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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럼에도 불구하고 Jul 06. 2020

당신의 웃음은 무슨 색?

공감각에 관한 생각들


자정. 귀에서 바람 소리가 인다. 들리지 않는 소리. 그러나 분명 감지되는 소리. 나는 인간의 청각이 포착하지 못하는 특별한 음파(音波)를 상상한다. 보랏빛을 띤 검푸른 물결 무늬를 떠올린다.


암흑. 감은 눈에서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보이지 않는 형체. 그러나 분명 감지되는 실루엣. 나는 인간의 시각이 포착하지 못하는 스펙트럼의 파장을 상상한다. 먹색을 머금은 투명한 선과 면을 떠올린다.


(과학적 아니 병리학적으로 볼라치면, 이명증(耳鳴症) 혹은 동공 적응 반응 장애의 일환일 수도 있겠다. 맥 빠지는 일이로군.)


Synesthesia. 공감각(共感覺). 아이의 학교 과제를 흘깃거리다가 발견한 제목이다. '공감각'에 관한 한 페이지 가량의 짧은 글. 제목 또한 시선을 끈다.


What Color is Your Laugh?


공감각을 창의력의 원천으로 삼는 것은 현명한 일이다.


책이나 신문, 잡지를 볼 때 우리는 보통 인쇄된 활자를 검은색으로 인식한다. 그러나 어떤 이들에게 숫자 4는 파랑으로, 선물이라는 단어는 초록으로 다가온다. 그들은 두통으로 인한 통증은 오렌지색, 설탕의 맛은 둥글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오케스트라 선율을 흔들거리는 초록의 선들로 볼 수도 있다. 일반인과는 다른 독특한 감각 즉 '공감각(synesthesia)'을 타고난 것이다.


Synesthesia라는 말은 그리스어 syn(영어로 together를 의미)과 aesthesis(영어로 perception을 의미)로부터 왔다. 말 그대로 “joined perception”이다. 어우러진, 연결된, 잇닿은, 그리고 통합될 수 있는 감각이다.


지문에 나온 Simon Baron 교수의 말처럼, 공감각을 '풍부한 지각(enriched perception)'으로 삼는 것이 유용할 것이다. 창의적으로 기억을 자극해 '영감(inspiration)'의 원천으로 삼는 것. 무언가를 창조하(려)는 사람에게 공감각은 커다란 선물 아닐까.



# What Color is Your Laugh?


이번엔 아이에게 물어본다.


나: 너한테 웃음은 무슨 색이야?

아이: 웃음소리에 무슨 색깔이 있어요?

나: 웃음소리를 생각할 때 떠오르는 색깔 말이야.

아이: 초록색!


주저 없이 ‘초록색’이라고 외치는 아이. 평소 자신이 좋아하는 색깔이 ‘웃음’이라는 긍정성과 맞물려 순간 하나로 통합된 걸까.


아이: 그럼 엄마한테 웃음은 무슨 색깔인데요?

나: 투명한 색.

아이: 에이, 투명한 게 색깔이 어디 있어.


글쎄, 아무 맛이 없는 무미(無味)도 하나의 맛이라 일컬었으니, 투명한 무색(無色)도 하나의 색이라 이를 수 있지 않을까. 아무 맛이 없을 때 재료 고유의 풍미가 살아나듯, 투명한 빛의 투과가 있어 사물 각자의 색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게 아닐까, 하는 뭐 그런 생각. (색이라는 것도 인간의 시각 즉 가시광선에 국한된 개념일 뿐.) 내게 웃음은 두껍거나 얇고, 투명하거나 불투명한 것으로 다가온다.



# 풍부한 통합 지각으로서의 공감각


시각적 감각을 동반하는 청각적 자극은 공감각의 일반적 유형이다. 공감각의 사전적 정의는 이렇다.

synesthesia :
1.[생리] 공감(共感 : 자극받은 부위(部位)와 다른 부위에 느끼는 감각)
2.[심리] 공감각(共感覺 : 하나의 감각이 다른 영역의 감각을 불러일으키는 것)


생리학적으로 감지되는 ‘감각(sense)’보다는 보다 의식적인 감각 경험을 일컫는 ‘지각(perception)’에 좀더 가까울 것이다. 어떤 소리로 어떤 빛깔, 어떤 맛으로 어떤 형태를 느끼는 것이다.


그렇다면 공감각(共感覺)보다는 통합지각(統合知覺) 정도가 더 적절하려나?


명명(命名)이야 어찌 되었든. 귀에서 이는 바람에도 색이 있고, 어둠 위를 얇게 덮는 투명한 막에도 색이 있어, 내 감각(感覺)과 지각(知覺)과 인식(認識)과 통찰(洞察)을 풍부하게 할 수만 있다면. 그렇게 짜인 바탕 위에 언어(言語)를 수놓을 수 있다면. 바랄 것이 없겠지.


말(言)은 제풀에 속도를 내어 말(馬)처럼 달릴 것이다. 시각언어든, 음악언어든.

러시아 화가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의 추상화처럼.



# 빨강은 트럼펫 소리 - 음악을 그리는 칸딘스키


칸딘스키는 다른 많은 독일 화가들과 마찬가지로 진보와 과학의 가치를 지양하고 순수한 ‘정신성’을 지닌 참신한 미술을 통해 세계를 새롭게 재건하기를 바랐던 신비주의자였다.


(…) 그는 저서 <미술에 있어서 정신적인 것에 관하여>(1912)에서 순수 색의 심리학적 효과, 이를테면 밝은 빨간색이 트럼펫 소리와 같은 느낌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방법으로써 정신과 정신을 결합시키는 것이 가능하며 또 그것이 필요하다는 신념으로 그는 색채로 표현된 음악을 최초로 시도하여 전시하는 용기를 보여주었다. 이로써 ‘추상 미술(abstract art)’이라고 불리는 것이 처음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 알다시피 칸딘스키의 추상 회화 이념은 표현주의로부터 나온 것이고, 그 표현성에 있어서 음악에 필적할 수 있는 회화를 목표로 한 것이었다.


<서양미술사>, E.H. 곰브리치, 예경, 440p & 450쪽



칸딘스키의 저서 <미술에 있어서 정신적인 것에 관하여Concerning the Spiritual in Art>를 영문 번역한 Michael T.H. Sadler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Kandinsky is painting music.
That is to say, he has broken down the barrier between music and painting.
(…) The lines and colors have the same effect as harmony and rhythm in music.


음악을 그리는 화가. 음악과 미술의 경계를 무너뜨린 칸딘스키는, 회화에서의 선과 색이 음악에서의 하모니 그리고 리듬과 동일한 효과를 가진다고 생각했다.  


이 책의 Part 2: About Painting 중 ‘V. The Psychological Working of Colour’에서 칸딘스키는 큼지막하게 밝히고 있다.


IT IS EVIDENT THEREFORE THAT COLOUR HARMONY MUST REST ONLY ON A CORRESPONDING VIBRATION IN THE HUMAN SOUL; AND THIS IS ONE OF THE GUIDING PRINCIPLES OF THE INNER NEED.


- <Concerning the Spiritual in Art>, Wassily Kandinsky, Translated by Michael T.H.Sadler, Project Gutenberg


색의 조화는 영혼의 떨림과 상응해야 한다. 내면의 요구를 색으로 풀어내는 데 필요한 지침이다.


칸딘스키의 그림들을 들여다보고 있으니, 밤하늘의 검고도 깊은 푸른색이 떠오른다. 나는 검푸른색을 좋아한다. 그러나 빛바랜 파랑은 나의 오랜 악몽을 상징하기도 한다. 어릴 적부터 끝없이 되풀이되었던 파란 대문의 꿈. 파랑,에 대한 나의 독특한 경험을 써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제목도 오래전에 정해놓았다. “그 파랑의 정체”. 언젠가 써봐야지, 하는 마음이 벌써 몇 년 전의 일이던가.


‘색’ 대신 ‘언어’를 대입하여 칸딘스키의 말을 적용해본다. 언어의 조화 역시 내 영혼의 떨림과 조응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나의 내면은 아직도 희미한 진동에 머물러 있을 뿐이다. 그래서일까. ‘조화’에 이르지 못하고 ‘조합’에 그치는 나의 언어는 바깥으로 울림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망설임’은 무슨 모양일까. '기다림'은 또 어떤 색일까.


(2017)


*신기하게도, 머릿속 이미지와 얼추 부합하는 음악이나 비주얼은 홀연히 나타난다. 이 글을 쓰다 로라 말링의 <Short Movie>가 불려오는 것처럼.


https://youtu.be/DdCdT_dcmUI

로라 말링(Laura Marling)의 Short Mov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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