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 궁리 알 궁리
해마다 10월의 마지막 날이면 (진부하긴 하지만) 배리 매닐로우(Barry Manilow)의 When October Goes나 U2의 October를 들으며 다소 멜랑콜리한 기분으로 보내곤 했는데, 3년 전부터 10월의 마지막 날 풍경은 사뭇 달라지게 되었다. 할로윈(Halloween) 때문이다. 멜랑콜리는커녕 (원치 않게도) 온갖 귀신 복장으로 치장한 사람들로 북적대는 축제 분위기 속에서 보내게 된 것이다.
사실 나는 할로윈(Halloween)보다 독일 밴드 헬로윈(Helloween)을 더 먼저 알았기 때문에, 꽤 오랫동안 이 둘의 철자가 같다고 착각해왔다. 밴드 헬로윈의 로고 한가운데 들어가는 펌프킨 모양의 잭-오-랜턴도 한몫 했을 것이다. 그만큼 할로윈이라는 것은 나와는 상관 없는 먼 서양의 어느 축제일 정도로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니 헬로윈이라는 밴드명은 할로윈을 패러디한 것이 아닌가. 짓궂게도 Hallow(성인聖人)를 Hell(지옥)로 슬쩍 바꾸어 놓았으니 말이다. 그러고 보면 또 말이 되는 게, 할로윈이 결국 죽은 자들의 영혼을 달래는 날이기도 하니, 지옥의 문이 열리든 천국의 문이 열리든 저승의 길이 열린다는 측면에서는 Helloween이라는 말도 얼추 들어맞는다.
서양인들이 다수 살고 있는 단지의 특성 때문에, 해마다 10월 31일이 다가오면 약 열흘 전부터 Trick or Treat(귀신 복장을 한 아이들에게 사탕이나 초콜릿을 나누어주는 이벤트)에 참여할 것인지 여부를 묻는 레터가 뜬다. 참여할 집들은 며칠 전부터 각자의 집 대문에 오렌지 빛깔의 풍선을 달고 집 주인의 개성을 반영하여 다양한 할로윈 아이템(주로 거미, 해골, 마귀의 탈 등)으로 장식을 해놓는다. 할로윈 당일 저녁이면 대문을 활짝 열어놓고 우르르 몰려다니는 아이들에게 사탕이나 초콜릿을 나누어주는데, 좀더 야심(?) 찬 집들은 자신의 집을 거의 놀이동산에 있는 ‘귀신의 집’ 수준으로 만들어놓기까지 한다. 입구에 귀신 모형을 세워놓는다든지, 프로젝터를 사용하여 악령의 이미지를 쏜다든지, 으스스한 음향을 깔아놓는다든지 하는 식이다. 심지어 어떤 집은 방문한 사람들에게 ‘갑자기 떨어지는 해골’과 같은 깜짝 이벤트를 선사하여 높은 인기를 누리기도 한다. 이렇게 많은 신경을 쓴 집들은 사람들이 대거 몰리기 때문에 아예 입구를 제한하여(샤넬이나 루이비통 매장에서 고객 수를 제한하듯) 사람들의 트래픽을 조절하기까지 하니, 참 어디서도 못 볼 재미나고 진기한 광경들을 최근 몇 년간 구경해온 셈이다. 원래는 단지 내 이벤트였는데, 해를 거듭할수록 입소문을 타고 동네 축제처럼 자리를 잡았다. ‘놀 건수’를 잡은 동네 아이들(어른들 포함)이 모여들어 할로윈 당일 저녁이면 단지 입구에서부터 차들이 막히기 시작하고 단지 내 여러 갈래 길들이 사람들로 넘쳐나 북새통을 이룬다.
처음엔 아이에게 할로윈의 유래와 역사, 풍습에 대한 책도 읽히고, 복장도 준비해주고, 사탕 담을 오렌지색 펌프킨 모양의 주머니도 갖추어주는 등 신경을 썼으나 해가 갈수록 심드렁해졌다. 아이도 심드렁해지기는 마찬가지였는데, 더 이상 복장이나 사탕 바구니에는 연연해하지 않고 오로지 친구들을 초대하여 밤 늦도록 길바닥을 쏘다니며 한바탕 놀 궁리에 들뜬 모습이었다. 들뜨기는 아이나 어른이나 마찬가지. 영화 속 프랑켄슈타인이나 드라큘라처럼 완벽 분장을 하고 나타나는 어른들의 수도 꽤 되었으니 말이다.
‘어떤 날’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노는 날’이라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다. 비단 할로윈뿐일까. 캘린더에 빨갛게 표시된 날은 일단 ‘휴일,’ 즉 ‘노는 날’이다. 독립기념일이든, 성축일(聖祝日)이든, 각 나라나 민족 고유의 명절이든, ‘의미’에 앞서 노는 날이라는 ‘사실’이 더 중요한 셈이다.
나는 할로윈에 대해 별 관심이 없었다. 남의 나라 명절일 뿐. 최근에야 유심히 그 기원이나 역사 또는 풍습의 변천을 살펴보게 되었다. 영국의 풍습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니 스코틀랜드나 아일랜드에 살았던 켈트 족의 종교 드루이드교(druidism)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한 해의 시작을 11월 1일로 본 켈트인들은 한 해의 마지막 날인 10월 31일을 죽은 이들의 영혼이 인간 세상을 방문하는 날로 여겼고, 이들의 혼을 달래거나 악령을 쫓기 위해 음식을 준비하고 기괴한 복장을 입었다. 토착 민간 신앙을 핍박했던 기독교인들이 전략을 바꾸어 이를 기독교 내로 흡수 통합시키려는 축성(祝聖, consecration) 과정에서 이 날은 기독교 범주 내의 축일로 편입된다. 만성절(萬聖節), 즉 그리스도교에서 모든 성인을 기념하는 11월 1일의 축일과 통합되어 <Hallows’ Eve>로 변모한 것이다. 인간과 죽은 영혼들이 만나는 드루이드교의 10월 31일이 Hallow(성인聖人)+mas(예배mass)+eve(전날)로 변모된 셈이다.
느지막이 슬리퍼를 끌고 단지 내 길들을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녀 본다. 온갖 귀신 복장이 넘쳐 흐른다. 이 날 하루 신나게 놀 궁리로 그들은 정성껏 의상과 분장을 준비했으리라. 할로윈의 의미야 어떻든 말이다.
집에 돌아오니 곧바로 아이와 친구들이 밀어 닥친다. 35도까지 올라갔던 낮 기온 때문인지 아이들은 땀으로 뒤범벅이 되어 쿰쿰한 냄새를 온 집안에 풍기며 2라운드에 돌입한다. 신나게 논다. 오늘 하루 제대로 ‘건수’ 잡은 것이다.
3년 동안 할로윈 파티를 지켜보면서 심드렁해졌던 나도 올해엔 건수 하나 잡았다. ‘놀 건수’ 말고 ‘알 건수’ 말이다. 지난 여름 영국 남부의 스톤헨지(Stonehenge)를 방문하고 나서 고대 켈트족의 드루이드교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얇은 안내서를 두 권이나 샀다), 세계 불가사의 중 하나인 스톤헨지에 대한 문화인류학적 접근이 흥미로워 보였다. 그때 산 책을 지금껏 책장 어딘가에 쑤셔박아 놓았으니 이번 기회에 찾아 ‘알’ 것을 살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이참에 세계의 축제,라는 아이의 책도 슬그머니 읽어보면 재미있을 것 같고.
산 자와 죽은 자,라는 주제는 삶과 죽음,이라는 주제만큼이나 흥미롭다. 할로윈이든 헬로윈이든 무언가를 알고 또 그로 인해 더 알고자 하는 마음이 이어진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올해 할로윈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아이는 놀 궁리, 나는 알 궁리.
(2015)
*아, 그러고 보니 헬로윈(Helloween)의 대표 앨범 3집 <Keeper of the Seven Keys, Part 1>에는 할로윈(Halloween)이라는 (10분이 넘는) 곡도 실려 있다. 뭐 그렇게 좋아하던 그룹은 아니지만, 이참에 그들의 추억의 명곡 A Tale That Wasn’t Right도 들어본다. 헬로윈은 몰라도 이 곡은 들으면 다 ‘알’ 만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