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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호진 Feb 13. 2020

아이들에게 바라는 점은 나에게 바라는 것이었다.

비교가 우리를 망쳐 놓는다.


 세상이 좁아졌다는 사실을 캐나다에서 새삼 느꼈다. 머나 먼 캐나다에서도 한 시간 정도만 기다리면 한국의 TV 프로그램을 볼 수 있었다. 어쩌다 보니, 이런 저런 한국 드라마와 예능 프로그램을 보게 되었다. 우리 나라가 그리웠는지 꽤나 재미있게 시청했다. 그 중 단연 기억에 남는 건 <캠핑클럽>이라는 프로그램이었다. 캐나다에 오기 전부터 이 프로그램에 대한 기대가 컸다. 핑클의 멤버 전원이, 14년만에 뭉친다고 하니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 궁금했다.

출처 : JTBC 캠핑클럽

 

그들이 6박 7일 동안 국내 곳곳을 누비며, 캠핑하는 이야기를 보고 있으니 나도 모르게 흐뭇한 웃음이 나왔다. 어릴 때 생각이 나서 그런지 너무 좋았다. 고등학생 시절 나를 지탱해 준 그룹이 바로 “핑클”이었다. 하얀 드레스를 입고 “약속해줘”를 부를 때 나도 함께 새끼 손가락을 걸고 약속했다. 무엇을 약속했는지 모르겠지만 그냥 그들과 함께 할 수 있어 좋았다. 함께 약속했던 그들이 다같이 나오니 고등학생 때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나의 아이돌이 반가웠다.


하지만 세월의 흔적은 곳곳에서 드러났다. 그들도 어느새 나이를 먹고 있었다. 나이는 얼굴로도, 몸으로도 먹지만 머리와 가슴으로도 먹는 것 같았다. 그들의 대화에는 그간의 고민이 잘 녹여져 있었다.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살았던 그들이, 화려함에서 잠시 빗겨 서게 되고 그 과정에서 고민하며 깨달은 이야기는 나로 하여금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나의 고민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아 더 공감이 갔다. 요정들도 나이를 먹는구나.

 

방송 중에 이효리 씨가 어느 날 아침, 갑자기 깨달은 게 있다며 멤버들에게 신나서 이야기 하는 장면이 나온다.


"우리 개개인은 다 멀쩡한 사람이야. 문제가 없어. 근데 넷이 모이니까 비교가 되잖아. 너는 그냥 원래 그 시간에 일어나는데 늦게 일어나는 애가 돼 버리잖아. 그리고 너는 원래 네 속도가 있는데 느린 애가 되고. 나는 성질 급한 애가 되고. 그게 우리의 문제였어. 비교."


비교에 대한 이효리 씨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이런 저런 생각이 들었다. 어릴 때부터 나는 비교에 익숙해 있었다. 누군가를 꼭 “이겨야”한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학교에서는 좋은 성적을 받아야만 했고, 회사에서는 누구보다 좋은 성과를 보여야만 했다. 그럭저럭 성적도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항상 비교하고 누군가를 이겨야 한다는 생각은 어느 순간 한계에 다다랐다. 긴 슬럼프에 빠졌다. 그리고 선택한 게 휴직이었다. 인생에서 처음으로 정해진 경로를 이탈했다.

휴직은 나에게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줬다. 책을 읽고 사람들을 만나면서 남들과 경쟁해서 이긴다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물론 남과 경쟁해서 이기면 그 순간은 기분이 좋다. 하지만 모든 것을 경쟁으로 생각하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다. 내가 세계 1등이 된다 해도 만족감은 채워지지 않을 것 같았다. 중요한 것은 남과의 비교하며 경쟁하는 게 아니라 나 스스로 만족하고 사랑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휴직을 하고 나서야 알 수 있었다.


비교에 대한 생각은 곧장 아이들에게로 향했다. 아이들이 나처럼 비교우위에 연연하는 과오를 범하진 않았으면 좋겠다 싶었다. 진짜 자기 자신의 가치를 인정하면서 살되, 남에 비해서 자기가 못하다고 기죽지 않았으면 좋겠고, 남들보다 조금 잘한다고 우쭐하지 않았으면 했다.  그래서인지 비교하지만 않는다면 누구의 인생이든 멀쩡하다는 이효리 씨의 이야기가 참 좋았고 아이들에게도 꼭 이 가치를 알려주고 싶었다. 나의 아이돌은 나이가 들어도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역지사지


 아이들이 캠프에 간 사이 간간이 책도 읽었다. 전자책을 이용했다. 책장을 넘기는 아날로그적 감수성을 채워주지는 못해 처음엔 불편했지만 읽다 보니 그럭저럭 괜찮았다. 전자책만큼 유용한 것이 없었다. 바리바리 책을 싸들고 오지 않아도 언제든 읽고 싶은 책을 쉽게 찾아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혜신 작가의 “당신이 옳다”라는 책이 참 좋았다. 작가는 책을 통해서 한 사람을 살리는 치유에 있어 공감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이야기 한다. 얼마나 상대방에게 공감을 하느냐를 통해 상대방을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다고 한다.


책에 나오는 작가의 공감에 대한 정의가 인상적이었다.


“공감은 다정한 시선으로 사람 마음을 구석구석, 찬찬히, 환하게 볼 수 있을 때 닿을 수 있는 어떤 상태다. 사람의 내면을 한 조각, 한 조각 보다가 점차로 그 마음의 전체 모습이 보이면서 도달하는 깊은 이해의 단계가 공감이다. 상황을, 그 사람을 더 자세히 알면 알수록 상대를 더 이해하게 되고 더 많이 이해할 수록 공감은 깊어진다. 그래서 공감은 타고나는 성품이 아니라 내 걸음으로 한발 내딛으며 얻게 되는 무엇이다.” (당신이 옳다 중)

 

 단순히 상대방의 이야기를 잘 듣고,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넘어 그 사람이 그런 이야기를 할 수 밖에 없는 이유, 그런 행동을 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이해하는 것이 공감이 아닐까 싶었다.

 

“역지사지”


진부한 이야기지만 이 사자성어가 떠올랐다. 서로를 이해하려 하기 보다는 자신의 이야기만을 강하게 주장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이런 시대에 남의 이야기에 귀담아 듣고 적극적으로 이해하려는 자세, 이것이 더욱 절실히 필요해 보였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 시대에 “역지사지”가 꼭 필요한 것 같았다. 이 때도 아이들이 생각났다. 아이들이  남들을 잘 이해할 수 있는 공감 능력이 높은 아이로 커 주기를 바랐다.


아이들에게 비교하지 않고, 공감하는 삶을 살기를 바랐던 이유

 사실 아이들에게 이런 것들을 바라는 이유가 따로 있었다. 내가 잘 못하는 것들이었고, 그것을 못해서 후회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 스스로 아쉬운 점들을 아이들은 극복하며 살았으면 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아이들이 나처럼 힘들게 살아가지 않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비교하지 않고, 공감하며 사는 삶을 살 수 있도록 아빠가 도와주는 것이, 아빠로서 내가 해 줄 수 있는 선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캐나다에서 돌아와서 금세 깨졌다. 우연히 김민식 PD님의 강의를 듣게 되었다. 강의 중에 PD님께서는 무언가를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을 나에게 적용하면 교훈이 되지만 남에게 적용하길 바라면 “폭력”이 된다고 이야기 하셨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내가 아이들에게 바라는 것이 아이들에게는 "폭력'이 될 수있겠다 싶었다.


아이들에게 내가 "폭력"적일 수 있다는 생각은 강의에 집중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무엇을 바라는 것이 어떤 마음인지 고민했다. 그리고 내가 진짜 바라는 것은 아이들이 아니라 나의 변화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가 못할 것이라 생각하고 그것을 아이들로부터 이루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싶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바라는 모습을 그냥 솔직하게 마주하기로 했다. 아이들이 아닌 “나”에게 바라는 것이라고 말이다. 아이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그것은 아이들 몫으로 남겨두는 게 차라리 나을 듯 싶었다.


그리고 솔직하게 나의 바람을 적었다. 나는 남들과 비교하지 않고, 공감을 잘 하는 어른으로 자라고 싶다고. 아이들이 아니라 그 변화의 주체는 나여야 한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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