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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호진 Jun 19. 2019

꾸역꾸역 하다보면

좋은날이 뭔지 모르지만 좋은 날이 올거라는 믿음으로

우중주 (雨中走)


새벽 네 시에 알람이 울렸다. 그리고 한참을 밍기적 거리다  네 시 반쯤 일어났다. 꾸준히 하면 습관이 된다는데 여전히 새벽에 일어나는 건 힘이 든다.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간단히 일기를 쓰고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나갈 채비를 마쳤다. 정말 나가기 싫었지만 하루라도 빼먹으면 안될 것 같아 겨우겨우 맘을 추스렸다. 때마침 소리가 들렸다.


"우르르 쾅쾅"


분명 천둥소리였다. 창문을 열고 비가 오는지 확인해봤다. 안오는 것 같았다. 그냥 나갔다. 아파트 출입구를 나가자마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빗방울이 심상치 않아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우선 신발장에서 우비를 꺼내고 다시 나왔다. 아파트 1층 로비에서 밖을 바라보는 데 비가 꽤 많이 내리고 있었다. 한참동안 비를 바라봤다.


나가야 되나 말아야 되나 고민했다. 그 순간 드는 생각이 있었다.


"아깝다"


운동복을 갈아입고, 우비를 꺼내온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그냥 나갔다. 빗방울이 점점 굵어지는게 느껴졌지만, 그냥 나가보았다. 아침에 일어나 목표로 세운 7km만 뛰고 오자는 마음이었다. 번쩍이며 번개도 치고, 요란스럽게 천둥도 쳤다. 뛰다가 벼락 맞는 건 아닌가 싶었지만 그냥 뛰었다. 뛰다보니 그럭저럭 나쁘지 않았다. 비를 맞으며 뛰고 있는 나를 보니, 미친것 같았다.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 비를 맞고 뛰고 있나 싶었다. 매일 달리기를 한다고 상을 받는 것도 아니고, 하루 거른다고 누가 뭐라고 하는 것도 아닌데 매일 매일에 집착하는 내가 미친 것 같았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이틀 정도는 제낀 적이 있다)  


달리고 있는데 나같은 분들을 몇 분 더 뵐 수 있었다. 그 분들도 나처럼 미치신걸까? 우비를 입고 있는 나는 양반이었다. 그들은 막무가내로 나오신 분들이었다. 멀리서 봤을 땐 제정신이 아녀보였다. 그런데 점점 그분들이 다가오면서, 표정을 볼 수 있었다. 비와 상관없이 한 발 한 발 내딛는 표정에 큰 변화는 없어보였다. 비는 내리고, 달리는 건 달리는거라는 생각인 듯 싶었다. 그 순간 "멋지다"라는 감탄사가 나왔다. 묵묵히 가는 미친(?) 사람들이 멋져보였다. 그리고 나 또한 멋져보였다. 자뻑같아 보이긴 했지만 우중에도 꾸역꾸역 나와서 달리기를 하고 있는 나 스스로가 대단해보였다. 어쩌면 정말 제대로 미쳐서 그런 생각이 들었을런지도...


솔직히 요며칠 달리는 게 힘에 부쳤었다. 발바닥도 아팠고, 몸이 뻐근한 느낌이었다. 그래서 조금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달려야 할 이유를 찾은 느낌이었다. 내가 매일 달리는 이유는 나 스스로를 멋진 사람이라고 인정하고 싶기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내가 나를 사랑하는 마음을 느끼고 싶었다. 최근 들어 달리기 권태기를 겪었던 나에게 세차게 내린 비는 왜 내가 달려야 하는지를 일깨워주었다. 


꾸역꾸역 하다보면


얼마전 제현주 작가의 <일하는 마음>이라는 책을 읽었다. 연초에 읽었을 때는 크게 와닿지 않았다. 기억나는 것은 스키 정도? (작가는 스키광이고, 스키에 대한 이야기가 몇 번 나온다) 남들은 다들 좋은 책이라고 하던데, 왜 나에게는 남는 게 없는지 아쉬웠다. 작가의 오프라인 강연회를 듣고, 최근 들어 다시 읽어보게 되었다. 직장생활에 대해 정리해보는 데 이 책이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두 번째 읽는 책은 완전히 새로웠다. 연초에 보이지 않았던 숨어 있는 이야기들이 나를 사로잡았다. 일에서 멀어지고 나서야, 일에 대한 맥락과 그 속에 나 자신이 보이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하기도 했다.


<일하는 마음>에서 유독 눈에 띄는 단어가 하나 있었다.


"꾸역꾸역"


단어가 슬프게 다가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쓰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응원해주고 싶은 말이기도 했다. 제현주 작가는 책을 통해 꾸역꾸역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의심이 들 때면 그냥 머리를 파묻고 꾸역꾸역 하면 된다. 계속하다보면 그것만으로도 이르게 되는 어떤 경지가 있다. 당신의 '잘함'으로 환산되지 않더라도 꾸역꾸역 들인 시간이 그냥 사라져 버리지 않는다 (고 믿고 싶다.)   <일하는 마음 中>


꼰대식으로 표현하자면, "잔말 말고 그냥 해"라는 이야기였다. 그렇게 꾸역꾸역하는 시간은 어떤 방식으로든 보상으로 따라온다고 한다. 성공이 보장되지는 않아도, 금전적 보상이 따르진 않아도, 분명 공을 들인 시간만큼은 우리를 배신하지 않는다는 이야기, 아니 그것을 믿는 작가의 마음이 충분히 공감이 갔다. 나 또한, 원하는 결과를 보장받지 않아도 충분히 의미있는 시간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란 생각도 들었다.



공들인 시간은 배신하지 않는다


달리기 말고 꾸역꾸역 해나가고 있는 게 하나 더 있다. 바로 글쓰기다. 작년 9월부터 나는 네이버 블로그에 매일 한 편씩의 글을 올리고 있다. 처음엔 그럭저럭 했는데, 요즘들어 힘에 부치다. 몇몇의 글을 사람들이 좋아해주면서, 더 좋은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들어 글을 쓸 때마다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일 하기로 마음 먹은 이상 꾸역꾸역 글을 써가고 있는 중이다.


최근에 글쓰기 강의를 하게 됐다. 우연한 계기가 있었다. 단체 채팅방에서 나의 글쓰기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다는 사람들의 요청이 있었다. 나 또한 재미있을 것 같아 강의를 개설해봤다.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강의를 들어주셨다. (내가 예상한 것보다 많다는 것이지 절대적 숫자가 많다는 것은 아니다) 


강의는 글쓰는 나를 되돌아 보는 계기가 되었다. 강의 내용을 만들면서 지난 4년간 블로그에 글을 써왔던 나를 돌이켜 보게 되었다. 글쓰기 강의를 할 때마다 강사들이 이야기 하는 맨 처음 글들이 참 허접했다라는 이야기를 들으며 뻔한 이야기다 싶었는데, 나도 그랬다. 내가 쓴 게 맞나 싶을 정도의 글이 많았다. 문장도 이상했다. 무슨 말을 하려는 지 알기 어려웠다.


그렇다고 지금 엄청난 글을 쓰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지난 4년간 내가 많이 성장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글 하나 하나에 내 생각이 녹아 들어가기 시작했고, 사람들의 공감을 얻을 수 있었다. 시작할 땐 허공속에 외치는 블로그였는데, 지금은 매일 나의 글을 읽어주는 독자가 생겼고, 응원의 댓글을 남겨주는 분들이 생겼다. 좀 더 좋은 글을 써야한다는 부담이 나를 짓누를 때가 있지만, 나의 글을 읽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내게 큰 자산이 되고 있다.


4년이라는 시간이 헛되어 보이지 않았다. 엄청난 작가가 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에게 충분히 의미있는 시간으로 정리 되었다.


누구나 사람들의 결과에만 집중하지만...


한동안 자기계발서를 쓰신 분들의 책을 읽으며 그들을 부러워했었다. 영어 책 한권에 대한 이야기를 쓰신 김민식 PD님도, 메모하는 습관을 만든 신정철 작가님도, 달리기를 하며 인생이 바뀐 이영미 작가님도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그들이 이뤄낸 성과들과 한 권의 책으로 정리되었다는 사실이 부러웠다.


정작 그들이 오랜 기간 노력해 온 사실에 집중하진 못했었다. 그들이 만든 나무의 뿌리와 줄기는 보지 않고 열매만 보아왔던 것이다. 그러면서 나 또한 빨리 빨리 그들처럼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결과에 집착했다.  급하게 먹다 보면 체한다는데, 체하기 딱 좋은 상황이었다.


제현주님이 알려준 꾸역꾸역은, 기다리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그 시간이 절대 나에게 무의미하지 않다는 것도 알게 했다. 희망고문 같긴 하지만 그렇게 믿으며 꾸역꾸역 하고 싶다. 굳이 김연아 선수의 밴쿠버 올림픽처럼 되진 않아도, 누구나 바라는 베스트 셀러 작가가 되지 않아도 그렇게 시간을 들인다면 충분히 가치 있는 나만의 무엇인가가 나올 것이다. 적어도 비오는날 달렸던 것처럼 스스로를 인정하는 순간이라도 올 것이다.


비오는 날 달리기가, 어쩌다 보니 하게 된 강의가, 그리고 다시 읽은 <일하는 마음>이 꾸역꾸역 또 하루를 열심히 살아가게 만들어 주었다. 다시 신발끈을 고쳐 매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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