는데, 차돌박이는 된장찌개를 다 끓이고 먹기 전에 살짝 데쳐 주면 돼”

 

우선 아내와 장모님께 아이들이 좋아하는 음식의 그녀들의 레시피를 전수 받았다.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해 레시피를 익혔다. 받아 적기까지 하며 잊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그리고 캐나다에 도착하자마자 실전에 투입해 하나씩 아이들에게 요리를 해 주었다. 사실 일상에서 누구나 하는 김치찌개, 된장찌개를 끓인 게 고작이었지만 혀가 둔감한 나에게는 나름 대단한 도전이었다. 다행히 요리는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고, 둔감했다고 생각했던 나의 혀는 그리 둔감하지 않고 간을 잘 맞출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날 수록 아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요리가 하나 둘 늘기 시작했다.


요리를 하면서 “감자, 양파, 호박, 당근”으로 다양한 요리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된장을 풀어 물과 함께 끓이면 된장찌개가 되었고, 카레가루를 넣고 끓이면 맛있는 카레가 완성되었다. 잘게 썰어 밥과 볶으면 볶음 밥이 되었고, 계란과 함께 말면 계란말이가 되었다. 새로운 시도도 할 수 있었다. 인터넷을 보고 텃밭에 있는 상추를 따서 상추 겉절이를 해먹기도 했다.


내가 한 음식을 잘 먹는 내 새끼들을 보면서 밥을 안먹어도 배부르다는 느낌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아이들이 음식을 남기는 게 너무 아까워서 잔반을 처리하느라 살이 더 찌기도 했다. 왜 어머니께서 음식을 제대로 못 버리시는지, 남긴 밥과 반찬을 먹어야 했는지 요리를 하면서 그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닭볶음탕에 도전하다!


하루는 무모한 도전을 해 보았다. 소고기, 돼지고기만 먹던 아이들을 위해 닭 요리를 해주고 싶었다. 생각난 게 닭볶음탕이었다. 어려울 것 같았지만 그래도 못할 것 같지 않았다. 그동안 쌓은 내공 덕분에 자신감도 있었다. 하지만 나의 무모한 도전은 시작부터 험난했다. 캐나다에서 파는 닭은 한국의 닭과 조금 달랐다. 한 마리를 통째로 파는 경우 아니면 부위별로 파는 경우 두 가지 경우 밖에 없었다. 닭 한 마리를 닭볶음탕을 위해 따로 팔 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이곳 사람들이 닭볶음탕을 해 먹는 건 아니었으니. 그렇다고 닭다리로만, 또는 닭날개나 닭가슴살로만 요리를 할 수는 없었다. 결국 닭을 통째로 사서 뼈를 발라내야 했다.  그 과정이 꽤나 힘이 들었다. 괜한 도전을 한 것 같은 후회가 들 만큼 말이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이연복 쉐프가 닭을 발골하는 동영상이 있었다. 중식 칼로 30초 만에 닭 뼈를 발라내는 동영상을 보니 그리 어려울 것 같지 않았다. 동영상을 보자마자 곧장 따라했다. 칼을 들고 동영상에 나온대로 닭의 배를 갈라 뼈를 하나씩 발라 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내가 쓴 칼은 중식 칼이 아니었다. 그리고 더 결정적인 것은 나는 이연복 쉐프가 아니었다. 동영상 대로 발골작업이 이뤄지지 않았다. 쉬이 될 줄 알았건만, 나는 닭을 붙잡고 낑낑거려야 했다. “서툰 목수가 연장 탓” 한다더니 나는 집에 있는 칼이 잘 들지 않는다며 원망을 했다. 여차저차해서 겨우 발골작업을 하긴 했지만 시간도 오래 걸렸고 몸도 꽤나 힘이 들었다. 나 때문에 생닭이 고생하는 것 같아 미안했다. 음식을 먹는 내내 생닭이 생각나서 속도 좋지 않았다. 그 다음부터는 수월했다. 인터넷에서 적당한 레시피를 찾아 그대로 했다. 우선 간장, 고추장, 고추가루를 배합하여 양념장을 만들었다. 채소를 썰어 닭과 양념장과 함께 끓이니 “닭볶음탕” 스러운 비주얼이 나왔다. 조금 싱거운 듯 하여 간장과 김치를 더 넣으니 맛도 얼추 먹던 맛과 비슷한 것 같았다.

아이들이 아주 맛있게 잘 먹었다라는 아름다운 결말을 쓰고 싶었지만 아이들이 아주 좋아하지는 않았다. 그동안 자기들이 먹던 닭볶음탕에 비해 부족한 듯 싶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너무 좋았다. 나름, 새로운 “요리 도전했다는  자체로 만족스러웠다.  


도시락 싸는 일은 정말 힘들었어요.


가장 힘든 건 도시락을 싸는 일이었다. 물론 돈을 더 주면 캠프에서 도시락을 주기도 했지만, 돈도 아껴야 했고, 캐나다식 점심식사가 아이들 입맛에 맞을리 없었기에 직접 도시락을 싸야 했다. 매일 아침 6시 30 마다 일어나 도시락을 쌌다. 서울에서 사 온 삼각주먹밥 틀을 이용해 주먹밥을 만들기도 하고, 유부초밥, 볶음밥 등도 쌌다. 샌드위치, 핫도그와 같은 "서양식" 메뉴도 쌌다. 도시락을 싸는 것보다 도시락 메뉴를 정하는 게 더 힘들었다. 매번 똑같은 음식을 싸줄 수도 없었다. 밥에 김치를 싸 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김치 냄새 때문에 그렇게 싸주긴 어려웠다. 아이들 캠프가 끝나고 도시락에서 해방되는 날 나도 모르게 만세를 외칠 수 밖에 없었다.


어머니 생각이 많이 났다. 지금이야 급식이 잘 되어 있어서 도시락을 쌀 일이 없지만, 나 초등학생 때만 해도 어머니는 우리 5남매의 (참고로 나는 1남 4녀의 막내 아들이다) 도시락을 매일같이 싸야 했다. 큰 누나가 고등학생일 때에는 하루에 총 9개의 도시락을 싸기도 하셨다. 새삼스레 어머니의 도시락이 위대해 보였다.


요리를 못한  아니었구나!


 하루는 이런 저런 요리를 하고 있는데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그동안 나는 무엇이 어렵다고 요리를 안 했었나 싶었다. 순간 나는 요리를 “못”하는 게 아니라 “안”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 혀가 둔감했던 게 문제가 아니었고, 내 마음이 문제였다는 사실을 캐나다에서 아이들에게 요리를 해 주면서 알 수 있었다.


이제서야 그 사실을 알았다는 게 창피하지만 어찌됐든 큰 수확이었다. 큰 숙제를 마친 기분이었다. 앞으로 요리를 못한다고 절대 마음 먹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열심히 요리하는 아빠가 되어야 겠다고 다짐했다. 다시는 아이들 입에서 주방 일은 여자가 하는 일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게 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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