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다
딱히 구도가 좋아서라기보다는,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각각의 대상 하나 하나가 고맙게도 서로 인접하여 하나의 프레임 안으로 쏙 들어와 주어서,라고 해야 정확한 설명일 것이다.
토요일 밤(할로윈 파티)의 소란이 휩쓸고 지나간 일요일 오후, 개 한 마리 보이지 않는 뜨거운 한낮의 풍경을 베란다에서 내다보고 있자니 문득 이 프레임을 담고 싶어졌다.
1. 원경: 빠른 속도로 올라가는 아파트 공사 현장. 이곳에 처음 이사 올 때만 하더라도 저렇듯 삐죽이 솟은 건물은 아예 보이지도 않았다. 최근 외국인들에게까지 주택 매매를 허락하는 (공산당) 정부의 법 개정 방침에 따라 외국인 거주 지역 중심으로 빠르게 늘어가는 아파트 물량이 단연 눈에 띈다. 어느 순간, 조용하던 이 동네에 맥도날드나 스타벅스와 같은 글로벌 거대 자본의 상징들이 슬금슬금 비집고 들어오기 시작할 때부터 마뜩잖았던 나로서는 하루가 다르게 올라가는 저 고층 아파트도 그리 반가워 보이지 않는다. 몇 년 뒤에 이 곳을 다시 찾는다면 아마도 지금의 듬성듬성한 스카이라인은 한층 더 빽빽하게 이어질지도 모르겠다. 일부 외국인들이 아닌 이곳 지역 주민들이 그 빽빽한 아파트에 입성할 수 있다면 그나마 반가운 일인 텐데.
2. 중경 1: 초록의 나무는 붉은 빛깔 지붕과 노란 담벼락에 참 잘 어울린다. 하긴, 나무가 어울리지 않는 공간이나 색깔이란 없는지도 모른다.
3. 중경 2: 남의 집을 들여다보는 것 같아 석연치 않지만. 저 빌라에 누가 사는지 제대로 본 적이 없다. 그리고 저 집 수영장에서 사람들이 수영하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아파트에 살다가 큰 맘 먹고 저런 빌라로 옮긴 한 가족이 있었다. 작아도 마당에 수영장 딸린 집을 아이들이 무척 원한다는 것이다. 막상 이사를 하고 난 후 그 가족은 집에서 수영을 즐기기는커녕 매번 수영 용품을 싸 들고 꽤 떨어진 공용 수영장까지 들락거린다고 했다. 아무도 없는 풀 안에 있다 보면 영 수영할 기분이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고로 수영은 사람들이 좀 북적이고 깔깔거리며 즐기는 소리도 좀 나야 제격이라는 이야기였다. 집 안에 수영장이 있는데도 수영하러 가는 길은 더 멀어진 셈이다. 그 가족을 떠올리며 나는 저 집 사람들도 수영장을 모셔놓고 즐기지는 못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가까이 있어도 즐기지 못하면 무용지물이다.
4. 근경 1: 베란다에서 가까이 내다 보이는 나무들은 조금씩 다른 풍모를 지녔다. 별 볼 것도 없이 줄기만 밋밋하게 서 있는 전형적인 야자수를 보고 있자면 참 멋대가리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섬세한 가지 하나 없이 뻘쭘하게 뻗어 있는 모습이 퍽 싱거워 보이지만 또 어떻게 보면 저렇게 간결한 나무도 없지 싶다. 영국의 유명한 자연 다큐멘터리 제작자 데이비드 애튼보로의 책 <식물의 사생활>에는 이런 설명이 있다.
열대 우림에 있는 대부분의 큰 나무들은 덩굴식물들을 짐처럼 지고 있다. 오직 한 가지 나무만이 덩굴식물들의 공격을 면한다. 거의 예외 없이 가지가 없는 야자수가 바로 그것이다. 야자수는 야자의 심장이라고 불리는 꼭대기의 거대한 새순에서 성장이 이루어진다. 이 새순에서 잎이 만들어지면서 줄기는 점점 높이 자란다. 야자수의 커다란 잎은 일정한 기간이 지나면 죽어서 떨어진다. 잎이 떨어질 때 기어올랐던 덩굴식물도 함께 떨어진다. 따라서 야자수 줄기는 거의 언제나 기생식물이 붙지 않는 깨끗한 상태를 유지한다.
– 데이비드 애튼보로, <식물의 사생활>, ‘식물사회에서의 투쟁’, 165p 중에서
나는 이 부분을 읽고 무릎을 쳤다. 기생식물이 붙지 않도록 끊임없이 죽은 잎을 떨어뜨리는 것이, 흡사 사람이 취해야 할 마음가짐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불필요한 감정이 영혼을 갉아먹지 않도록 끊임없이 마음을 비워내는 사람의 모습을 연상시켰다고나 할까. 멀대처럼 대하던 야자수를 이후로는 다정한 눈길로 보게 되었는데(사람 마음은 어찌나 간사한지!) 우직하고 겸허하게 무심(無心)을 실천하는 ‘비움의 나무’로까지 바라보게 된 것이다. 언젠가 늦은 밤 산책을 하다가 야자수에서 떨어진 거대한 죽은 잎을 발견한 적이 있는데, 어쩐 일인지 쉽게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왠지 모를 감정에(아마도 소멸해가는 것에 대한 묵념 정도였을까) 몸을 숙여 한참을 내려다보았던 기억이 난다.
5. 근경 2: 야자수 옆으로는 훨씬 키가 크고 섬세한 나뭇잎들이 달린 무성한 열대 나무가 자리 잡고 있는데, 방의 침대에서 바라보면 바람이 불 때마다 머리채를 흔들며 빼꼼히 창 안을 들여다보는 것만 같다. 내가 창 밖의 나무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나무가 창 안의 나를 바라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이다. 그런 친밀감 때문인지, 마음에 폭풍우가 몰아치거나 실제로 비바람이 몰아치는 날이면 나는 묘하게 이 나무와 동화되는 기분을 느끼곤 한다.
이 무성한 나무 밑으로는 바랜 듯 희미한 초록빛을 띤 다소 신경질적이고 날카로워 보이는 열대 나무가 낮고 묵직하게 자리하고 있다. 웬만한 바람에는 거의 흔들리지도 않고, 갈퀴 같은 손들을 사방에 뻗어 상당히 공격적인 위용을 갖추고 있다. 쉬이 접근을 허락하지 않으려는 듯한 위협적인 태세이다. 비록 살가운 모습은 아니어도 나는 이 나무 나름의 단단하고 흔들림 없이 강인한 모습을 좋아한다.
<식물의 사생활> 서두에 적혀 있는 말도 옮겨 볼 만하다.
오랜 세월 동안 식물의 삶은 은밀한 것으로서 우리에게는 여전히 비밀로 남아 있다. 이유는 단순히 시간의 차이 때문이다. 식물은 우리하고는 다른 시간 단위로 삶을 영위한다. 우리가 맨눈으로 보아서는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지만, 식물은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다. 자라고, 싸우고, 적과 이웃을 피하거나 이용하고 있으며 그리고 먹이를 얻기 위해서, 자신의 세력권을 확장하기 위해서, 번식하기 위해서, 햇빛을 찾고 지키기 위해서 투쟁하고 있다. (…) 식물의 생활에 관한 매력적이고 새로운 시각에 접하는 순간, 흙이나 바위나 물에서 혹은 광활한 들이나 좁은 뜰에서 자라나는 어떠한 식물이든 전혀 다르게 볼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식물이 거칠게, 밤낮으로 쉴 새 없이 움직이면서, 살아남기 위한 끝없는 경쟁적인 삶을 영위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식물들의 조용한 투쟁, 소리 없는 움직임, 생의 의지, 뭐 이런 생각을 하고 있으면 이 고요한 프레임 안에서 그저 평화롭고 조용히 자리 잡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저 푸른 식물들이 먼 원경의 아파트 현장만큼이나 치열하게 생동하고 있음을 상상하게 된다.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다,라는 말도 문득 떠오른다. 보이지 않는 것을 나중에라도 더듬어 찾아보고자 일단 본능적으로 피사체를 프레임 안에 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해본다.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