될 까 걱정이었는데...
회사에 사직서를 내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아직 사표에 잉크가 마르지도 않을 때였다. 우연히 인스타그램을 보다 MBC 현직 아나운서의 피드를 스치듯 보게 되었다. 아나운서 공채가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동안 관심도 없던 아나운서 공채 뉴스가 내 눈에 들어온 게 신기했다.
왜 그랬는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별 생각없이 공채 내용을 찾아 보았다. 그리고 최근의 시류를 반영한 듯 나이도 학력도 제한하지 않는다는 문구가 눈에 띄었다.
앗, 이게 뭐지?
갑자기 가슴이 벌렁거렸다. 잘 믿지도 않는 우주의 기운이 나에게 쏠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내가 사표를 낸 걸 알고, MBC가 아나운서를 모집하고, 나를 위해 나이 제한도 없앤 것 같았다. 천우신조, 하늘이 준 기회였다. 아나운서가 되는 걸 바라진 않고 살았는데 막상 이런 기회를 보니 마흔이 넘어서는 될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물론 그 느낌의 근거는 없었다. 그냥 느낌이 그랬단 거다.
설레는 마음으로 부랴부랴 입사 지원서를 클릭했다. 은행원 1년 차 때, 몰래 아나운서 시험을 보고 16년 만에 원서를 썼다. 덕분에 간만에 학교 사이트에 들어가 학부 때 성적도 확인했다. 증명사진도 없어서 대충 핸드폰에 있는 사진을 편집해 넣었다.
그리고 자기소개서 항목을 하나씩 써 내려갔다. 오랜만에 쓰는 자기소개서가 생경했다. 역시 방송국에서 하는 거라 그런지 자기소개의 내용들이 일반적인 것과는 사뭇 달랐다. 하긴 내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것들도 17년 전의 것들이니 다른게 당연했을 수도 있다.
- 지원자님이 생각하는 지원 분야의 '핵심 역량'은 무엇인지 설명하고, 본인의 인생 경험에서 이를 발휘한 구체적인 사례를 소개해 주세요.
- 지원 분야와 관련하여 지원자님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트렌드 또는 이슈'를 2가지 선택하시고, '트렌드 또는 이슈'에 대한 지원자님의 생각을 서술해 주세요.
- 지원자님의 지원 분야와 관련해 '혁신'을 실천한 기업(또는 프로그램이나 콘텐츠)의 '구체적 사례'를 설명하고, 이에 대한 지원자님의 생각도 함께 서술해 주세요.
- 지원자님의 지난 인생의 모든 기록이 A라는 포털사이트에 담겨 있다고 가정했을 때, 해당 포털사이트에서 본인을 검색한다면 가장 많이 검색될 연관검색어는 무엇이며, 그 이유도 서술해 주세요.
꾸준히 글을 써온데다 질문들도 평소 내가 관심있는 항목들이어서 쓰는 것 자체가 아주 어렵진 않았다. 솔직한 생각을 분량에 맞춰 한 줄 한 줄 적어 갔다. 그런데 큰 문제가 하나 있었다. 바로 영상을 찍어서 올려야 한다는 게 그 문제였다. 자기 소개를 1분짜리 영상으로 올려야 한단다. 그것도 편집없이 핸드폰으로 말이다. 솔직히 정말 귀찮았다. 어디 스튜디오에서 촬영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기에 집에서 벽에 쭈구리고 앉아서 촬영을 진행했다. 그렇세 간단하게 1분짜리 소개 동영상을 만들었다. 큰 공을 들이진 못했지만 예쁘게 머리도 하고 간단하게 아내가 준 크림으로 피부톤도 정리해서 영상을 촬영했다.
부랴부랴 마감 시간에 맞춰 원서를 넣었다. 그리고 원서 접수가 잘 되었다며 수험번호까지 찍힌 메일을 받았다.
메일을 받고 나니 내가 아나운서 원서를 넣었다는 게 실감이 났다. 그리고 갑자기 나도 모르게 흥분하기 시작했다. 기분 좋은 흥분이었다. 20대 때는 원서를 넣으면서 “꼭 붙어라”라는 간절한 마음이 컸지만 이번에는 마냥 즐거웠다. 이 나이에 이런 도전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신기했고 나 스스로도 신통했다. 오랜만에 느끼는 설렘도 좋았다.
그리고 이런 사실을 혼자만 알고 있기에 아깝다는 생각에 여기저기 떠벌이기 시작했다. 아나운서 시험이라는 지금의 상황에서 말도 안되는 원서를 넣었다는 것 자체가 좋아서 사람들에게 자랑했다.
서류 발표도 안났는데 카메라테스트와 면접 준비에 들어갔다. 과거의 경험을 떠올리며 뉴스 등을 읽어봤다. 대강의 일정도 체크했다. 두 번의 시험은 주말에 있다고 하던데 지금 당장 주말 일정은 없어 다행이었다. 혼자서 짧은 준비를 하며 착각의 늪에 빠졌다. 될 거 같은데 어떻게 하지, 라며 사표를 쓰면서 세운 계획들을 다시 수정해야 하는 건 아닌가라는 걱정도 들었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안했지만 나 혼자 김칫국을 두 사발쯤 시원하게 들이키고 있었다.
그리고 며칠 뒤, 문자 하나가 날아왔다. 서류전형 결과가 홈페이지에 게시되었으니 확인해 보란다. 그냥 결과를 문자로 알려주면 좋으련만 그렇지 못하는 사정이 있는 듯 했다. 가벼운 마음으로 서류는 되겠거니라는 생각으로 사이트에 접속했고, 비밀번호까지 눌러서 결과를 확인했다.
그리고 아쉽지만 서류전형에서 떨어졌다는 메일을 확인할 수 있었다. 믿기지 않아 여러 번 눈을 씻고 읽어봤지만 결과는 같았다.
무슨 근거로 그런 자신감과 여유를 부렸는지 모르겠지만 어찌됐든 나의 새로운 도전은 MBC 앞에 가보지도 못한 채 서류전형에서 마무리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시원하게 냉면을 먹으며 속을 달래야 했다.
처음에는 속상했다. 서류 전형에서 떨어지는 것은 생각도 안했는데 나 스스로를 너무 과신한 듯 했다. 17년 전에는 서류전형은 많이 붙여줘서 그런 생각을 했었는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상황이 바뀌었을텐데 요즘의 취업 시장을 내가 너무 모르고 있었나 보다.
그런데 조금 지나니 떨어진 상황 또한 유쾌했다. 떨어져서 유쾌하기 보다는 그냥 아나운서 원서를 넣었다는 것 자체가 좋았다. 붙는 게 오히려 이상한 상황이었다. 아나운서를 위해 몇 년간을 매달린 사람들도 있을텐데 나의 경우 그런 건 아니었다. 그냥 가벼운 마음이었으니 안되는 게 당연했다. 그걸 인정해서 낙방 또한 즐거운 경험이 되었던 것 같기도 하다.
아마 내가 간절하게 이걸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면 지금의 도전이 즐겁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서류전형부터 물 먹은 내가 너무 싫었을런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하고 싶은 마음으로 가볍게 툭 던지며 아나운서 시험을 봤고, 그냥 즐거웠던 도전이었기에 결과가 어땠든 며칠간 행복했다. 그리고 그것이 나의 에너지를 올려 주었다. 다른 도전도 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거면 충분하지 싶다. 결과에 연연하기 보다는 도전 자체를 즐기는 것, 그게 중요한 것 아닐까?
퇴사를 하면서 인생 2막을 어떻게 설계해야 할지 고민이었는데 하나의 큰 발견을 한 듯 싶다. 그것은 바로 “즐거운 도전”을 계속하는 것이다. 그것이 꼭 좋은 결과가 아니더라도 괜찮다. 너무 간절해 하기 보단 이렇게 툭툭 던져야겠다. 결과보다는 그냥 도전히는 것을 즐기며 재밌게 살고 싶다.
어찌됐든 이렇게 한 편의 글도 썼으니 꼭 밑진 도전은 아닌 셈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