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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럼에도 불구하고 Nov 03. 2020

아주 작은 것들이 말할 때

이근화 산문집 <아주 작은 인간들이 말할 때>

선택과 배치. 요즘 이 두 단어를 자주 상기한다. 무언가를 읽을 때, 글을 쓴 이가 어떻게 언어를 선택하고 배치했는지 좀더 살피게 된다. 서점에서 이근화의 산문집 <아주 작은 인간들이 말할 때>를 펼쳐들 때도, 목차를 통해 '무엇'과 '어떻게'를 동시에 들여다본다. 어떤 책은 서문과 목차만 보고 구입을 결정하기도 한다. 느낌과 생각의 결이 비슷하거나, 현재 내가 관심하는 키워드와 맞닿아 있거나, 확연히 다른 분야라서 오히려 새로운 언어와 사유의 경험을 제공하거나. 이질적이거나 유사하거나. 가깝거나 멀거나. 혹은 그 사이 어디쯤에서 묘한 매력으로 끌어당기거나.

 


결국 책을 사들고 돌아온다. 비슷한 결의 아티스트 혹은 작가를 연결(평소 내가 짝짓기라 부르는)하는 것이라든가, 다양한 인물들을 짧게 호명하고 인용하는 방식이라든가, 사이사이에 자신의 일상(아이들 이야기)을 풀어놓는 것이라든가, 시인이 쓴 산문답게 기-승-전-시로 흐르는 경향이라든가, 하는 것들 때문에. 예컨대 이런 식이다.


- '옷'이라는 모티프 아래 가쿠타 미츠요의 에세이와 진 리스의 단편이 한데 묶여 작가의 일상과 어우러진다. “옷은 나를 짓는 환상 같은 것"이라는 말이 남는다.

- 걸리버의 호주머니(<걸리버 여행기>)에서 패티 스미스의 여행가방(<몰입>)이 불려나오고, 한나 아렌트의 가방을 상상하며 사유가 진행되는가 싶더니, 자신의 시로 마무리된다.

- 크리스토퍼 울의 <무제>라는 그래픽 아트를 끌어와 '비유'에 관한 고찰을 하는 듯하다가 글쓰기에 대한 자의식으로 초점을 옮긴다. "비유란 자리바꿈의 기술"이고 "빈 괄호를 제공하는 문학과 예술을 사랑"할 수 있어 삶을 겸허히 받아들일 수 있다고 말한다.

- 실비아 플라스, 앤 섹스턴, 정다운 같은 여성 시인들을 한데 호명하며 "시가 삶을 재구성하는 옳은 방식"이지 않겠냐며 나직이 속삭인다. "아무도 잘못한 게 없으나 / 누구나 외로울 것이다"라는 정다운 시의 마지막 구절이 남는다.

- 모드 루이스의 삶과 그림 그리기를 짚어보며 "대단치 않은 삶을 구제하는 대단함"을 이야기하고, 마르타 아르헤리치와 (아버지가 각기 다른) 세 딸들의 이야기를 조명하며 여성 예술가의 삶의 방식을 보여준다.

- 낸 골딘, 비비언 마이어, 신디 셔먼의 셀프 포트레이트에 초점을 맞추고, 시인 김언희와 퍼포먼스 아티스트 한나 윌키를 짝지어 욕망과 자유의 목소리를 듣는다.


이 책의 인상을 한마디로 표현하라면 나는 '스푸마토'라고 말할 것이다.


스푸마토: 안개와 같이 색을 미묘하게 변화시켜 색깔 사이의 윤곽을 명확히 구분지을 수 없도록 자연스럽게 옮아가도록 하는 명암법. '연기처럼 사라지다'라는 뜻의 'sfumare'에서 유래했다. 회화·소묘에서 매우 섬세하고 부드러운 색의 변화를 표현할 때 쓰는 음영법이다. 물체의 윤곽선을 마치 안개에 싸인 것처럼 사라지게 하는 기법이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아주 작은 인간들이 말할 때. 산문집 제목이 암시하듯 작은 것들이 서로 연결되어 무언가를 말한다. 하나의 관점(컬러 톤)이 드러나는 듯하다가, 어느 순간 살펴보면, 조각보처럼 이어지는 조금씩 다른 이야기(다른 색깔의 천)의 윤곽선이 희미하게 사라져버리는 것을 알게 된다. 또렷하거나 강렬하게 주장하지 않고 부드럽게 와 닿는 방식으로. 어떻게든 전달될 무엇을 어떻게든 전달하는 방식이 시를 닮았달까.


새삼 깨닫는다. 시인은 시를 말할 때 가장 빛난다. 시를 쓰거나 시를 읽어내거나 시에 관해 말할 때. 시인 이근화가 말하는 시에 관한 글들이 좀더 인상에 남는 것을 보면 말이다. 특히 '도나 해러웨이와 김혜순'이라는 부제가 달린 글에 좀더 머무른다. 철학자 도나 해러웨이의 '사이보그' 개념과 김혜순의 시 '피어라 돼지'를 엮어 풀어놓은 글의 중심에는 얼핏 '여성'과 (광의의 개념으로서) '페미니즘'이라는 모티프가 보이는 듯했으나, 텍스트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 시의 위의와 가치로 귀착된다. 어떠어떠한 '시를 읽고 쓰고 싶다'라는 마지막 문장이 말해주는 것처럼. 이 글의 마지막 문단을 통째로 옮겨본다.


근래의 나는 논리적인 사유의 언어가 뻑뻑하게 느껴지고, 인식과 상상의 도구로서의 언어에도 다소 질린 기분이 든다. 말놀이와 언어유희도 공허하게 느껴진다. 혁명과 저항의 도구로서 언어가 가졌던 생경함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동시대 인간의 삶과 호흡하는 실질적인 언어에 대한 갈망이나 바람이 점점 더 강해진다. 그래서일까. 다른 목소리를 참조하며 이질적인 것과 접합으로서의 사랑을 꿈꾼다. 시 속에 갇히지 않고, 시 아닌 것에 적대감을 드러내지 않고, 시 바깥의 것에 눈을 돌려본다. 그러니까 시가 갖는 '경계 탐색의 언어'로서의 가능성을 시와 시 아닌 것과의 습합에 두고 생각해본다. 시가 시를 낳는 자기 복제로 장르를 추동하지 않고, 다른 세계를 꿈꾸는 미지의 언어가 되기를 바란다. 시적인 것을 지향하는 스타일의 복사는 너무 지루하다. 시적인 것의 범주와 테두리는 허상에 불과하다. 시의 형식과 내용은 정해져 있지 않으며, 언제라도 움직이는 장르이다. 아슬아슬하게 간신히 시적인 것에 나는 더 끌린다. 그런 언어들은 위계와 권력에 무관심하다. 코가 발달한 언어가 아니라 귀가 발달한 말이라 해야 할까. 중심을 향한 지향과 상하복종의 위계를 거부하는 일은 타자의 목소리를 들을 줄 아는 능력일 것이다. 교감과 배려, 연민과 사랑은 우리가 언어를 다루는 궁극의 이유일 테니까 말이다. 실체와 허상 사이에 인간의 삶은 늘 애매하게 걸려 있는 것 같다. 그것을 부인하지 않는 시를 읽고 쓰고 싶다.


- 이근화, <아주 작은 인간들이 말할 때>(마음산책, 2020), '너무 늦기 전에 우리가 해야 할 것들' 중에서, 194-195쪽


따라해본다. 다른 목소리를 참조하며 이질적인 것과 접합하는 언어를 꿈꾼다. 아슬아슬하게 간신히 시적인 것, 위계와 권력에 무관심한 언어, 코보다 귀가 발달한 말에 더 끌린다. 실체와 허상 사이에서 애매한 포즈를 취하면서도 이를 부인하지 않는 글을 읽고 쓰고 싶다. 아주 작은 것들이 말하는 것을 놓치지 않으면서.


(2020-11-3)


쓰는 일을 통해 이 세계의 나를 조금 '다르게' 가져갈 수 있다는 믿음을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있다. (1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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