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설레게 하는

새로운 곳으로 (feat. 한국 야구 국가대표팀)

2015년 11월 어느 날, 급작스레 타이베이행 비행기를 잡고, 호텔을 잡았다. 현지 시간으로 밤 11시가 넘어서야 타이베이의 한 호텔에 도착한 우리는 축 처진 피곤한 몸으로 체크인 카운터 앞에 서 있었다.


뒷모습만 봐도 딱 한국인 같은 한 남자가 옆쪽 컨시어지에서 호텔 직원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운동복을, 아니 다시 보니 푸른색 야구복을 입은 품이 어딘가 낯설고도 낯익었다. 어라, 등에는 Korea라고 적혀 있다.

그때 체격이 건장한 한 무리의 사내들이 호텔 로비로 쏟아져 들어왔다. 모두 푸른색 야구 유니폼을 입고 있다. 야구 선수들이구나. 그런데 여기엔 왜? 표정은 하나같이 밝지 않았다. 로비 한가운데에서 선수들을 안내하는 (스태프로 보이는) 한 남자의 깍듯한 목소리를 들으면서도 나는 반쯤 감긴 눈으로 그들의 정체가 무엇일까 흐리멍덩하게 생각할 뿐이었다.


선수들의 행렬은 코앞에서 계속 이어졌고, 문득 낯익은 옆모습을 발견하고 나서야 나는 '어……어…...?' 하며 백치 아다다처럼 입을 벌렸다. 그의 등판에 Sun이라 적힌 영문을 언뜻 보고서야 나는 그가 왕년의 선동열 선수임을 알아차렸다. 나는 입이 막 트인 벙어리처럼 체크인 중인 남편을 향해 뒤를 돌아보며 "어, 어, 저기, 선동열 ......'라고 중얼거렸다. 남편은 이미 잔뜩 흥분한 얼굴로 내게 달려오고 있었다.

"봤어? 봤어? 나 봤어. 박병호 선수! 그리고 김현수도!"

아, 박병호는 또 누군가. 김현수는 또 누구고.

운동 선수에 관한 한 거의 백치미를 자랑하는 나는 멍하니 남편 얼굴을 바라보았다.



# 한국 야구 국대팀과의 마주침


그나마 어렸을 적 MBC 청룡을 응원하며(도대체 왜 응원하였는지는 지금도 알 수 없다. 단지 서울 팀이기 때문에?) 소년중앙 같은 어린이 잡지에서 꼬박꼬박 오려낸 선수들의 프로필 사진을 모으고(나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 이현세 만화 <공포의 외인구단>이나 이상무 만화 <독고탁> 시리즈에 열광한 것이 내가 야구라는 스포츠를 인식하게 된 배경의 전부였다. 고백하건대, 나는 스무 살이 되도록 야구의 룰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조금 부끄러운 이야기이지만, 내가 어느 정도 야구지식에 천치였냐 하면, 점수가 어떻게 나는지도 몰라, 타자가 홈런을 칠 때 왜 어떨 때는 1점 홈런이라 하고, 또 어떨 때는 3점 홈런이라고 흥분하여 떠들어대는지 도통 알 수 없다고 생각하는 그런 한심한 수준이었다. 사각형의 경기장에서 타자가 오른쪽 담장으로 공을 넘기면 1점 홈런, 왼쪽으로 넘기면 2점, 정면으로 넘기면 3점인가, 뭐 이런 기상천외한 발상까지 서슴지 않았으니 말이다. 무식이 깡패다.


입사하고 나서 부서 직원들(나 빼고 다 남자였다)과 점심에 밥을 먹다가 내가 무심코 이 이야기를 꺼낸 적이 있었는데 당시 대리님과 과장님은 입 속에 있는 음식을 뿜을 뻔했다. "우리 웃기려고 그러는 거지? 신입사원이라고 그렇게까지 애쓸 필요는 없는데"라거나 "도대체 대학은 어떻게 들어간 거야?"라는 식의 반응이었다.

그런 내가 유일하게 알고 있는 야구인이 그 옛날 백인천 감독, 그 옛날 김재박 선수, 선동열, 이승엽, 박찬호 정도가 다인 것은 어쩌면 당연한 거 아닌가.


아무튼 남편은 '박병호'와 '김현수' 선수를 바로 코앞에서 보았다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누군가를 봤다고 그렇게까지 애처럼 좋아하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캐리어를 급하게 잡아 끌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돌진했다. 선수들이 여러 대의 엘리베이터에 나누어 타고 있었는데, 그 중 우리 앞 엘리베이터가 먼저 열리면서 몇 명의 선수들이 올라탔다. 남편이 민첩하게 아이를 그 엘리베이터에 밀어 넣고(지하철 빈 자리를 확보하려 가방부터 던져놓는 식으로) 자기도 어떻게든 올라타려 애쓰는 모습이 어째 그 박병호 또는 김현수 선수가 엘리베이터 안에 있는 모양이었다. 결국 삐~ 하는 민망한 소리가 들리고서야 어리둥절한 채(한국야구국가대표의 에이스 선수들을 등 뒤에 세워놓은 채) 엘리베이터에 타고 있던 아이까지 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엘리베이터 문은 닫혔다.

남편의 얼굴엔 지각한 직장인이 막 떠나버린 지하철을 바라보며 지을 법한 안타까운 표정이 서려 있었다.


알고 보니 그 날은 <월드 프리미어 12> 대만 경기에서 미국과 우리나라가 붙은 날이었다. 당장 전날까지만 해도 남편과 아들이 TV 앞에서 타이페이 티엔무 야구장에서 펼쳐진 한국-멕시코 경기를 뚫어지게 들여다보았던 게 생각 났다. 전날 밤 TV를 통해 본 우리나라 야구 국가대표 선수들을 바로 다음날 밤 줄줄이 사탕으로 코앞에서 보게 된 것이다. 참, 사람 일이란.

다음 번 엘리베이터에 함께 타게 된 국가대표팀 스태프가 우리더러 한국 사람이냐고 물어보면서 우리는 조심스럽게 물어볼 수 있었다. 오늘 미국과의 경기 이겼나요? 선수들의 어두운 표정으로 봐선 그런 것 같지 않았고, 물론 졌다는 대답이 돌아왔지만.


"아, 그 엘리베이터를 탔어야 하는데!"

우리끼리 있게 되자 남편이 안타까워하며 탄식했다. 박병호 선수가 타고 있었다는 것이다.

"타서 뭐하게?" 내가 물었다.

"같이 사진이라도 찍을 수 있잖아."

"가뜩이나 미국한테 져서 기분도 안 좋아 보이던데 사진은 무슨......"

"아니면 '화이팅'이라고 조그맣게 외쳐줄 수도 있고......"



# 나를 설레게 하는 대상


흠......그런 것이군. 의외의 모습을 본 나는 생각했다. 자신이 좋아하는 유명인을 만났을 때 저렇게 흥분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일의 특성상 TV에 나오는 유명인을 꽤 접할 기회가 있었음에도 나는 한번도 저렇듯 흥분하거나 설렌 적이 없었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박지성 선수와 미팅을 하고 다 함께 기념 사진을 찍을 때조차도 별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소위 셀레브리티(라 불리는 그룹의 사람들)와 미팅을 하고 나서도 나는 왜 소위 '인증샷'을 찍을 생각을 단 한번도 하지 않았을까. 누군가에게 자랑을 하기 위함이 아니라 '기록'의 차원에서 찍어 두었다면 나름 의미가 있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어차피 다 지난 일이니 그렇다손 치고.


다음날 아침 조식을 먹으러 1층에 내려와서는 황재균 선수를 만났다. 팬이었다면 득달같이 달려가 사인을 받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건 뭐 이웃집 아저씨를 만났어도 그렇게 데면데면한 느낌이 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긴, 관심이 없으니 이웃집 아저씨만도 못한 셈이다. 무관심이 깡패다.


나를 설레게 하고 흥분하게 하는 사람 혹은 일은 무엇일까? 사람은 누구를 만나게 될 때 흥분하고 설레고 긴장하게 되는 걸까. 아침밥을 먹으면서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가장 쉽게는 이성일 수 있겠고, 정신적 코드가 통하는 동지일 수도 있으며, 닿을 것 같지 않은 머나먼 우상일 수도 있으리라.


나는 어떤 책을 읽을 때, 어떤 음악을 들을 때, 어떤 그림을 볼 때, 혹은 어떤 장면을 사진 프레임으로 담을 때, 그리고 어떤 글을 쓸 때, 설렌다. 그리고 그 설렘을 누군가에게 이야기할 때 흥분한다. 그리고 나의 흥분에 공감하는 동지를 만났을 때 또 설레기도 한다. 작가일 수도, 음악가일 수도, 아는 지인일 수도, 모르는 익명의 동지일 수도, 무심한 풍경일 수도, 대책 없이 머리 속에서 뛰쳐나오는 문장에 조응하는 내 심장 소리일 수도 있다.


이성이든 우상이든 혹은 동지이든, 나를 설레게 하는 사람에게 축복이 있기를.

환상이든 그리움이든 꿈이든, 나를 설레게 하는 모든 것들은 내게 은혜를 베풀기를.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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