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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럼에도 불구하고 Jun 19. 2020

불안은 영혼을 증식한다

알랭 드 보통 - <불안>

일요일 오후, 가족과 함께하는 유쾌한 점심. 문득 떠오른 생각.

이 모든 불안의 원천은......결국 '상실'에 대한 두려움이다.

가진 것, 누리고 있는 것, 내게 (물리적으로 혹은 정신적으로) 귀속되어 있(다고 믿)는 모든 것에 대하여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공포. 세속적인 삶 속에서 언뜻언뜻 스치듯 마주치는 불안의 근원은 여기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닐까.


예컨대, 놀이공원에서 아이를 잃어버리는 꿈을 꾼 지난밤의 일이나, 천진난만하게 웃는 아이의 모습을 보며 불현듯 알 수 없는 슬픔이 스쳐가는 것을 느낄 때, 울창한 나무 그늘 사이로 자전거를 달리며 순간의 행복을 감지할 때, 감정은 환한 빛과 어두운 그림자를 동시에 포착한다.


도리 없는 정신적인 '허기'가 이미 '결여'된 존재로서의 인간 속성, 즉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무한한 욕망을 드러내는 것이라면, 하릴없는 '불안'은 그나마 세속적인 삶 속에서 내가 쥐고 있(다고 믿)는 대상들이 언제든 사라질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한 두려움 아닐까. 그 불안의 끝은 궁극적으로 '죽음'에 닿아 있을 것이고.

 

행복은 찰나의 순간이며, 불안은 지속적인 조건이다.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은 그것이 '순간의 반짝임'이며 지속되는 불안 위에서 어쩌다 마주치는 찰나의 순간이기에 더 빛난다는 것을 인식하는 계기가 된다. 충만한 순간을 알아채는 것은, 그것이 이내 곧 사라질 것임을 아는 것, 다시 견고한 불안의 기저 속으로 흘러 들어갈 것임을 아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근본적인 '불안'의 조건 위에 서 있는 삶을 긍정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어느 해 여름이던가. 이국의 바닷가. 알랭 드 보통의 <불안>을 순식간에 몰입하여 읽은 것도, 절정의 초록과 뜨거운 햇살 아래 느끼는 충만함을 만끽하는 동시에 서늘하게 드리워지는 그림자 또한 감지했기 때문일 것이다.


# 일상의 철학

한국에 출간된 지 몇 년이 지난 후에야 읽게 된 책. 읽을 당시 혼란스럽게 부유하는 생각들을 다소 가라앉히는 계기가 되어준 책이기도 하지만, 이제와 돌아보니 '일상의 철학'이라는 소소한 즐거움을 일깨워준 책이기도 하다.


저자는 특유의 해학적 문체로 자신의 철학적 지식과 일상의 주제들을 연결해 쉽고 부드러운 요리를 내놓는다. 소화하기 쉬운 읽을거리로, 보다 많은 이들이 무난히 요리를 즐기면서도 각기 생각할 거리를 찾아갈 수 있도록 만들었다고나 할까. 지금 다시 읽어도 그럴까. 한번 읽고 덮어 두었던 책을 오랜만에 펼쳐 든다. 다시 읽으니 왠지 좀 싱겁다는 생각이 든다. 무겁지 않은 맛 때문인가. 아니, 무거워질 수도 있는 재료를 ‘일상의 주제’라는 가벼운 소스로 버무렸기에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맛이 되었을 것이다.


불안의 원인을 ‘사회적 지위'에 관한 문제로 수렴하여 정리하고, 그 해결책을 철학, 예술, 종교, 보헤미아 등의 틀로 짜 넣은 다음 적당히 살을 붙인 간결한 구성이다. 폭넓은 지식의 조각들이 일정 수준의 몸피를 꾸릴 정도만큼씩 뭉쳐(헤쳐 모여) 작가의 위트 있는 글쓰기에 철학적 자양분을 대고 있다.


불안의 근원적 ‘원인’을 사회학적으로 파악하고 이를 위해 역사, 철학, 문학에 대한 지식을 다양하게 펼쳐 보이며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솜씨가 매끄럽다. 원인은 크게 다섯 가지로 분류된다. ‘사랑 결핍, ‘속물근성’, ‘기대’, ‘능력주의’, 그리고 ‘불확실성’이다.


책의 첫 부분에서 이미 저자는 ‘지위’와 ‘지위로 인한 불안’의 정의를 명료하게 밝히고 있다. 책 전체를 관통하는 씁쓸한 문제의식을 유쾌하게 수긍하도록 만드는 그 고유의 문체로.


정의

- 지위status는 사회에서 사람이 차지하는 위치. 신분이라는 뜻의 라틴어 statum(‘서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 stare의 과거분사)에서 파생되었다. 좁은 의미에서 이 말은 한 집단 내의 법적 또는 직업적 신분을 가리킨다. 그러나 더 넓은 의미에서는 세상의 눈으로 본 사람의 가치나 중요성을 가리키며, 이 책에서는 이 의미가 더 중요하다.

- 사회에서 제시한 성공의 이상에 부응하지 못할 위험에 처했으며, 그 결과 존엄을 잃고 존중을 받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걱정. 현재 사회의 사다리에서 너무 낮은 단을 차지하고 있거나 현재보다 낮은 단으로 떨어질 것 같다는 걱정. 이런 걱정은 매우 독성이 강해 생활의 광범위한 영역의 기능이 마비될 수 있다.

- 불안은 무엇보다도 불황, 실업, 승진, 퇴직, 업계 동료와 나누는 대화, 성공을 거둔 걸출한 친구에 관한 신문 기사 등으로 유발된다. 질투(불안도 이 감정과 관련이 있다)를 고백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불안을 드러내는 것 역시 사회적으로 경솔한 행동이며, 따라서 이 내적인 드라마의 증거는 흔치 않다. 보통 어디에 몰두한 듯한 눈길, 부서질 것 같은 미소, 다른 사람의 성공 소식을 들은 뒤 이어지는 유난히 긴 침묵 등으로만 간간이 나타날 뿐이다.   


또한 저자는 지위로 인한 불안이 ‘비통한 마음’을 낳기 쉽지만 이를 잘 다스린다면 ‘쓸모’가 있다,는 나름의 결론을 이미 머리말에서 제시하고 있다.

지위에 대한 갈망은 다른 모든 욕구와 마찬가지로 쓸모가 있다. 이것은 자신의 재능을 공정하게 평가하도록 자극하며, 남들보다 나아지도록 고무하며, 남에게 해를 주는 괴팍한 행동을 못하게 억제하며, 공동의 가치 체계를 중심으로 사회 구성원들을 결합한다. 그러나 모든 욕구가 그렇듯이, 이 갈망도 지나치면 사람을 잡는다. 이런 상황에 대처하는 가장 유익한 방법은 이 상황을 이해하고 그것에 대하여 이야기해보려고 노력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즉 불안은 ‘지위’에 대한 불안이며, 지위의 개념은 단순한 위계적 신분을 넘어 그 이상의 ‘사회적’ 의미들을 포괄한다. 그러니 이 폭넓은 불안의 영역을 찬찬히 살펴보는 지적 산책만으로도 불안의 해소(완전한 해소는 불가능할 테니 ‘다스림’ 정도의 표현이 적절하겠다)에 한층 다가가는 계기가 될 것이다.


원인

불안의 첫 번째 원인으로 꼽은 것은 쉽게 예측할 수 있듯 ‘사랑 결핍’이다. 타인으로부터 사랑받고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 즉 헤겔 식으로 이야기하면 ‘인정 투쟁’, 라캉 식으로 말하면 ‘대타자의 욕망’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자신이 ‘타인’이 바라보는 기준에 맞추어 인정받을 만한 사람이 되지 못할까봐 두려워하는 마음을 불안의 단초로 본 것이다. 타당하다.


두 번째는 ‘속물근성’이다. 저자는 ‘단순히 차별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지위와 인간의 가치를 똑같이 본다’는 것을 속물의 특징으로 규정한다. 부모의 무조건적 사랑을 원형으로 기억하고 욕망하는 인간은 나이가 들면서 ‘성취’ 없는 애정은 획득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가시적인 사회적 성취에 의해 부여되는 지위를 통해 속물들은 관심과 애정을 줄 만한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를 판단하는 것이다. 그러한 속물들의 관심과 애정이라도 받아야 하는 절박한 심정, 그것이 (불행히도) 불안이리라. 그러한 불안에 유난히 고착되어 있는 사람 역시 ‘속물근성’에 동화된 것일 테고.


문제를 더 심각하게 만드는 것으로 ‘신문’과 ‘사치품’이 등장하는 것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여기서 그가 보여주는 예리한 지적과 냉소는 통쾌하기까지 하다.

신문 때문에 문제는 더 복잡해진다. 속물은 독립적 판단을 할 능력이 없는 데다가 영향력 있는 사람들의 의견을 갈망한다. 따라서 언론의 분위기가 그들의 사고를 결정해버리는데, 그 수준은 위험할 정도다.


현재 우리가 당면한 사회 문제들을 다루는 언론의 행태를 보면 쉽게 수긍이 가는 부분이다. 다음은 사치품에 대한 언급.  

지위의 상징들을 다급하게 갈망하면서 괴로워하는 사람들, (…) 빅토리아 여왕 시대에는 천박한 가구가 날개 돋친 듯이 팔려나갔다. 그러나 이런 물건을 산 사람을 조롱하기 전에, 먼저 이런 종류의 가구를 만들고 소비한 큰 맥락을 살피는 것이 공정한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장식장을 구매하는 것이 필요한 일이라고 느끼도록 상황을 조성한 것이 그 사회이기 때문이다.

사실 사치품의 역사는 탐욕의 역사라기보다는 감정적 상처의 기록으로 읽는 것이 더 정확할 것 같다. 이 역사는 남들의 경멸에 압박감을 느껴 자신에게도 사랑을 요구할 권리가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텅 빈 선반에 엄청난 것들을 전시하려 했던 사람들이 남긴 유산이기 때문이다.

가난이 낮은 지위에 대한 전래의 물질적 형벌이라면, 무시와 외면은 속물적인 세상이 중요한 상징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에게 내리는 감정적 형벌이다.


나머지 세 가지 원인은 물질적 풍요가 가져다준 자본주의능력주의 그리고 불확실성에 대한 이야기이다. 보다 ‘사회적인 컨텍스트’에서 불안의 맥을 짚고 있다. 그동안 알랭 드 보통이 ‘개인의 내면’에 초점을 맞추어 말랑말랑한 철학적 에세이로 풀어냈던 것과는 사뭇 다른 접근이다.


서양의 물질적 발전으로 인해 (실제적 궁핍은 줄어들었지만 역설적이게도) 사람들이 지위로 인해 갖는 불안의 수준은 더 높아졌다. 상대적인 심리적 박탈감 때문이다. 가장 강력한 준거집단은 친구, 즉 우리와 비슷한 환경과 조건에 놓인 사람들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같다고 느끼는 사람들만 질투한다. 우리의 준거집단에 속한 사람들만 선망한다는 것이다. 가장 견디기 힘든 성공은 가까운 친구들의 성공이다”라고 지적한 그의 말은 타당하게 들린다.

질투심을 일으키는 것은 우리와 다른 사람들 사이의 커다란 불균형이 아니라 오히려 근접 상태다. (…) 불균형이 심하면 관계가 형성되지 않으며, 그 결과 우리에게서 먼 것과 우리 자신을 비교하지 않게 되거나 그런 비교의 결과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게 된다.

(데이비드 흄, <인성론>)


근대적인 평등사회가 가져온 ‘불안’에 대해 알렉시스 드 토크빌의 생각을 비중 있게 조명한 것도 눈길을 끈다.

불평등이 사회의 일반 법칙일 때는 아무리 불평등한 측면이라도 사람들 눈길을 끌지 못한다. 그러나 모든 것이 대체로 평등해지면 약간의 차이라도 눈에 띄고 만다. (…) 그래서 풍요롭게 살아가는 민주사회의 구성원이 종종 묘한 우울증에 시달리고, 평온하고 느긋한 환경에서도 삶에 대한 혐오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토크빌, <미국의 민주주의>, ‘왜 미국인은 번영 속에서도 그렇게 불안을 느끼는가’)


또한 개인의 무한한 능력을 신봉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자본주의에 기반한 ‘능력주의meritocracy’ 사회는 그 정당성을 획득한다. ‘지위’에 도덕적 의미가 부여되기 시작한 것이다.

자신의 지능과 능력만을 기초로 위엄 있고 보수 많은 일자리를 얻을 수 있는 능력주의 사회에서는 이제 부가 품성의 온당한 지표로 여겨질 수도 있다. 부자는 단지 더 부유할 뿐만 아니라, 더 낫다고도 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능력주의’ 111p)


어쩌면 민주적이고 자본주의적인 사회(인간의 자유와 개별적 능력을 무한히 존중하는 것처럼 보이는)는 ‘무한한 가능성’이라는 미명하에 인간을 더욱 ‘불안의 상태’에 단단히 묶이도록 만들고 있는지도 모른다. 책 제목 역시 Status Anxiety 아니던가.


불안이 영혼을 잠식하기만 할까.  철학, 예술, 종교 등의 영역을 통과하며 영혼을 증진시킬 수도 있다는 생각.

 

해법 1 - 철학

해법은 앞에서 밝혔듯 ‘철학’으로 문을 연다. “철학은 외부의 의견과 관계를 맺는 방식에 새로운 요소를 도입”하기 때문이다(‘철학’ 156p). 여기서 쇼펜하우어 식의 ‘지적인 염세주의’가 도움이 될 수도 있다.

사람들의 인정을 바라며 자학하는 습관을 버리고 그들의 의견이 과연 귀를 기울일 만한지 자문해 보아야 한다. 그러다 보면 우리가 사랑을 구하는 사람들의 정신에 존경할 만한 구석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때도 있다. (…) 우리를 경멸하는 것처럼 우리도 그들을 특별한 악의 없이 경멸하게 될 수도 있다. 이것이 염세적 태도의 출발점이다.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 많은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그들을 필요 이상으로 존중하는 것임을 알게 된다.” 철학적 염세주의의 중요한 모범을 보여준 아르투르 쇼펜하우어의 말이다. (165p)


“여론은 모든 의견 가운데 최악의 의견이다”라고 말한 샹포르의 의견을 따르는 것도 필요하다.

여론에 결함이 있는 것은 공중이 이성으로 자신의 생각을 엄격하게 검토하지 않고, 직관, 감정, 관습에 의존해버리기 때문이다. (…) 여론의 빈곤을 인정하는 것은 지위로 인한 우리의 불안, 다른 사람들에게 훌륭하게 보이고 싶은 피곤한 욕망, 사랑의 표시를 보고 싶어 안달하는 갈망을 다독이는 데 도움이 된다. (163p)


결국 ‘타인’(하이데거 식으로 말하면 ‘세인世人’)의 시선과 기준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의 필요성을 상기시키는 대목이다. 물론 그 대가는 ‘고독’이다. 그러나 기꺼이 받아들일 만한 고독이라고 쇼펜하우어는 말한다.

“이 세상에서는 외로움이냐 천박함이냐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그는 곧이어 모든 젊은이들이 “외로움을 견디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충고한다. (167p)


어쩌면 이것은 ‘이방인’ 즉 ‘아웃사이더’라는 꼬리표를 스스로 붙이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아웃사이더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 바로 이것이 불안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용기와 같은 것이 아닐까. 작가 스스로 이러한 정신을 실천한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세 명의 인물로 예수, 소크라테스, 부처를 꼽았듯이.   


해법 2 - 예술

불안에 대한 두 번째 처방은 ‘예술’이다. “우리에게 우리의 조건을 설명해주는 매체 역할로서의 예술작품은 세상을 더 진실하게, 더 현명하게, 더 똑똑하게 이해하는 방법을 안내해준다”고 말하며 그런 점에서 예술은 “삶의 비평”이라는 매슈 아널드(영국의 시인이자 비평가)의 표현에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특히 ‘비극’의 조명은 흥미롭다.

우리가 비극 작품을 통해 다른 사람들의 실패에 평소보다 훨씬 더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면, 그것은 그 작품을 통해 실패의 유래를 이해하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더 많이 아는 것은 곧 더 많이 이해하고 용서하는 것이다. 비극 작품은 아주 작은 단계들, 종종 아무 뜻도 없어 보이는 단계들을 통해 교묘하게 주인공의 성공을 몰락과 연결시켜 나간다. 우리는 의도와 결과 사이의 비틀린 관계를 만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신문에서 단순히 실패의 이야기의 뼈대만 읽었을 경우라면 가지게 되었을 무관심한 태도, 또는 적의에 찬 태도를 버리게 된다. (‘예술’, 211p)


신문을 뒤덮고 있는 선정적이고 비극적인 뉴스를 통해 우리는 모르는 타인의 이야기에 ‘스캔들’이나 ‘가십’이라는 간편한 꼬리표를 붙이고 천박한 경시와 싸늘한 냉소를 보태는 데에 일조한다. 만약 우리가 그 이면, 그러한 사태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동기와 사회적 조건을 들여다볼 수 있다면 타인을 ‘단죄’하는 심판자의 역할에서 ‘인간적인 연민’을 느끼는 단계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타인의 비극,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고 연민을 갖는 일은 나 자신의 삶을 보다 겸허히 받아들이는 데 도움을 줄 테니 말이다.  


해법 3 - 죽음(종교)

또 다른 강력한 해법은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다. 스티브 잡스의 연설로 이미 ‘죽음’이 어떻게 우리 삶의 의미를 일깨우는지 보다 대중적으로 알려진 부분이기도 하다.

죽음에 대한 생각의 가장 큰 효과는 (…) 우리가 당장 일어나고 있는 일로부터 가장 중요한 일로 시선을 돌리게 해준다는 것이다. 동시에 다른 사람들의 판단에 덜 의존하게 해준다는 것이다. (…) 우리 자신의 소멸을 생각하다 보면 우리가 마음속으로 귀중하게 여기는 생활방식을 향해 눈길을 돌리게 된다. (‘기독교’ 299p)


세속적 성공의 기준보다는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를 상기시켜 주는 것으로서 ‘죽음’ 이상의 것은 없다. 진부할 수 있지만, 결국 그 공동의 가치는 ‘사랑’일 것이다. 저자와 마찬가지로 나는 특정 종교를 믿지 않는 비종교인이다. 그러나 누구보다 ‘종교’에 대한 관심이 크다. 대표적 유일신 종교인 기독교도 포함해서. 타 종교에 배타적일 수밖에 없는 속성 때문에 갖게 되는 부정적 이미지들은 차치하고서라도 ‘타인에 대한 존중과 이해’ 그리고 ‘선(善)에 대한 공동체적 실천 태도’는 긍정적이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아래 평등하고 사랑받을 가치가 있다고 믿는 점에서는 ‘사랑’이라는 이상적 가치를 실현하는 데 바람직한 지표로 작용한다고 본다. 어쩌면 영혼을 잠식하는 불안에 대해 가장 강력한 처방을 내릴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종교적 힘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종교의 역할과 영향력이 갈수록 축소되어 가는 현대 사회에서 종교를 대신하여 우리에게 보다 초월적이고도 정신적인 평온함을 줄 수 있는 대상은 ‘자연’일 것이다. 광활한 바다를 바라보거나 달과 별이 뜬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무한한 우주를 상상하는 것. 인간이 얼마나 미미한 존재인지 깨닫는 데에는 수 초도 걸리지 않는다. 모든 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자각, 그 짧은 깨달음은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는 단점에도 불구하고) 잠시나마 우리에게 평온한 마음을 가져다준다. 의도적으로 자연을 가까이 느끼려는 노력은 (불안을 완화시킨다는 점에서도) 충분히 가치가 있다.


해법 4 - 보헤미아

저자가 마지막으로 꼽은 해법의 키워드는 ‘보헤미아’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이입이 잘 되었던 매력적인 키워드. 부르주아지와 보헤미아를 구별하며, ‘세속적 성취’의 대척점에 ‘감수성에 대한 가치’를 놓아두고 있기 때문이다.

부르주아지는 상업적 성공과 공적인 평판에 기초하여 지위를 부여한 반면, 보헤미안들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 우아한 집이나 옷을 살 수 있는 능력보다 당연히 더 중요했던 것은 세상을 예민하게 받아들일 수 있느냐, 감정의 주요한 저장소인 예술에 관람자나 창조자로서 헌신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보헤미안의 가치 체계에서 순교자적 인물은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음악을 만들기 위해, 또는 여행이나 친구와 가족에게 헌신하기 위해 안정된 정규 직장과 사회의 존경을 희생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이런 헌신 때문에 외적인 품위의 표시는 부족할지 몰라도, 보헤미안들의 세계에서는 최고의 명예를 누릴 자격이 있었다. 그들의 윤리적 양식과 감수성과 표현 능력 때문이었다. (‘보헤미아’ 355p)


이 책을 통틀어 가장 마음에 드는 부분이다. <월든>을 쓴 헨리 소로처럼 호숫가 숲 속 오두막에 홀로 처박혀 세상과 단절된 삶을 사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심플하고 소박한 생활이 주는 심리적 안정감과 정신적 충만함을 지향하는 방식으로서의 과정이 중요한 것이다. “영혼에 필요한 것을 사는 데 돈은 필요하지 않다”고 소로는 말했다. (여기에 굳이 이의를 제기하자면, 영혼의 양식을 상징하는 책을 사는 것에서부터 우리는 돈이 필요하며, 심플하면서도 내적 품위를 잃지 않는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경제적 여유가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많은 돈이 필요하지는 않더라도 돈이 삶에 미치는 편의성을 부정할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기에.)


주류 문화와 갈등하면서도 자신 있게 살아가려면 우리의 직접적인 환경에서 작동하는 가치 체계, 우리가 사교적으로 어울리는 사람들, 우리가 읽고 듣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보헤미안들의 통찰이다. (…) 그래서 보헤미안들은 함께 시간을 보낼 사람을 고르는 데 특히 주의를 기울였다. (…) 오해를 받고 거부를 당하며 살지만 그럼에도 인사이더보다 우월한 아웃사이더라는 신화는 보헤미아의 가장 위대한 인물들 다수의 삶을 반영하거나 그 삶을 규정한다. (367p)


이러한 맥락에서 저자는 마지막 페이지를 ‘의지’와 ‘자유로운 선택’의 문제로 남겨 놓는다.

지위에 대한 불안의 성숙한 해결책은 우리가 다양한 사람들로부터 지위를 인정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데서 시작한다. (…) 누구로부터 인정받기를 원하느냐 하는 것은 우리의 의지에 따른 자유로운 선택이다. (…) 우리는 삶에서 성공을 거두는 데는 하나 이상의 길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며 위로와 확신을 얻을 수 있다.


이렇게 되면 결론은 다소 진부해질 수밖에 없다. ‘주체로서의 독립적인 사고와 정신’을 갖는 것. 철학이 지향하는 바와 같다. 이제는 당연하게 여겨지는 이 익숙하고도 간결한 결론을 위해 400쪽에 가까운 지면이 할애되었다. 지향하여 나아가는 과정에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이해하고자 한다.  


# 동기(動機)로서의 불안 - 불안은 영혼을 증식한다

주어진 현실 속에서 ‘주체’로 서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러나 주어진 모든 것을 습관적으로 받아들이는 대신, 멈추어 생각하고, 의심하고 비판하는 태도에 망설임이 없을 때 우리는 보다 ‘독립적’인 인간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를 추동하는 힘은 무엇이 될 수 있을까. 어쩌면 ‘불안’이 아닐까. 잘만 다스릴 수 있다면.

 

그렇다면 마무리. 일상의 곳곳에서 마주치는 ‘불안’의 감정을 우리는 회피하지 않고 가만히 응시해야 할 것이다. 삶이 뜨겁든 시리든 언제든 나타날 수 있는 ‘불안’의 시선에 조용히 눈 맞추는 것, 대화하고 다독여 새로운 에너지로 삼는 것, 더 나아가 독자적인 생각으로 형태를 부여하는 것, 이러한 과정이 중요할 뿐이다. 이쯤 되면 ‘불안’은 꽤 괜찮은 인생의 동지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


독일 영화감독 파스빈더는 자신의 영화 제목에서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도 말하고 싶은 것이다. “불안은 영혼을 증식할 수도 있다”고.


(2015. 6. 16)


*알랭 드 보통의 <불안>은 여름을 앞두고 '일상의 철학’에 ‘접속’하는 데 적합하다. 두고두고 곱씹을 깊은 맛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맛깔나게 식욕을 북돋워주는 애피타이저로서의 역할을 하는 데에는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메인 요리를 무엇으로 골라 철학의 향연 속으로 들어갈지는 각자의 몫이다.


- 2015년 반디앤루니스 펜벗 2기 두 번째 주제 ‘여름을 위해’에 부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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