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박솔뫼 & 강보원
“기본적으로 나는 소설가의 일을 하고, 평론가는 평론가의 일을 한다고 생각해요. 보통은 크게 영향받지는 않는데요. 간혹 흥미롭게 느껴지는 글이 있어요. 꼭 소설의 의미를 잘 드러내 주지 않아도 그냥 자기 글로서 잘 서 있는 글이 재밌더라고요. 작품에 대해 쓰면서도 작가나 작품과 상관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글이 좋은 것 같아요. 그런 요소가 좋은 독서를 할 수 있게 해주기도 하니까요. 이번 소설집에 해설을 쓴 강보원 평론가의 글도 그랬어요.”
박솔뫼가 한 인터넷 서점과의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최근 소설집 <우리의 사람들>에 쓴 강보원의 글이 궁금해진 순간이다. “자기 글로서 잘 서 있는 글”이라는 말에 이끌려 박솔뫼 소설집을 구매했다. ‘당신의 평론을 읽기 위해 해당 작품을 읽었어요’라는 말을 듣는 게 평론가에게 최고의 찬사라고 했던 신형철 평론가의 말처럼, 나는 한 번도 읽어본 적 없는 박솔뫼 소설을 읽기로 결심함으로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평론가에게 (그의 글을 읽기도 전에) 찬사를 던진 셈이다.
우리의 사람들
박솔뫼를 읽는다. 이전 작품을 읽어본 적 없기 때문에 그의 문체에 적응하는 데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처음 제발트의 소설을 접했을 때 그랬던 것처럼 잠깐 당혹스럽다가 묘하게 집중하게 된다. 이상하게도. 문장들을 읽으며 물성을 느끼게 되는 독특한 체험. 생각에 대한 생각, 그 생각에 대한 생각들이 활자라는 형상으로 꿈틀대고, 뱀처럼 미끄러져 빠져나가는 자리의 흔적들을 손으로 만져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적게 된다. 다른 책들에 적어 넣는 것보다 상대적으로 자주 그리고 많이. 또한 다르게. 유의미해서가 아니라 무의미를 무의미한 형식으로 드러냄으로써 독자가 모종의 의미를 더듬어볼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구나. 그의 이상한 문장들 사이를 비집고 벌려 나의 것을 흘려 넣는 것. 텍스트를 읽는 것 자체가 아니라 텍스트를 읽는 행위를 빌어 내 안의 새로운 텍스트를 끄집어내는 것이 그의 소설을 읽는 보람이군, 하고 생각한다. 낯선 문장들에 시간을 투자하여 획득한 것 치고는 나쁘지 않다.
이상하게도.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독백. 어딘지 익숙한 방백. 아직 말해지지 않은 내 안의 목소리가 타자에 의해 끌려 나와 벌거벗은 채 누워 있는 듯한 느낌. 자유연상, 의식의 흐름, 일기체, 시적 화법 등으로 부를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런 생각을 쓰고 싶은 생각은 없고. 텍스트를 읽는 순간 바로 반응하는 나의 텍스트를 적어놓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생각이 든다. 나는 첫 작품 '우리의 사람들'과 마지막 작품 '영화를 보다가 극장을 사버림'을 인상깊게 읽었는데. 표면을 부유하는 가벼운 문장들이 넘쳐 흘러 나를 향해 무겁게 모여드는 느낌이랄까. 아이러니. 이토록 가벼운데 이토록 무겁다니. 가벼움 속의 무거움. 이것이 작가가 의도한 기획이라면 그 기획은 성공한 듯하다. 예컨대 ‘우리의 사람들’을 읽으며 내가 행간과 여백에 흘려넣은 파편적 메모들을 뒤적여보면 이렇다.
- 이 소설집은 말,과 말하는 주체,에 대한 것이구나, 라고 25쪽에 이르러서 생각한다. 생각,과 생각에 대한 생각,에 대한 것이구나, 라고도 생각한다.
- 무엇을 지시하거나 말하지 않고 (그럼에도) 말한 것을 무효화(무화)시킴으로써 말을 하고 있다는 느낌.
- (괄호)에 들어갈 환유의 선택지들을 세로가 아닌 가로로 길게 나열하는 방식. 괄호 안은 누구든/무엇이든 상관없다는 태도.
- 캐코포니(cacophony, 불협화음).
- 실재와 이미지 혹은 실재와 상상력.
- 본 것, 있는 것, 믿는 것.
- 갇혀 있는 곳은 안인가 바깥인가.
- '숲'은 무엇인가. 숲이 의미하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 의미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숲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멈추지 못하고 숲에 대해 생각하는 나를 인식하게끔 만드는 소설.
- '저 너머'와 '막연히'.
- 우리의 사람들은 누구인가. 숲을 헤매는 사람들, 숲에 가자고 한 사람들, 머릿속의 사람들,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 티보가의 사람들, <티보가의 사람들>을 읽고 자신의 현실을 티보가의 사람들과 섞는 사람들, 겨울잠을 자고 싶은 사람들, 드문 사람들.
강보원의 글이 궁금했던 것이므로, 그가 쓴 해설에 대해 이야기해야겠지. 자기 글로서 잘 서 있는 글. 잠깐 다른 이야기를 해볼까. 최근 문학과사회 평론 부문 당선작에 부친 심사의 글에도 이와 비슷한 맥락의 표현이 있었다. "독립적 텍스트로 존재할 수 있는 비평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는 평이 흥미로웠다. 게다가 당선자가 택한 작품론은 이수명의 시에 관한 것. 이수명론이라니. 무척 구미가 당겼다. 다른 시인도 아닌 이수명의 시 세계를, 독립적 텍스트로도 잘 설 수 있도록 지어올린 평론은 어떤 걸까. 몹시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꼭 찾아 읽어야지.) 이야기는 샛길로 빠지고, 나는 결국 쓰려던 것을 못 쓰고. 그래도 박솔뫼 소설에 대한 강보원의 글 중 인상깊었던 부분들은 옮겨놔야겠지.
픽션은 그것(현실)에 대한 무한한 근사적 접근, 그러나 결국 열등한 접근이 될 수밖에 없다. 거기에는 항상 말해지지 않은 무언가가 더 있으며, 유일하게 만족스러운 눈은 지금 보이는 것 이상을 보고자 하는 눈이자 동시에 스스로 무언가를 보지 못했다고 느끼는 눈이다. (박솔뫼, <우리의 사람들>, 강보원의 해설, 230쪽)
모든 최초의 것, 모든 기원은 반복이 일어난 후에야 사후적으로만 정초될 수 있다. 반복은 새로움에 존재론적으로 선행한다. 그러므로 박솔뫼에게 픽션이란 이미 쓰인 것을 다시 쓰는 것, 하나의 이미 무수히 반복된 이야기를 되풀이하는 것, 그래서 그 이야기들 사이에 자신의 이야기를 기입하는 것이다. (같은 책, 236쪽)
셋 이상이 모여 - 영화에 대한 것은 아닌
박솔뫼 소설에 부친 강보원의 글은 '독립적 텍스트로서 잘 서 있는 비평'이었지만 생각만큼 강렬하게 끌리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의 산문 <영화에 대한 것은 아닌>을 더 흥미롭게(그리고 가볍게) 읽었달까. 나는 이 글을 <셋 이상이 모여>라는 독특한 컨셉의 책으로 읽었는데, 이 책은 문학 플랫폼 <던전>(나는 이 신박한 플랫폼의 존재를 이웃 블로거를 통해 알게 되었다)에 글을 연재한 세 명의 작가(강보원, 나일선, 김유림)의 작품(각각 산문, 소설, 시)을 회별로 쪼개 교차 편집 스타일로 묶은 것이다. 던전(www.d5nz5n.com/)을 통해 알게 된 김유림 시인의 매력적인 소시집 <계획시집>을 한번 더 (종이책으로) 만난 것도 반가웠지만(시인의 계획 시리즈는 사랑스럽다), 웹상에서 별로 주목하지 않고 지나쳤던 강보원 평론가의 <영화에 대한 것은 아닌>이라는 산문이 눈길을 끌었다. 영화에 대한 언급이 나오지만 제목처럼 '영화에 대한 것은 아닌' 자유로운 일기체 형식의 (총 18화로 이루어진) 글들이다. 책을 읽고 무언가를 쓰지만 그게 꼭 책에 대한 것은 아닌 글들을 나는 써왔(던 것 같)고, 그래서 <영화에 대한 것은 아닌>이라는 제목에 직감적으로 반응한 것 같다. 폼 잡지 않고 있는 그대로 생각의 흐름을 적어내려간 글에서 난 묘한 흥미와 매력을 느낀다. 공감한다.
"나는 영화를 보고 싶은가? 보고 싶은가? 생각을 했다. 잘 모르겠다. 또 어떤 텍스트들에 대한 독해를 짧은 글로 쓰고 싶은가? 그것도 잘 모르겠다. 둘 다 별로 하고 싶지 않은 것 같다. 그런데 왜 하고 싶지 않은데 하고 싶은 건지 자문하게 되는 걸까? 잘 모르겠다. 아무튼 지금은 별로 하고 싶지가 않다."
어떻게, 이렇게, 나의 느낌을 그대로 활자화할 수 있지,라고 생각하게끔 만드는 문장들도 발견한다. 예컨대 이런 부분.
"나는 차곡차곡 정리하는 것에 대한 어떤 선망 같은 것이 있고, 산만함, 손에서 빠져나가는 느낌, 일단 미뤄두는 것, 그 미뤄둔 것들이 점점 쌓이고 그것을 외면하는 일, 그리고 무언가 내가 알지 못하는 것들이 엄청나게 많고 그것들은 아주 중요해서 나를 크게 망쳐놓고 있거나 이미 망쳤거나 적어도 앞으로 망칠 건데 그것들을 아주 잠깐만 힘을 내서 마주하고 정리하기 시작하면 금방 처리할 수 있겠지만 왜인지 모르게 절대로 그것에 착수하고 있지 않다는 느낌, 나는 언제나 그런 것들에 사로잡혀 있고 그런 것들에서 벗어나고 싶지만 사실은 그로부터 벗어난 깔끔한 상태라는 것 자체가 이루어질 수 없는 환상에 속할 것이다.”
- 강보원 외, <셋 이상이 모여>, 130쪽
기-승-전-시 혹은 기-승-전-글쓰기로 귀착되곤 하는 나의 글에 피로할 대로 피로해진 상태. 강보원이 어느 글에 썼다는 것처럼 "언제나 글쓰기에 대한 것과 관련이 있"는 글쓰기는 도돌이표를 떠올리게 한다. 마지막 18화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렇다. 그것들이 다 무슨 소용인지 알 수 없다. 어쨌든 4년 전의 나는 이렇게 쓰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작업에만 신경을 쓰면 됩니다." 사실 그것이 도대체 무슨 결과를 가져올지에 대해 생각하지만 않는다면 무엇이 되었든 계속할 수 있다. (197쪽)
나는 내가 쓸 혹은 쓰고 싶은 것에만 신경을 쓰면 된다.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면 어떤 종류의 쓰기도 계속할 수 있을 것이다. (가급적 시면 좋겠지만.)
완벽한 축하 개업 시
문학평론가로 이력을 시작한 강보원이 최근 첫 시집을 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 점이 나의 구미를 새롭게 당겼다. 책이 출간되기도 전에 표제작인 '완벽한 개업 축하 시'를 어디선가 읽게 되었는데, 나는 단번에 그 시에 매혹당했고 곧바로 책을 주문했다. 무려 예약 주문. 그의 시에 대해서는 나중에 좀 더 이야기할 기회가 있겠지. (없으면 말고.) 일단, 단 한 방에 나를 사로잡은 ‘완벽한 개업 축하 시’만을 옮겨본다.
그의 친구가 말했다
“나 이번에 개업을
하게 됐는데 축하 시 좀 써 줘"
그들은 벤치에 앉아
테니스공을 허공으로
던졌다가
다시 받으며
놀고 있었다
“응, 알았어”
그는 대답했다
그는 아마추어
시인이고
문예지에 발표한 시는
아직 없지만
시에 대해
많은 걸 알았고 또
많은 걸
모르기도 했다
그들은 테니스공을
조금 더 던지고
받고
하면서 놀다가 헤어졌다
집에 돌아와
그는 생각했다 이 시를 쓰기 위한
몇 가지
조건이 있다
추상적일 것 그래야
다음 사업 때도
이 시를 벽에 걸 수 있을 테니까
그런 것들
또 무엇보다 이 시에는
기쁨이
있어야 한다
그는 모니터 앞에
앉아
개업 축하 시를
열심히 떠올렸지만
잘 생각이
나지 않았다
일주일
열흘
다섯달
예닐곱
해 정도가
지났다
그는 반으로 쪼개진
양파 같은
희고
매콤하고
사각사각거리는
개업 축하 시를 쓰고 싶었지만
개업 축하 시는
잘
써지지 않고
있었다
몇 번쯤 완벽한
개업 축하 시를 떠올린 것 같기도
했지만
옮겨 적기 전에
그것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동안
친구의 사업은 성공해서 전국에
체인점이 생겼고
비싸 보이는 검은 차를
타고 다녔다
또 친구는
결혼도 했는데
그녀는 학창 시절에 만난 예쁜 아이였고
친구가 사업을
시작하기 전부터
사업을 같이 도와주기도
했었다
그는 결혼식 때
친구를 만나기도 했는데
그들은 두 손을
꽉
잡고 악수를 나눴지만
개업 축하 시에 대한
얘기는
하지 않았다
친구는 점점 바빠졌고
그와 친구는
예전처럼 벤치에 앉아
테니스공을 던지고
받고
하며 노는 것을 여전히
좋아했지만
점점 그럴 시간이
없었다
대신 친구와
그는
가끔 멀리서 각자
테니스공을 던지고
받고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는 이제 사람 좋은
아저씨가 되어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고
그는 아직 아마추어
시인이고
문예지에 발표한 시는
여전히 없지만
시에 대해
많은 걸 생각했고 또
많은 걸
생각하지 못했다
그는 그가
생각하지 못한 많은 것들
때문에
얼굴을 감싸고
울음을 터뜨릴 수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
대신
바람이 부는 저녁
벤치에서
그는 허공에 던진
테니스공을 다시 받으며
생각한다 그는
지금
완벽한 개업 축하 시를
떠올렸다고
추상적인
기쁜
반쪽으로 쪼개진
흰
양파
같은
- 강보원, <완벽한 개업 축하 시>, 민음사(2021), '완벽한 개업 축하 시' 전문
완벽한 개업 축하 시를 생각하며, 떠올리며, 떠올렸다고 생각하며, 적지 않은 시간을 보낸 사람은 알 것이다. 이 시에 매혹당하는 이유를. 어떤 사람? 이제 사람 좋은 아저씨 아줌마가 되어, 무언가를 하고 있고, 전문가도 아마추어도 아닌 상태에서, 그것(한때 골몰한, 어느 때부턴가 골몰해온)에 대해 많은 걸 생각하고 또 많은 걸 생각하지 못하는 그런 사람. 난 그런 사람이었고, 그런 사람이고. 계속 그런 사람이고 싶은가? 그럼 당신은? 당신은 어떤 사람인지 나는 모르고.
박솔뫼의 소설에 대한 것도 아닌, 강보원의 산문에 대한 것도 아닌, 강보원의 시에 대한 것도 아닌 이 글은 '책에 대한 것은 아닌' 글이 되었지만. 역시나 '책과 글쓰기에 대한 것과 관련이 있는' 글이 되고 말았다. 도돌이표와 반복. 차이는 반복에 거주하는데, 나의 반복은 언제쯤 차이를 만들어낼까.
(2021-6-14)
좋은 태도를 갖고 싶다. 좋은 태도가 뭔가를 해결해주는 것은 전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생각하는 좋은 태도를 내가 취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것은 범박하게 말하면 혼자서 꾸준히 열심히 하는 것, 외부의 이런저런 사정들과 나 자신의 이러저러한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것이다. 자유를 획득하고 싶은 가장 큰 이유는 그렇지 않으면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나는 늘 잘 사는 것을 최우선으로 두고 생각한다. 잘 살기. 잘 살아야 하고, 잘 살고 싶다.
- <셋 이상이 모여>, 강보원, '영화에 대한 것은 아닌' 중에서, 1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