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그럼에도 불구하고 Jul 08. 2020

​이야기의 과정, 그 과정의 서사

2019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2019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애초에 박상영의 <우럭 한 점 우주의 맛>을 읽기 위해 집어들었던 것인데. 대상으로 선정된 것 이외에도 최근의 트렌드 중 하나인 퀴어문학을 대표하는 젊은 작가라는 이유도 작용했을 테고. 이성애든 동성애든 사랑은 아름다운가,라는 우주적 질문 앞에서 "초 단위의 감정 기복(24쪽)"을 빠르고 흥미롭게 펼쳐보이는 작가의 문장들은, 치열하게 썼으되 치밀하지는 않다,는 느낌을 내게 남겼다. 그러나 눈에 띄는 몇몇 문장들.


"사랑은 정말 아름다운가. 내게 있어서 사랑은 한껏 달아올라 제어할 수 없이 사로잡혔다가 비로소 대상에서 벗어났을 때 가장 추악하게 변질되어버리고야 마는 찰나의 상태에 불과했다."(82쪽)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내가 지난 시간 동안 앓았던 열망과도 닮아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상에 대한 열망? 대상에 사로잡혀 있는 자기 자신의 모습에 대한 열망? 그래, 한없이 나 자신에 대한 열망. (...) 새까만 영역에 온몸을 던져버리는 종류의 사랑. 그것을 수십 년간 반복할 수도 있는 것인가. 그것은 어떤 형태의 삶인가. 사랑은 정말 아름다운 것인가."(74쪽)



뜻하지 않게 나를 머물게 한 것은 이 책에 수록된 다른 작품 백수린의 <시간의 궤적>이었다.


한국에서 회사생활을 접고 과감히 프랑스 유학길에 오른 '나'가 파리의 어학원에서 '언니'를 만난다. 유일한 여자 주재원이었던 언니는 나와 소울 메이트를 이루어 파리 곳곳에서 아름답고 반짝이는 시간을 보낸다. 그러다 나는 프랑스 남자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고민 끝에 결혼을 감행하여 프랑스에 남게 된다. 언니는 한국으로 돌아갈 때가 되고, 나의 결혼생활엔 권태와 불안이 스민다. 언니가 떠나기 직전 나와 남편 그리고 언니 이렇게 셋이 함께 떠난 마지막 여행. 언니와 나 사이엔 미묘한 균열이 생기고, 관계는 그렇게 조용히 스러져간다. "억지로 웃으려고 하지만 끝내 물에 녹아내리는 물감처럼 한없이 희미해지던"(178쪽) 언니의 눈빛처럼. 나는 지금 다른 지역으로 이사해 아이를 낳고 평범한 일상을 애써 유지하고 있으나, 언니와 함께했던 어느 날 - 식당에 두고 온 나의 반지를 찾으러 갔다 돌아오는 길에 함께 폭우 속을 달리던 날 - 을 추억할 때면 어김없이 울고 싶어진다.


평범한 서사였으나 나로 하여금 여러 종류의 기억과 생각들을 불러오게 만든 까닭에, 특히 작가노트의 몇몇 문장들이 매우 인상적으로 다가온 탓에, 뭐라도 적지 않을 수 없는 심정이 되었다.


작가는 "한때 사이가 좋았으나 상황과 처지가 서로 달라진 인물들이 긴 시간이 흐른 후 낯선 곳에서 만나 갈등하다가 결국 관계의 종결을 맞이하는 파국적인 이야기를 쓸 생각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적는다.


"나는 애초의 기획대로 쓰는 데는 또다시 실패했다. 원래 의도에 부합하게 극적인 파국을 만들고자 인물들의 관계와 성별을 바꾸기도 하고, 플롯을 다시 짜기도 하면서 소설을 몇 번이나 뒤집어엎었지만 번번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기를 수없이 반복한 끝에 나는 서서히, 내가 애초에 그리고 싶었던 것은 관계의 파탄이나 단절의 순간이 아니라, 어떤 관계가 꽃처럼 피었다가 결국 져버리는 과정 그 자체였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말하자면 관계의 생로병사 같은 것."

(182쪽, 작가노트 '그토록 하찮은 것뿐일지라도, 우리는' 중에서)


그렇다. 내가 이 작품을 읽으면서 다소 착잡하고도 야릇한 감정을 품게 된 것은 이 "관계의 생로병사"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떠오르는 사람들. 작품 속 '나'와 '언니'처럼 놀라우리만치 유사한 관계였던 뉴욕에서의 '나'와 (나를 언니로 불렀던) H, 혹은 베트남에서 만난 체코인 K, 대만에서 만난 원주민의 후손 P 등. 흔히 만나고 헤어지는 과정이 삶의 연속이라 하지만, 무수한(그리고 단선적인) 관계 속에서, 우리의 (조금은 더 특별한) 관계는 한때 꽃처럼 피었다가 지금은 완전히 져버리지 않았는가. (그리고 나의 기억은 조금 더 먼 지점까지 나아간다. 대학 시절 단짝이었다가 잘못된 만남의 계기로 영영 어긋나버리고 만 S, 낯선 인물들 사이에서 오해의 연속으로 비틀어진 고등학교 친구 N과의 관계에 이르기까지. 그 외 무수한 마주침과 망각들.)


우리가 만들어낸(혹은 토해낸) 관계의 생로병사 속 몇몇 인상적인 장면들은 작가도 말했듯 '내 마음 어딘가에 깊은 자국을 남겼음'이 틀림없을 텐데. 그 '지문 같은 흔적'이 설사 우리의 관계 자체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 않더라도, 어쩌면 우리의 관계를 빙자한 '그때 그곳의 나'를 불러내고자 하는 욕망의 흔적일지라도, 이야기들(혹은 장면들)을 '다시 써보려는' 노력은 의미가 있을 텐데.


몇 번이나 뒤집어엎고 바꾸고 다시 짜는 과정에서 작가가 애초에 그리고 싶었던 것을 깨닫는 과정. 내가 끌렸던 것은 이 이야기의 서사 자체가 아니라, 그 뒤에 오래도록 뒤척여온 이야기의 과정, 그 과정의 서사였는지도 모른다.


(2020)

















매거진의 이전글 당신의 웃음은 무슨 색?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