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 1년, 알베르토 망구엘에 부쳐
내 마음을 종잡을 수 없었다. 새가 눈에 띄면, 열심히 쫓아가던 사냥감을 버리고 어김없이 새를 향해 짖어대는 사냥개 스패니얼과 다를 바 없었다. (...) (어디에나 있지만 아무 데도 없는 사람처럼) 나는 모든 것을 좇았다...... 나는 별다른 수가 없어 큰 욕심 없이 많은 책을 읽었다. 이 도서관 저 도서관을 다니며 다양한 저자의 책들을 두서없이 닥치는 대로 읽었다. 책을 읽는 기술이나 질서도 없고, 기억력과 판단력도 부족해 작은 이익밖에 얻지 못했다.
- 로버트 버턴, <우울의 해부 (The Anatormy of Melancholy)>
알베르토 망구엘의 책 <밤의 도서관>의 첫 부분이다. 그는 로버트 버턴의 말을 인용하는 것으로 책을 시작한다. 나는 그 인용을 다시 인용하는 것으로 이 글을 시작한다.
열심히 쫓던 것을 버리고 새롭게 시야에 포착된 새를 향해 짖어대는 사냥개 스패니얼. 요즘 나의 모습 아닌가? 첫 문장이 가볍게 잽을 날린다. 나는 순순히 얻어맞는다. 최근 나의 독서 패턴을 정확히 짚어내는 비유라서.
브런치를 시작한 지 1년이 되는 달이다. 그래서? 뭐 그렇다고. 1년을 핑계 삼아 뭐라도 써야 하지 않나 싶던 차에, 알베르토 망구엘의 책을 다시 펼치게 된 건 순전히 L 덕분이다.
오랜 벗 L이 최근 녹내장 진단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며칠 동안 심란했다. 미술가 L에게, 판화 작업과 책을 사랑하는 L에게, 서서히 시력을 상실하게 되는 병명은 가혹한 선고나 다름없었다. 며칠 뒤 큰 병원에서 오진으로 판명되었다는 말을 전해 듣고서야 나는 안심했다. L과 오랜만에 길게 통화하며 나는 말했다.
별 생각이 다 들었지 뭐야. 앞으로 작업도 못할 테고, 책도 읽기 힘들 텐데 이를 어쩌나. 오디오북이 있어 그나마 다행이긴 한데. 그래서 보르헤스도 떠오르고.
L은 왜 보르헤스가 떠올랐는지 물었다. 나는 보르헤스가 말년에 시력을 잃었던 것과, 그런 보르헤스에게 책을 읽어주었던 알베르토 망구엘에 대해서도 이야기해주었다. 망구엘이 어린 시절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한 서점에서 일하던 때에 보르헤스가 우연히 그 서점을 방문했던 것, 그 일을 계기로 망구엘이 보르헤스에게 몇 년간 책을 읽어주면서 문학적 영향을 받은 것에 대해서도.
조금은 가벼워진 마음으로 전화를 끊었고, 집에 있는 망구엘의 책을 찾아보았다. 망구엘이 <밤의 도서관> 머리말에서 이탈리아 시인 페트라르카의 말을 인용한 부분에 표시를 해둔 것이 눈에 띄었다.
"내 서고는 무지한 사람의 재산이지만, 무지한 것들을 모아놓은 곳은 아니다."
-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
주위를 둘러본다. 이사하면서 나만의 서재가 생겼고, 가진 책들 중 가까이 두고 싶은 책들만 600여 권을 선별해 새로 마련한 책장에 여유 있게 꽂아놓았다. 가까이 두고 싶은 책들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좋아하는 책, 다시 읽고 싶은 책, 읽다 말았지만 두고두고 아껴 읽고 싶은 책, 자주 꺼내어 참조하고 싶은 책, 아직 읽지 않았지만 곧 읽을 예정인 책, 아직 읽지 않았고 언제 읽게 될지 알 수 없지만 보는 것만으로도 나의 무지를 조금이나마 덮어줄 것 같은 책 등이 포함된다.
페트라르카의 말마따나 나의 서고는 무지한 사람의 빈약한 재산에 불과하지만, 무지한 것들을 모아놓은 곳은 아니다. 나의 무지를 일깨우는 책들은 무지한 것들이 아니므로. 무지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무지를 받아들이며 무지와 함께 살아나가고자 하는 사람이 무지와 마주치고 충돌하는 공간에 가까울 것이다.
"나는 아직 읽지 않았고 앞으로도 읽을 가능성이 없는 책을 보아도 별다른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다. 내 책들에 무한한 인내심이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내가 죽는 날까지 내 책들은 내 손길이 닿기를 기다릴 것이다. 내가 그들 모두를 아는 척이라도 해야 한다고 요구하지도 않고......" (같은 책)
플로베르가 <부바르와 페퀘셰>를 통해 그려낸 두 인물(부바르와 페퀴셰)은 야심차고 대담하지만 어리석은 책벌레에 불과하다고 망구엘은 말한다. "플로베르의 두 주인공이 결국 깨달은 것은 우리가 예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좀처럼 믿지 않던 사실, 즉 지식의 축적이 지식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특별한 목적 없이 우연히 눈에 띄거나 손에 잡힌 책을 펼치고 읽어나가는 것. 지난 몇 달 동안 내가 해온 일이다. 특이한 점은 한동안 뜸했던 장편 소설에 다시 매력을 느꼈다는 것.
스토너
존 윌리엄스의 <스토너>를 (읽고 한동안 먹먹했던 기억을 되살려) 밑줄 그어놓은 부분과 포스트잇과 메모를 중심으로 다시 읽었다. 뭔가를 쓰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에 며칠간 사로잡혔으면서도 나는 왜 아무것도 쓰지 못했나? 한 사람의 일대기를 다룬다는 것 - 그 지난하고도 진득한 일에 대하여, 프로타고니스트(윌리엄 스토너) 못지않게 눈길이 갔던 안타고니스트들(이디스, 로맥스, 찰스 워커)을 독립적이고 흥미로운 인생 서사의 주체로 다시 세워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고 싶었던 마음에 대하여, 인간은 태어나 이러저러하게 살다 병들어 죽는다, 는 사실을 이토록 담담한 시선과 문체로 펼쳐내는 작가의 비범함에 대하여.
작은 불씨는 어디에나
몇 년 전 소설가 Y가 추천해준 실레스트 잉의 <작은 불씨는 어디에나>도 단숨에 읽었다. 왜 3년이나 묵혀두었을까. 장편의 미덕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단편으로는 결코 담을 수 없는, 상당한 양과 정교한 디테일이 확보되어야만 느낄 수 있는 어떤 것. 다른 계급, 다른 세계, 다른 가치와 경험을 지닌 인물들 그리고 가족들의 이야기. 방랑하는 삶과 정주하는 삶, 예술 세계와 현실 세계(실용, 규칙, 질서가 지배하는)가 마주치며 빚어내는 어쩔 수 없는 교섭과 충돌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그리는 데 장편만큼 적절한 형식도 없을 것이다. 읽고 난 후, '미아'로 대변되는 가난과 방랑과 예술에 대하여, 리차드슨 가족(특히 리차드슨 부인)으로 대변되는 풍요와 안정과 질서의 세계에 대하여 좀 더 생각하고 말하고(쓰고) 싶었으나 역시 그러지 못했다.
0 영 ZERO 零
김사과의 <0 영 ZERO 零>을 흥미롭게 읽은 후에도 그랬었다. 0에 대해 말하고 싶었고, 신뢰할 수 없는 화자에 대하여, 헨리 제임스의 <나사의 회전>을 레퍼런스 삼아 말하고 싶었다. 작가가 다루는 분열증적 시선과 심리적 식인(食人) 본성에 대하여, 김사과의 등단작 '영이'를 읽으며 (새로움과 탁월함에 놀라) 눈을 뗄 수 없었던 기억에 대해서도, 냉소와 환멸과 파괴로 점철된 김사과 스타일에 대해서도 뭔가를 말하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했다.
토니와 수잔 - 녹터널 애니멀스
오스틴 라이트의 <토니와 수잔>도 그랬다. 이런 류의 흡인력 있는 스릴러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나를 어딘가 정신없이 데려다 줄 콘텐츠가 필요하던 시점이어서 그랬는지, 오랜만에 불안하고 두렵고 쫄깃한 마음으로 책을 읽는 기분이 나쁘지 않아서였는지, 아무튼 나는 밤늦게까지 분풀이하듯 이 소설을 읽어치웠다. 그리고 나서 이를 감각적으로 영화화한 톰 포드 감독의 <녹터널 애니멀스>까지 연달아 보았다. 무엇을 쓰고 싶었던가. 내가 좋아하는 '소설 속 소설' (액자식) 구성에 대하여, '복수'로서의 소설 쓰기(글쓰기)에 대하여, '복수'를 다룬 다른 문학 혹은 영화 콘텐츠들과 연결하여 뭔가를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수잔에게 복수하기 위해 소설을 써 보낸 전 남편 에드워드의 심리에 대하여, 글쓰기가 주는 불편한 느낌(거짓말과 왜곡이 수반되기에)과 "진실이 미묘하게 비틀리는 과정이 혐오스러워 글을 쓰지 않았다고 자신을 설득하는" 수잔의 심리에 대하여, 소설 속 소설인 <녹터널 애니멀스>의 주인공 '토니'의 세계가 어떻게 수잔의 세계와 닮았는지에 대하여, 제3의 지대에서 자신이 속한 세계와 닮은 세계를 마주했을 때 느끼는 알 수 없는 불안과 공포에 대해서도 쓰고 싶었으나 결국 그러지 못했다.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
메리 앤 셰퍼의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을 읽고 나선 어땠었나. 옛날이야기를 듣듯 편안하게 술술 읽히는 이런 류의 책도 오랜만이었다. 지적 긴장 없이 물 흐르듯 진행되는 이야기와 이야기 속 이야기, 꼬리를 무는 이야기들. 처음엔 별로 내키지 않았으나 영화화되었다는 사실에 읽기 시작했고 막상 읽기 시작하니 서간체 소설이라는 형식이 나름 흥미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신인과 발신인 표시를 통해 정교하게 직조된 편지의 구성과 배치. 여러 화자, 여러 시선과 각도, 각자의 목소리가 층층이 쌓아 올리는 이야기는 점차 입체적으로 살아난다. 전쟁과 북클럽이라는 모티브 때문인지, 강영숙의 소설 <라이팅 클럽>이 연상되었고(이 책에 대해서도 뭔가를 쓰고자 했으나 결국 쓰지 못했다).
김상혁 시인의 <다만 이야기가 남았네>라는 시집 제목이 생각난다. 이 시집의 첫 시 '나는 이야기 속에서'는 이렇게 시작하고;
나는 이야기 속에서 사랑한다. 좋았다고 말하거나 좋은 것에 관해 말하거나. 나는 이야기 속에서 시작한다.
- 김상혁, <다만 이야기가 남았네>, 문학동네(2016), '나는 이야기 속에서' 일부
이렇게 끝난다;
이야기 속에서 이야기의 기쁨이 넘치고 있었다. (같은 시)
무언가를 쓰고 싶었으나 아무것도 쓰지 못한 나는 '다만 이야기가 남은' 긴 여운의 상태에 나를 속절없이 실어 보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무언가를 쓰고 싶지만 시작할 수 없는/시작하지 않는/시작하지 못하는 내가 (백은선 산문집 제목처럼) 싫기도 하고 좋기도 하고 이상하기도 한 기분.
나는 왜 못 쓰는가. 이 질문은 '나는 왜 안 쓰는가'와 어떻게 다른가. 직접 돌진하지 않고 왜 자꾸 에둘러 가는 길을 택하려 하는가. 유예와 지연의 시간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면, 어리석은 완벽주의가 아니라면, 자기 확신의 부족이 아니라면, 왜 머뭇거리고 망설이는가.
나는 왜 픽션을 읽는가. 평범하지만 톡 쏘는(혹은 뭉근한) 진실을 품고 있는 흥미로운 이야기에 끌리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고도의 집중력과 지적 호기심을 작동시켜야 하는 건조한 이야기에도 매혹당한다. 제발트의 <아우스터리츠>와 <토성의 고리>, <이민자들>을 동시에 펼쳐놓고 읽는 것은 '제발트를 읽는다'라는 행위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고자 하는 나의 허영심에 불과한 걸까? 집요하고 촘촘한 독서를 요구하는 책들의 매력은, 문장 단위로 끊어 찬찬히 뜯어보고 곱씹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는 제대로 느끼기 어렵다는 것을 배운다. 나를 낯설고 불편하게 만드는 책들. 그건 마치 집중해서 근력 운동을 마친 후 뻐근하게 전해오는 근육통을 느끼는 것과 같다. 불편하지만 싫지 않은(오히려 묘한 흡족감을 주는) 감각. 나는 돈 드릴로의 <침묵>과 박솔뫼의 <우리의 사람들>을 그렇게 읽는다.
박솔뫼 소설에 해설을 쓴 강보원 평론가의 글을 읽다가 그의 다른 책 <셋 이상이 모여>와 최근 출간된 시집 <완벽한 개업 축하 시>도 읽는다. 이은규와 유계영과 이다희의 시집을 읽으며 실망과 의아함과 감탄을 오간다. 정지돈과 금정연의 궁합이 재미있어 <문학의 기쁨>을, 그들의 쿵짝에 영향받아 오한기의 <인간만세>를, 이웃 블로거의 추천으로 이승미의 독서 에세이집과 저자가 소개한 에리카 종의 <비행공포>를 충동적으로 사들인다. 푸코의 책들을 뒤적이다 허경이라는 이름이 반가워 <상당한 위험>을 구매하고, 존 버거의 <Ways of Seeing 다른 방식으로 보기>를 정신없이 읽다가, 알라딘에 들려 반가운 저자와 제목을 발견하곤 열 권의 중고 서적을 한꺼번에 구매한 후 손에 잡히는 대로 다시 읽기 시작한다.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셔우드 앤더슨, 아베 코보, 다니엘 페나크,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후안 룰포, 아지즈 네신, 그리고 톤 텔레헨까지.
새가 눈에 띄면, 열심히 쫓아가던 사냥감을 버리고 어김없이 새를 향해 짖어대는 사냥개 스패니얼처럼. 새로운 책이 눈에 띄면 쫓아가던 책을 버리고 새로운 책을 향해 눈을 번득인다. 나는 뭔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친구 L과 다시 문자를 주고받는다. 아무것도 못쓰고 있어. 이러저러한 상태야. L은 이해한다. 그리고 말한다. 그런 상태에서 오는 생각들도 써봐. 나는 생각한다. 이미 쓰고 있지만 어디로 향하는지 모르겠다고. 브런치 1년이 되는 지난 금요일에 시작한 이 글은 5일째 답보 상태이다. 망구엘로 시작했으니 망구엘로 마무리해야 이 길고 지루하고 무의미한 독백이 끝날까.
자신의 직업을 '독서가'라고 말했던 망구엘은 <독서의 역사> 후속편으로 독서라는 행위와 독자라는 주체를 중점적으로 다룬 <은유가 된 독자>에서 독자를 여행자, 은둔자, 책벌레, 라는 세 가지 메타포에 기대어 살펴본다. '세상=책'이라는 기본적인 메타포를 기반으로 '독자=여행자' '서재=상아탑', '독자=책벌레'라는 파생적 메타포들이 등장한다. 에필로그에서 망구엘은 채스터톤(Chesterton)의 말을 인용한다.
"모든 책에는 어딘가에 대여섯 개의 핵심 단어가 묻혀 있고, 나머지 단어는 모두 그 단어들을 뒷받침하기 위해 쓰였다."
- 알베르토 망구엘, <은유가 된 독자>, 행성B(2017), 에필로그 167쪽
그리고 이렇게 마무리한다.
우리는 '독서하는 피조물'이다. 단어를 섭취하고, 단어로 이루어져 있으며, 단어가 존재의 수단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다. 단어를 통해 현실을 파악하고, 자아도 확인한다. (같은 책, 168쪽)
에필로그의 제목은 '삶을 위한 독서'이다. 독서를 위한 독서, 가 아닌 나의 삶을 위한 독서. 나는 망구엘이 표현한 '저자와 은밀히 내통하는 독자'에 별도의 표시를 해놓는다.
"한 연의 시, 한 줄의 산문, 하나의 아이디어나 스토리가 갑자기, 불현듯, 심오하게 우리를 감동시켜 어렴풋하고 반쯤 직관적이고 공언되지 않은 뭔가를 드러낸다. 그것은 저자와 은밀히 내통한 독자만이 알 수 있는 것이다. (...) 세르반테스처럼 플로베르도 '픽션의 본질적 힘'과 '물 자체(the thing itself)의 경험을 재창조하고 전달하는 픽션의 비상한 힘'을 직감한다. 우리는 텍스트에 의해 세팅된 무대에서 여러 가지 분장을 하고 연기하는 자아를 관람하며, 그 과정에서 종종 뭔가를 배운다. 이러한 의미에서 픽션이란 일종의 본보기(exemplary)다. 그중 일부분은 우리 삶을 전환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같은 책, 166-167쪽)
당분간 저자와의 은밀한 내통 자체에만 집중해야 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쓰지 않으면 사라지는 것들 때문에 나는 불안해하지만. 독후감, 서평, 북리뷰는 내 독서의 목적이 아니다. 지난 1년간 브런치에 올린 내 계통 없는 잡문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여러 텍스트에 투사된 자아를 관람하고 그 과정에서 종종 뭔가를 생각하고 적어둔 것에 불과하다. 생각하기 위해 쓰고, 쓰기 위해 읽는 것이 어느 정도는 사실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살기(버티기) 위해 읽고, 읽기 위해 산다(버틴다). 에필로그에서 망구엘은 다음과 같은 인용을 화두로 걸지 않았던가.
사람들은 살기 위해 읽지만, 나는 읽기 위해 산다.
- 로건 피어설 스미스, <뒤늦은 생각(Afterthoughts)>
쓰는 건 다음의 일이다.
(2021-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