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그럼에도 불구하고 Nov 24. 2021

백지에게

김언 시집 <백지에게>에 부쳐

# 말

영화평론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면 그건 홍상수 감독 때문이고, 시인론을 써보고 싶다 생각했다면 그건 김언 시인 때문일 것이다. '말'을 사유하는 시인의 이름엔 '말씀 언(言)'자가 들어 있다.


말을 생각하고 말로 뒤척이고 말을 사유하고 말로 괴로워하며 말로 시를 쓰는 그런 시인의 시를 나는 좋아하는 것 같다. '말'의 자리에 '시'를 놓아볼까. 시를 생각하고 시로 뒤척이고 시를 사유하고 시로 괴로워하며 시로 시를 쓰는 그런 시인의 시를 나는 좋아하는 것 같다. 말을 생각하는 말. 시를 생각하는 시. (나는 지금 제정신이 아니다.)


우리는 말하면서 괴롭다. 말한 뒤에도 괴롭고 말하지 못해서도 괴롭다. 말하기 전부터 괴롭다. 말하려고 괴롭고 괴로우려고 다시 말한다. 우리는 말 때문에 괴롭다. 괴롭기 때문에 말한다. 괴롭기 때문에 우리가 말하고 우리에게 말한다. 누구에게 더 말할까? 괴로운 자여, 그대는 그대 때문에 괴롭다. (중략) 나는 나 때문에 괴롭고 괴롭다 못해 다시 말한다. 나는 나 때문에 말한다. 나는 나 때문에 말하는 나를 말한다. 나는 나 때문에 내가 아니다.


- 김언, '괴로운 자' 부분, <백지에게>, 민음사, 2021


# 백지

 '텅 빈 말'에 대한 생각 때문에 괴로워하던 차에 김언 시인의 최근 시집 <백지에게>를 읽는다. '괴로운 자'라는 시를 읽고 피식 웃음이 나왔다. '괴로움'에 관한 김언 스타일의 문장. 어떻게, 이렇게, 제 시간에 내게 도착했을까. 최근 호흡이 긴 글을 하나 붙들고 괴로워했기에. 괴롭다,라고 쓰면 괴로운 것 같고. 괴로웠다,라고 쓰면 괴로웠던 것 같다. 수정한다. 괴롭지만 싫지 않다. 이게 좀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괴롭지만 싫지 않은 대상, 백지.


백지가 되려고 너를 만났다. 백지가 되어서 너를 만나고 백지처럼 잊었다. 너를 잊으려고 백지답게 살았다. 백지가 저기 있다. 백지는 여기도 있다. 백지는 어디에나 있는 백지. 그런 백지가 되자고 살고 있는 백지는 백지답게 할 말이 없다. 대체로 없고 한 번씩 있다. 백지가 있다. 백지에게 나오는 말들. 백지에서 나와 백지로 돌아가기를 거부하는 말들. 도무지 백지가 될 수 없는 말들이 한마디로 그치지 않을 때 두 마디로도 그치지 않고 모자랄 때 모자란 만큼 잠식하는 백지의 운동은 백지를 갉아먹는다. 백지를 지워간다. 백지를 삭제하는 방식으로 말하는 백지의 운동은 점점 더 백지를 떠난다. 백지가 되지 않으려고 너를 만난 것 같다. 백지가 되지 않아서 너를 만난 것 같기도 하다. 백지는 충분한데 백지는 불충분한 사람을 부른다. 백지는 깨끗한데 백지처럼 깨끗하지 못한 사람을 다시 부른다. 백지는 청소한다. 백지에 낀 백지의 생각을. 백지는 도발한다. 백지처럼 잠든 백지의 짐승을. 으르렁대는 소리도 으르렁대다가 눈빛만 내보내는 소리도 백지는 다 담아준다. 백지가 아니면 담기지 않는 소리를 백지가 담으니까 이렇게도 어수선하고 시끄럽고 그걸 다 모아서 백지는 입을 다문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처럼 백지 한 장이 있다. 너무 소란스러운 가운데 백지 한 장을 찾는다. 백지가 어디로 갔을까? 비어 있다고 백지가 아니다. 백지로 차 있다고 해서 백지가 아니다. 백지는 백지답게 불쑥 튀어나온다. 백지였다는 생각을 잠시 잊게 만드는 백지 앞에서 백지를 쓴다. 백지라는 글자를 쓰고 또 잊는다.


- 김언, '백지에게' 전문


# 파편

백지 앞에서 백기를 들고 싶다. 백지를 앞에 두고 딴짓을 한다. 시험 기간엔 평소 미루어왔던 벽돌책마저 마구 읽고 싶어지는 법. 백지가 아닌 빼곡히 들어찬 페이지를 읽고 싶다. 읽기가 주는 순수한 기쁨. 하나의 관점으로 길게 꿰어 쓰는 글이 아닌 파편적 글쓰기가 그리웠다. 파편적 글을 쓰는 지금도 나는 파편적 글이 그립고. 나는 파편적으로만 존재한다. 분절된 파편들이 유기적으로 이어지면 동일한 관점으로 꿰어지는 '나'가 되는가? (나는 지금 제정신이 아니다.)


백지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안다. 쓰고 지우고 다시 쓰고 다시 지우고. 팰림프세스트(Palimpsest). 쓴 글을 지우고 그 위에 다시 쓴 문서. 양피지 위에 쓰고 지우기를 반복한 고대 문서는 지금 여기 백지로 불려와 있다. 쓰고 지우면서 말할 것이 너무 많다고 생각한다. 지우고 쓰면서 말할 것이 얼마 없다고 느낀다.


말할 것이 얼마 남아 있지 않다. 말할 수 있는 것이 얼마 남아 있지 않다. 그럼에도 말해야 하는 것이 얼마 남아 있지 않다. 말하고 싶은 것도 말하고 싶지 않은 것만큼이나 얼마 남아 있지 않다. (중략) 얼마 남지 않은 그 말은 너를 위해서 써라. 너에게도 모자란 그 시간을 충분히 소진한 다음에도 남아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게 무얼까? 적어도 나는 아니다. 그렇게 오래 견딜 수 있는 사랑이 못 된다. 나는


- 김언, '얼마 남아 있지 않다' 부분


얼마 남지 않은 말을 나를 위해 쓰는 시간도 얼마 남아 있지 않다. 그러니 쓰자. 파편적 잡문이라도.


(2021-11-24)

매거진의 이전글 아주 작은 것들이 말할 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