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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호진 Nov 30. 2021

오늘부로 퇴사합니다.

17년 정든 직장을 졸업하며 직원들에게 드리는 편지




회사를 졸업합니다


2017년 방송을 통해 <퇴사하겠습니다>라는

다큐멘터리를 접했습니다. 동명의 책을 쓴 작가 이나가키 에미코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는 제게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당장 우리가 퇴사할 수 없는 이유가 경제적인 면도 있겠지만 나가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이유 또한 크다고 했던 게 인상적이었습니다. 회사가는게 너무나 힘들었지만 제가 나갈 수 없었던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작가는 회사를 "졸업"한다는 마음으로 다니라는 조언도 했습니다. 언젠가 끝이 있다는 마음으로 다니면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회사를 대할 수 있다고 하더군요. 그때부터였습니다. 회사를 졸업하는 날을 마음 속으로 정해 놓았습니다. 그 졸업의 날은 2025년, 제가 마흔 다섯살이 될 때였습니다.


하지만 현실의 벽은 막막했습니다. 막상 회사를 나간다고 해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습니다. 어느새 직장 생활에 길들여진 저는 잘 하는 일도, 좋아하는 일도 딱히 없었습니다. 자신감도 자존감도 한없이 떨어져 있는 상태였죠.


우연히 미국 출장 길에서 스타트업 대표를 만났고 그들로부터 새로운 세계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우물안 개구리의 첫 번째 우물 밖 외출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때 만난 새로운 사람들은 제게 큰 자극을 주었습니다.

 

그 후로 스타트업 모임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모임 중 제가 하고 싶은 것을 찾고 싶다는 이야기에

1년 동안의 버킷리스트 100개를 한 번 써보라는 한 분의 조언을 듣게 되었고 곧장 하고 싶은 일을 100가지를 쓰게 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저는 제 안에 꿈틀대고 있는 "성장"의 키워드를 마주할 수 있었고,

저를 위한 시간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에 2019년 휴직을 하게 되었습니다.


휴직을 하고 나서 제가 사람들과 어울리는 과정에서 에너지를 얻고, 그것을 잘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했던 버킷리스트 100개의 경험을 나누면서 그저 하루 하루를 버텨가며 사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꿈을 심어주고 싶었습니다.


지난 10월, 저는 다시 복직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복직하며 회사로 돌아오는 길은 가벼웠습니다. 제가 좋아하고 하고 싶은 일을 발견한 저로서는 회사 일도 즐겁게 할 수 있을 자신이 있었습니다. 회사 일도 하면서 또 다른 사이드 프로젝트도 병행할 생각이었고요.


저에 대해서 잘 알게 된 덕분이었을까요? 지난 1년간 저는 즐겁게 회사를 다닐 수 있었습니다. 물론 회사 밖에서 다양한 사람들과 접하며 이런 저런 프로젝트를 했던 것도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회사 밖에서 신나니 그 에너지가 다시 회사 안으로 돌아오더라고요.


물론 저에 대한 회사 내부에서의 평가는 제가 내릴 수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저는 지난 1년 동안 충분히 즐기며, 재미난 일들을 기획하며 즐겁게 회사 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성과도 잘 낼 수 있었고요.


그러던 중, 갑작스럽게 희망퇴직 소식을 듣게 되었고, 추가 퇴직금을 더 준다는 솔깃한 제안에 45살에 졸업하기로 마음먹었던 회사에서 조기졸업을 하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지금 즐거운 마음이라면 회사에 "고맙다"라는 마음으로 작별을 고할 수 있을 것 같았기에 며칠간의 고민 끝에 퇴사를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뭘 하고 지낼까요?


퇴사를 신청하고 가장 많이 들었던 질문이 “너 퇴사하고 뭐 할 거냐?” 라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조금은 막막합니다. 사실 뚜렷한 계획은 없습니다. 회사로 재취업 할 것도 아니고, 당장 창업을 할 것도 아니거든요.


하지만 새로운 프로젝트들을 하나씩 만들어 볼 생각입니다. 아마도 당장 내일부터 하나씩 해 보렵니다.

제가 지난 몇 년간 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어느 조직에 속하지 않은 채 다양한 일들을 해보지 않을까 싶습니다.  글도 쓰고, 워크숍도 진행하고, 모임도 운영하며 그렇게 살 지 않을까 싶습니다.


물론 두려운 마음도 있지만, 지금은 설레는 마음이 더 큽니다. 새로운 도전을 하면서 하루 하루를 즐겁게 살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합니다.  아직 쥐뿔도 없지만 제가 가지고 있는 꾸준함을 무기로 새롭게 도전해 보고 싶습니다.


직원분들께 드리는 조언


회사 생활을 마무리하면서 직원분들께 부탁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제가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을까 싶어 상당히 조심스럽지만, 그래도 제 조언이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 적어봅니다.


우선, 회사 밖 많은 사람들을 만나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독서 모임도 좋고, 취미 활동도 좋으니 여기저기 기웃거려 봤으면 좋겠습니다. 그 만남은 일적이 아닌 일 외적인 만남이면 좋겠습니다. 그 속에는 분명 나에게 자극을 주는 무언가와 마주할 수 있을 겁니다. 우물 안 세상을 벗어나 나에 대해 새롭게 발견할 수 있을 것이고, 그것이 개인의 삶 뿐만 아니라 업무에도 큰 도움을 줄 거라 생각합니다.


“나"를 보살피는 시간을 가져보시길 바랍니다.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그리고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에 대해서 탐색해 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해 본 버킷리스트 100개 쓰기에 도전해 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무엇을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든다면 뭐라도 좋으니 한 번 시도해 봤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내가 진짜 그것을 좋아하는지도 알 수 있을테니 말이죠. 별 거 아닌 반걸음의 일탈이 여러분의 삶에 새로운 자극이 될 거라 생각합니다. 회사 일을 대하는 자세도 달라질 것이고요.


마지막으로 "성장"의 키워드를 놓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성장을 바라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일을 하는 과정에서 성장한다는 느낌이 없다면 하루하루가 견디기 힘들 거라 생각합니다. 버티는 삶이 아닌 즐기는 삶이 되기 위해서 어제보다 나은 오늘을 만들어 가시길 바라겠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필요하다면 적극적으로 싸우셨으면 좋겠습니다. 정-반-합의 원리처럼 여러 의견이 나와야 조직 또한 건강한 발전을 이룰 수 있을테니까요.

그리고 그 과정이 있어야만 회사에서건 개인의 삶에서건 의미가 생기지 않을까 싶습니다.  적어도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직장 생활이 괴로운 시간으로만 남지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 싸우는 순간은 물론 괴롭지만 그 투쟁은 무용하지 않을 겁니다.



일상의 잔잔한 행복을 응원합니다.


최근 저는 행복이란 무엇일까에 대해서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예전에 제가 느끼는 행복은 큰 폭풍우를 견디고 맞이하는 햇살 같은 거라 생각했습니다. 뭔가 대단한 성취가 동반되어야 한다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지난 몇 년간 새로운 도전을 하나씩 하면서

행복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별거 아닌 작은 도전의 경험이 저로 하여금 수시로 행복함을 느끼게 만들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일상을 잘 살아가는 것이야 말로 행복의 가장 필요한 부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크고 대단하지 않더라도 소소한 행복을 자주 느끼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 또한 깨달았습니다.


우리 회사 분들도 미래의 행복을 위해서 현재의 행복을 희생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하루 하루 행복하게 지내기 위해 내가 어떤 것을 하면 좋을지에 대해서 고민하며 지내시길 바랍니다. 그 과정에서 진짜 행복을 찾길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저는 제가 잘 됐으면 좋겠습니다. 10년 뒤에도 20년 뒤에도 끊임없이 일하며 많은 분들께 선한 영향력을 미치고 싶습니다. 그래야 수많은 선후배님들께서도 또 다른 희망을 품을 수 있을테니까요.


KB에서 일했던 지난 17년간 즐겁고 행복했습니다.

많은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회사와 모든 임직원들의 안녕을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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