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식 후 나는 무엇을 느꼈나?
살이 빠지니 나이가 들어 보인다
9박 10일 동안 지리산 포도 단식원에 다녀왔다. 첫 이틀은 숯과 레몬즙을 먹으며 몸의 독소를 빼냈고, 다음날부터 포도로만 연명했다. 저녁이면 관장을 하며 장을 청소하기도 했다. 그렇게 10일을 보냈더니 살이 많이 빠졌다. 6kg 정도 빠졌다. 살을 빼러 간 건 아니었는데 졸지에 다이어트를 해버렸다. 오랜만에 보는 지인들은 살이 많이 빠졌다며 늙어보인다는 말도 한다.
지리산에 갔다 와서 나는 의도치않게 살이 빠지고 노안을 얻게 됐다.
지리산에 간 것은 구본형 선생의 <익숙한 것과의 결별> 때문이었다. 그가 느꼈던 것들을 조금이나마 느껴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두려움과 부담감, 그런 감정으로 지리산에 갔었다. 과연 그곳에서 제대로 경험할 수 있을까, 아니 버틸 수 있을까 출발부터 걱정이 앞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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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열흘간의 포도단식은 힘들지 않았다. 우선 하루에 다섯번씩 포도를 먹었기에 배고픈지도 몰랐다. 게다가 맑은 지리산 자락의 공기와 물 덕분에 몸이 건강해지는 기분도 들었다. 책도 읽고 생각도 하며 하루 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 좋은 인연도 만나서 친해지기도 했다. 70대, 60대, 50대, 40대의 다양한 단식원 동기들을 만나서 그들로부터 선물도 받고 가르침도 받았다.
지리산 포도단식원에서의 열흘은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지난 화요일 서울로 올라왔다. 오자마자 정신 없이 바빴다. 오자마자 둘째 아들 유치원 상담부터 다녀왔다. 상담을 마치고 오랜만에 만난 아이들과 신나게 부르마블을 하고 놀았다. 그리고 버킷리스트 만드는 워크샵도 진행했다. 워크샵 준비를 하느라 이틀동안 정신이 없었다.
휴가를 다녀오자마자 일이 몰려 들었다. 문득 회사 다닐 때 생각이 났다. 휴가를 다녀오면 아침 8시 30분부터 여기 저기 불려다니느라 바빴다. 회의도 많았고, 해야 할 일도 많았다. 휴가지에서 느꼈던 감흥은 회사에 복귀하고 점심시간이 되기전에 잊혀지곤 했다. 휴가는 아련한 기억으로 사라져가곤 했다.
물론 회사를 다닌 사람들에 비하면 훨씬 여유로운 복귀긴 했다. 하지만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양태는 다르지 않았다. 단식원에서 오자마자 정신없는 일상은 알아서 단식원의 생활을 잊게 만들었다. 아직 정리도 제대로 못했는데 말이다.
사람들이 단식원 생활이 어땠냐고 물어볼 때마다 대답하기가 어렵다. 과연 그곳에서 뭘 얻었는지 정리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마음먹고 글을 쓰는 이유는 조금이라도 정리를 해보고 싶어서다. 글을 쓰는 동안이라도 그곳에서의 10일 동안 무엇을 얻었는지 기록해보고 싶다.
우선 일정이 너무 짧았다. 10일이면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오산이었다. 단식을 하며 몸의 독소를 뽑아내고 잡생각을 빼내고 싶었다. 우선 10일로 몸의 독소를 뽑아 내는 데 한계가 있었다. 단식원을 운영하시는 목사님 말씀으로는 2주 정도는 되어야 소장에 있는 독소까지 빠져나올 수있다고 하는데 10일로는 다소 부족했다.
그래서였을까? 생각을 온전히 정리하기도 어려웠다. 물론 좋은 경험이었다. 하지만 구본형 선생처럼 뭔가 "탁"치는 영감을 받진 못했었다.
'내가 너무 많은 것을 바랐나?'
구본형 선생도 4주간 머물렀다고 하니 조금 더 길게 있었으면 좋았을걸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서울생활을 조금 걸쳐 있었던 것도 아쉬웠다. 처리하지 못한 일들이 많았다. 게다가 휴대전화도 끊지 못했었다. 수시로 울려대는 카톡 때문에 집중하기 어려운 시간도 많았다. 게다가 처리해야 할 일들도 몇 있었다. 차 문제도 해결해야 했고, 아이들과의 여행 문제도 해결해야 했다. 공교롭게 시간이 겹쳤다. 물론 어쩔 수 없는 부분이기도 했다. 하지만 해야 할 일들을 하면서 다른 것들에 신경을 쓴 건 문제였다. 쓸데 없이 인터넷을 보고 사람들과 이야기 하는 것이 오히려 조금은 나의 생각정리를 방해한 것 같아 아쉬웠다.
'언제나 핸드폰이 문제다.'
조금 더 과감하게, 시간을 떼어내어 나를 고립시켰다면 조금 더 낫지 않았을까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아쉬운 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곳 생활에서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몇 가지를 얻을 수 있었다.
1. 두려움을 즐겨보자
단식원 생활에서 가장 많이 나를 억누른 건 두렵다는 감정이었다. 처음 도착했을 때에는 이곳에 잘 적응할 수 있을지가 걱정됐다. 어느 정도 적응이 되고 나서는 과연 무언가를 얻을 수 있을지, 아무것도 얻지 못하면 어떻게 하나 두려웠다.
다행히 두려움은 시간이 지나 서서히 극복되었다. 어두운 새벽에 별을 바라보며 두려움에 대한 생각도 많이 할 수 있었다.
두렵다는 감정을 숨기고 싶었었다. 두렵다는 감정이 부정적으로 느껴졌다. 뭔가 소심하고, 불안해 하는 것을 나타내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새로운 환경에 놓였을 때 두렵다는 감정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안전지대를 벗어나는 것이기에 적응하는 게 즐겁기만 하다면 이상한 것이다. 두렵다는 감정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시도를 하면 할 수록 두려운 감정과 많이 마주하게 된다는 아주 하찮은 진리도 알게 됐다. 편하게 안전지대에만 머무른다면 두려운 감정을 느낄 이유가 없다. 내가 만약 휴직을 하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단식원에 오지 않았더라면 두렵다는 감정을 느낄 수 없었을 것이다. 두려운 감정을 느끼게 되는 나의 새로운 도전들을 오히려 축하해주는 게 맞겠다 싶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두려움을 즐기는 게 편할 듯 싶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는 것처럼 두려운 감정에 나를 내놓아야 지푸라기라도 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두려움을 느끼는 것을 오히려 감사하게 생각하는 게 맞을 듯 싶었다.
"가장 안전한 길이 가장 위험한 길이다"
마케팅 구루인 세스 고딘이 한 말이라고 한다. 안전하게 살면서 두려움을 회피할 것인가, 두렵더라도 위험한 길을 가볼 것인가! 위험하더라도 새로운 길을 가보고 싶다.
2.절제하는 것에 대해서 고민해보다.
포도만 먹는다는 것은 사실 어렵지 않았다. 단식원에서는 포도 외의 것을 먹는 게 불가능했다. 유혹도 없었다. 단식원 "동기"들끼리 모여서 먹고 싶은 음식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했지만 어짜피 그림의 떡이었다. 나름 10일 동안 그곳에서 지내면서 먹는 것을 절제하는 게 힘들지 않았다.
몸을 비워내고 정신을 정리하다보니 계속 이렇게 절제하는 삶을 살아보고 싶었다. 우리 몸에도 좋지 않고, 지구 환경에도 좋지 않다고 하는 것들을 끊어보면 어떨까 싶었다. 대표적인 것들이 고기, 밀가루, 커피 이런 것들이었다.
게다가 단식이 끝나고 보식도 해야 했다. 몸을 보호하고 영양분을 공급하는 보식 기간에 음식을 조절해서 먹을 필요가 있다고 한다. 아무래도 작아진 위에 이것저것 아무거나 넣으면 탈이 날 수도 있으니까.
서울에서 며칠 째 보식을 하며 고기, 밀가루, 커피를 끊고 지내고 있다. 그런데 생각보다 많이 힘들다. 지리산에서는 상상으로만 보여졌던 음식의 유혹들이 여기서는 실물로 보이니 참기 어려울 때도 많다. 얼마전엔 단체로 햄버거를 먹는데, 먹고 싶어 죽는줄 알았다. 나를 둘러싼 유혹들이 너무 많다.
기왕 하기러 한거 조금 더 유지해보고 싶다. 굳이 몸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그만큼 나를 절제해보고 싶다. 나를 좀 더 통제 해보고 싶었다.
한 달 정도라도 도전하면 좋을 것 같았다.
혹자는 그렇게 먹는 기쁨을 잃어버리면 무슨 재미로 인생을 살아가냐고 이야기 하기도 한다. 하지만 도를 닦는다는 기분으로, 하고 싶은 마음을 눌러보는 것도 나에게 도움이 될 것 같았다. 하고 싶은 것을 참고, 하기 싫은 것도 해보는 것이 나를 변화시킬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한달이란 기간을 설정해둔 것은 얼마전 읽은 <지금 하지 않으면 언제 하겠는가>에서 읽은 것을 따라해 보는 것이기도 했다. 블록스택이라는 앱을 만든 라이언 셰어는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는 방법으로 한 달에 하나씩 '제거하기'와 '매일하는' 목표를 세워서 지낸다고 한다.
"각 달의 계획을 세워 실천하면서 나는 깨달았다. 뭔가를 제거하지도 않고, 뭔가를 시도하지도 않는 날을 내가 얼마나 많이 보냈는지를, 그래서 과거를 후회하고 미래를 불안해하는 데 많은 에너지를 쏟았다는 것을. 현재에 집중하려는 삶을 살려면 지금 이 순간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끊임없이 각성시켜주는 구체적인 계획과 지루하지 않은 반복이 필요하다는 것을"
괜찮은 것 같아 따라해볼 생각이다. 조금 절제된 삶을 위하여
3.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되다.
1월부터 감사 일기를 쓰고 있다. 감사일기를 쓰면 긍정적인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아무 생각 없이 지나쳤던 풍경들이 감사해지고, 말도 안듣고 투정만 부렸던 아이들이 감사해진다. 아내는 존재감 자체로 감사해진다. 쓰지 않았을 때 추상적이었던 것이 구체적으로 바뀌는 기분이다.
단식원에서 지내다보니 감사하는 감정이 더욱 커졌다.
우선 내 몸이 건강하다는 것 자체가 감사했다. 이곳에는 아파서 오시는 분들도 많다. 포도단식이 치료 효과가 있다보니 암에 걸리신 분들, 지병이 있으신 분들도 이곳을 많이 찾으신다. 그 분들은 며칠동안 아파서 끙끙대기도 하신다. 잠도 제대로 못 주무신다. 그들에 비하면 나는 너무 쌩쌩했다. 건강한 몸 상태가 감사했다.
나를 둘러싼 환경에도 감사하게 된다. 단식원을 오고 싶다고 아무나 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도와주는 아내와 믿어주는 식구들이 있으니 가능했다. 주변 사람들도 항상 나를 도와주려고 고생하는 게 느껴졌다. 멀리 떨어져 있다보니 좋은 점들만 생각나는 듯 했다.
그리고 단식원 생활에서도 감사할 일이 많았다. 목사님과 사모님은 나를 위해서 기도하시고, 하나라도 더 주시려고 노력하셨다. 단식원 동기들은 나를 위해 쑥도 뜯어줬다. 그리고 좋은 강의도 알려주며 새로운 출발을 응원해주기도 했다. 아름다운 자연환경도 한 몫했다. 매일 산길을 걸으며 지리산을 느낄 수 있던 것도 감사할 일이었다. 별똥별도 봤다. 인생 처음으로 마주한 별똥별이었다. 별똥별을 보는 순간 기분이 묘했다. 찰나였기에 소원을 제대로 빌진 못했지만 그래도 그런 경험을 해줄 수 있게 한 것만으로도 감사할 일이었다.
감사하면서 사는 것은 실제 건강에도 도움이 많이된다고 한다. 긍정적인 마음을 가질 때 나오는 엔돌핀이 몸에 좋은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몸 건강보다 정신건강에 더 좋아보였다. 훨씬 머리가 맑아지고 마음이 편안해졌기 때문이었다.
단식원에서의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된 것은 엄청난 보람이었다. 그리고 그런 감정은, 어쩌면 단식이라는 극한상황에 놓여있다보니 나온 게 아니었을까 싶기도 했다.
4. 문제는 이 마음을 어떻게 유지하느냐다.
단식원을 나오면서 기분이 참 좋았다. 많은 것을 얻은 것 같았고 이것이 서울로 돌아가면 나의 삶에 에너지가 될 것이라는 확신도 들었다. 올해 초 자기혁명캠프 수업을 들었을 때의 기분과 비슷했다. 그때도 너무 감사하고 또 열심히 살아야겠다며 마음을 다잡았는데, 역시 이번에도 그런 마음이 불쑥 불쑥 샘솟아서 좋았다.
하지만 이런 기분은 금세 시들어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에빙하우스의 망각곡선처럼 우리는 금방 잊어버리게 되어 있으니 말이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 하는 말도 괜히 나온 말이 아니니까.
어떻게 이 기분을 잘 유지시키고, 나의 변화를 위한 동력으로 활용할 것이냐가 중요한 과제이다.며칠동안 고민해봤다. 이런 마음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말이다.
우선 함께 했던 사람들을 잘 활용하는 것이 방법일 수 있다. 같이 지냈던 단식원 동기들이 있다. 연령대는 다양하지만 포도단식으로 맺어진 끈끈한 "동료애"가 있다. 그들과 지속적으로 이야기도 나누며 독려하고 싶다. 그때의 기분을 잊지 않는 가장 좋은 방법일 것이다.
그리고 내가 가진 감정을 사람들에게 자주 전파해야 할 것 같다. 지금도 감정을 정리하면서 그 때의 감동이 되살아나는 듯 하다. 글로 옮기고 말로 옮기는 과정에서 잘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한다. 그리고 내 이야기를 자주 전달해야 사람들에게 책임감도 생긴다. 이른바 '선언효과'다. 내가 이런 감정을 느꼈다고 선언함으로써 내 말에 책임을 지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또 다른 자극을 위한 도전을 계속 해보는 것도 방법이다. 새로운 시도를 계속 하다보면 그때마다 이런 벅찬 감정을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게 끊임없이 마약을 맞듯이 긍정적인 에너지를 받으면 단식원의 마음을 더욱 잘 이어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자기혁명캠프의 기운이 사그라질 때쯤 단식원에 와서 이런 기분을 느낀 것처럼 말이다. 계속 이런 환각상태(?)를 유지할 도전을 찾아봐야 겠다.
팀 페리스의 <지금 하지 않으면 언제 하겠는가?>를 읽어보면 '어떻게 해야 후회 없는 결정을 내리는 데 필요한 인간의 판단력을 향상시킬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깊이 탐색하는 작가겸 연설가인 줄리아 갈레프가 한 말이 나온다. 후회없이 사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다.
우리는 매 순간 최선을 다해 살아간다. 다만 그걸 알아차리지 못할 뿐이다. .. 자신이 최선을 다했음을 명확하게 '깨달으면' 그만큼 후회는 줄어든다는 뜻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 어떤 일을 끝마쳤을 때는 의식적으로 자신이 최선을 다했음을 인식해보라. 그러면 생각이 바뀌고, 속이 시원해지고, 인생을 좀 다른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최선을 다했다는 걸 온전하게 깨닫는 순간, 결과에 그다지 매달리지 않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나는 매 순간 최선을 다한다. 그리고 단식원에서의 9박 10일도 최선을 다하고 왔다. 물론 아쉬운 점이 있었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것이기도 했다. 주어진 환경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다 했고 또 얻을 수 있는 많은 것을 얻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였는지 신께서는 내게 별똥별이란 선물도 주셨고 말이다.
앞으로 3년 뒤쯤 다시 지리산 포도단식원에 가볼까 한다. 그때는 나의 책들을 손에 들고, 고민의 깊이를 더 해 좀 더 사람들을 도와주는 사람으로, 선한 영향력을 더 펼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서 가고 싶다. 그때까지 단식원의 기운을 잘 유지하며 두려움을 즐기며 살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