닮은 꼴 찾기: 작가 성석제와 기타리스트 토미 엠마뉴엘
# 재미있는 뮤지션, 토미 엠마뉴엘
플랫피킹(flatpicking)이니 블루그래스(bluegrass)니 핑거스타일(fingerstyle)이니 하는 기타 주법에 대한 것은 내가 언급할 부분이 아니다. 머리로만 이해하지 실제로 기타를 치지 못하는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으랴. 그러나 토미 엠마뉴엘(Tommy Emmanuel)이 연주하는 Guitar Boogie 같은 곡들을 찬미할 수는 있다. 핑거스타일의 대가, 혹은 명인 또는 거장 뭐 이런 수식어가 10개씩 들어가도 할 말이 없다. Tall Fiddler를 들을 때도 그렇고. I Go To Rio나 Mombasa 같은 곡들을 들어도 할 말이 없긴 마찬가지다. 기가 막히기 때문이다. 또한 재미나기 때문이다. 리듬도 멜로디도 피킹도 심지어 토미 아저씨의 능청스러운 감흥도.
Mombasa의 라이브 버전은 그의 퍼포먼스의 진수를 보여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기타를 타악기로 변신시키는 트랜스포머로서의 능력자다운 면모를 아낌없이 보여준다.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다. 꼭 재미나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가 즐겨 연주하는 Somewhere Over the Rainbow나 Amazing Grace를 들어보면 - 특히 <Center Stage>(2008)에 실린 라이브 버전은 독특한 감흥을 준다 - 자신의 재능 즉 탤런트를 어떻게 발현시켜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만이 보여줄 수 있는 퍼포먼스를 펼치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단순히 속주를 자랑하거나 초절기교를 뽐내거나 하는 허세와는 다른 ‘무엇’이 있다. 그는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것’을 ‘가장 즐겁게 할 수 있는 방법’으로 '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게 왠지 나는 눈물겹다.
# 재미있는 소설가, 성석제
웬 뜬금없는 기타리스트 이야기냐고? 사실은 작가 성석제 때문이다. 그가 <꾸들꾸들 물고기 씨, 어디 가시나>라는 책을 냈을 때 나는 제목을 보자마자 피식 웃음부터 나왔는데, 왠지 그 ‘꾸들꾸들 씨’가 작가 자신을 연상시켰기 때문이다.
배꼽을 잡고 웃어본 적이 언제던가. 아주 웃기고 재미난 얘기를 써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성석제의 <재미나는 인생>을 읽다가 든 생각이다. 얘기는 사실이어도 좋고 허구여도 좋았다. 그런데 머리 속에 쏜살같이 파고드는 이야깃거리는 누군가로부터 들은 사실(로 추정되는 실화)이 대부분이다. 이야기의 태반을, 그것도 웃기는 얘기를 오로지 상상력으로만 지어낸다는 것은 애초에 내 깜냥으로는 가능하지 않은 일이었다.
남편이 들려준 '팔도 치약 사건'이 떠오른다. 팔도는 그의 고등학교 친구 이름(이름부터 웃음을 유발한다)이고,치약은 말 그대로 치약이다. 수학여행을 가서 잠든 친구의 은밀한 곳에 몹쓸 장난을 했던 이야기였다. 나는 너무 심했다,며, 너무 못됐다,며, 아무리 장난이어도 도가 지나쳤다,며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피식피식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길이 없었다.
성석제의 소설(을 가장한 이야기 모음) <재미나는 인생>을 읽던 박완서 선생도 아마 그러했던 모양이다. 뒤표지엔 박완서 선생의 후감이 이렇게 적혀 있다.
<재미나는 인생>에 든 글들은 단편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짧은 소설들이었는데 나는 그 중의 한 편을 읽다가 그만 전철 안에서 비죽비죽 웃음을 참을 수가 없어졌다. 허리를 비틀며 크게 웃고 싶은 걸 참는다는 게 그렇게 고통스러운 줄은 몰랐다. (…) 그 안에는 웃기는 얘기만 있는 게 아니었다. (작가 박완서)
사실 그랬다. 나도 예외는 아니어서 조용한 커피숍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며 그의 단편 하나를 읽다가 어깨를 들썩이며 웃음을 참느라 그렇게 곤혹스러울 수 없었다. 일그러진 입을 막느라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고개를 숙인 채 흐느끼듯 웃다 보니 눈물이 다 났다. 안경을 벗고 눈물을 훔치다가 마주 앉은 테이블의 한 베트남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기이한 광경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웬 여자가 얼굴을 일그러뜨려가면서까지 웃음을 참다가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라니. 아, 울음을 참는 것만큼이나 웃음을 참는 것은 신체적 고통을 수반하는 일이로구나.
아무래도 한꺼번에 읽어서는 안 되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배꼽이 무리하게 빠져서도 안 되겠고, 기분이 좋지 않을 때 야금야금 꺼내 먹듯 읽어야 효율성을 극대화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 그게 아닌가? 한번 끊어진 웃음에 다시 시동을 걸려면 예열이 필요한데…… 웬만한 예열이 아니고서는 단번에 최루성 웃음을 터뜨리기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니 그렇다. 일상의 삶에서 떼굴떼굴 구르며 배를 잡고 박장대소할 만한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물개박수를 쳐가며 뒹구는 웃음까지는 아니더라도 피식피식 터져 나오는 웃음을 만나는 것(혹은 만드는 것)은 일상에 강장제와도 같은 활력을 주는 일이 될 것이다.
# 닮은 꼴 찾기
성석제의 소설을 생각하다가 토미 엠마뉴엘의 연주를 떠올린 것은 우연인 듯 우연 아닌 일이었다. 토미 아저씨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여전히 나 자신을 위해 연주하고 있습니다. 나 자신이 즐기고 있다는 것을 느껴야만 관객을 즐겁게 해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성석제 아저씨도 비슷한 말을 했다. 자신의 소설인 듯 소설 아닌 소설 같은 소설을 통해 그의 육성을 들어보자.
내가 쓰고 내가 읽고 내가 웃는다는 건 실없는 노릇이다. 그런데 그게 재미있어서 나는 가끔 내가 쓴 걸 읽어본다. 읽다 보면 내가 빠진다. 누가 이렇게 훌륭한 소설을 써서 나를 감득하게 하는가. 바로 나다. 그 소설을 어떤 이유로 어떻게 썼는가를 모르는 나다. 내가 쓴 걸 잊어먹고 거 참, 웃기는 자식이네, 내가 쓰려고 했던 걸 먼저 써버렸네 하고 이를 갈며 질투할 정도로 기억력이 형편없는 나다. (…)
나는 내 안에 쓰는 사람과 읽는 사람, 즐기는 사람이 공존하고 있고 그 세 존재는 칼로 딱 갈라놓은 수박처럼 확연하게 다르지만 원래는 하나인 괴상망측한 놈들이라는 말을 우물거려보기도 한다. (…)
오늘 다시 한번 더 떠들어본다. 첫째, ‘제가 먼저 신이 올라야 남도 신이 오르게 한다.’ 둘째, ‘내가 먼저 떨어야 남도 나를 무서워한다.’ 첫째는 무당의 이야기고 둘째는 병 잘 깨는 깡패 이야기다. 작가는 ‘저부터 재미있게 써야 남들도 재미있게 본다’인데 나는 천성적으로 재미없는 걸 좀처럼 견디지 못한다. 소설을 계속 쓰는 이유 가운데 첫 번째는 기왕 이리 된 거 나라도 재미있어 하자는 것이다. 남들이 재미있어 하는 건 다음 다음의 문제다. 그럼 재미가 뭐냐고? 안 가르쳐준다.
재미 다음의 문제는 슬픔이다. 고등학교 때의 은사는 내게 (…) 흥이 다하면 슬픔이 온다는 것, 또는 흥이 다하지 않은 슬픔은 가짜라는 것, 환락이 절정에 이르자 오히려 슬픔의 정이 몸에 스민다(歡樂極兮哀情多: 漢武帝, 秋風辭)는 교훈까지 패키지로 들려주셨는데 그때 워낙 독하게 가르침을 받아선지 아직까지도 흥이 나면 나중에 슬픔을 어떻게 감당할까 미리 염려하게 된다.
슬픔 다음은 뭔가. 그건 다음 기회에 이야기하자. 기회가 없으면 말고.
(성석제, <재미나는 인생>, ‘우렁각시에게’ 243p)
닮은 꼴 아닌가? 박완서 선생이 이야기한 것처럼 성석제 소설이 재미있기만 한 것은 아니다. 우스꽝스럽게 생긴 생선이 제 속에 작고 단단한 잔가시를 잔뜩 품고 있는 것처럼, 그의 소설을 읽는 이는 재미나고 우스운 이야기 속에 담겨 있는 미세한 뼈들을 주의해야 한다. 토미 엠마뉴엘의 연주가 그저 재미있고 신나기만 한 것은 아닌 것처럼 말이다.
이 세상에는 독특하게 닮은 꼴들이 많다. 그 닮은 꼴들을 찾아 (당사자들의 허락 없이) 짝 지워보는 것은 꽤 쏠쏠한 재미를 준다. 이 역시 재미나게 인생을 사는 법 중 하나일 것이다.
성석제에게 소설은 '근대의 서사시'가 아니라, 그보다 더 오랜 뿌리와 더 깊은 충동에 기원을 둔 '이야기'의 일종이며, 그것도 '작은 이야기'일 뿐이다. 여기서 소설은 ‘거짓말’이며, 거짓말은 일단 ‘재미’있고 봐야 한다는 이 작가 특유의 소설관이 나온다. 성석제를 통해 우리는 소설이 엄숙한 계몽의 형식이 아니라 자유로운 즐김의 영역이라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닫는다. (문학평론가 진정석)
즐기며 살자, 혹은 재미나게 살자,라는 모토를 온몸으로(두 사람 다 좀더 손가락에 집중되어 있다는 공통점이 있군) 실천하는 재미나는 사람들(그들은 결코 평범한 사람들이 아님을 유의해야 한다) 덕분에 나 같이 밋밋한 사람도 때로 낄낄거리며 눈물을 흘리고, 소심한 웃음이나마 터뜨리며 몸을 흔들기도 하니, 좀더 살 맛 나는 세상 만들기에 일조한 공로로 '재미난 인생의 가능성(좀더 순박하게 표현하자면 꿈과 희망)을 보여주는 아티스트를 위한 상' 하나쯤 제정하여 수여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뭐 꼭 노벨상이나 그래미 어워드만 권위 있으라는 법 있나.
# 재미난 인생, 재미난 글쓰기
그렇다면 나는 이 재미나는 세상을 어찌 더 재미나게 살아가야 하지? ‘무엇’으로 재미난 일을 만들며 살아가지? 작가의 말에서 슬쩍 힌트를 얻는다.
처음부터 소설의 형식이라거나 생김새에 관해 가타부타 이야기할 생각은 없었다. 다만 소설이 관용의 폭이 아주 넓은 장르라는 것, 그래서 나 같은 사람이 그 안에서 어슬렁거릴 수 있었다는 것은 말해두고 싶다. 다시 생각해보면 문학이, 인생이 모두 그렇다. 무엇이든 내가 새로 시작하려 하면 그 무엇은 드넓은 품을 벌려 나를 받아들여주었다. (‘개정판 작가의 말’에서)
내가 커피숍에서 눈물을 짜내며 읽었던 단편을 남편에게 보여주었을 때 그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사실 웃음 코드야 사람마다 다 다른 것이니 이는 어쩔 수 없다. 웃음을 강요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는 마지못해 슬며시 웃더니, 자신에겐 이것보다 더 재미나는 이야기들이 많다고 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고등학교 시절 있었던 ‘미친개’ 선생이며 (알다시피 어느 학교나 ‘미친개’ 선생들이 있었다) 기타 요절복통할 만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런데, 그게 또 웃기지만은 않았다. 그 미친개가 이제는 일흔이 넘었겠다,라는 말에 어쩐지 좀 짠해졌고, 그때 그 웃음 유발 친구들 중 누군가는 말 못할 생활고에 시달리는 딱한 처지에 있고 또 누군가는 자살했더라,하는 이야기는 순식간에 분위기를 숙연하게 만들었다.
아, 삶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고, 우리의 찰리 채플린 아저씨는 일찍이 이야기했었다. 멀고 가까운 조망들이 점점이 모여 무수한 삶의 시간들을 이루고, 이 점들이 겹겹이 층을 이루어 거대한 점묘화처럼 그려지는 것이 인간의 역사 아니던가.
그렇다면 나도 ‘팔도와 치약’이나 ’시골 미친개’ 혹은 어디선가 주워 들은 ‘재미나지만 꼭 재미난 것만은 아닌’ 실화들을 한번 그려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친구에게 들은 이야기도 있을 터이고 가족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도 있을 터이다. 이것은 창작의 차원이 아니라 ‘구전(口傳)의 기록’ 차원에서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흠흠!) 아니, 사실은 그저 나 좋자고 하는 일이 될 확률이 더 높긴 하다. 써보고 혼자 읽고 낄낄대며 웃다가 눈물도 찔끔 찍어내고. 성석제 아저씨도 이 재미로 소설을 쓰는 게 아닐까.
그나저나, 말이 나온 김에, 누가 좀 알려주면 좋겠다. 웃다가 눈물 흘릴 만한 이야기들. 나는 익숙한 슬픔의 눈물보다 가끔 웃기는 눈물로 몸과 마음을 씻어내고 싶다. 그것이 바로 이 재미나는 세상에 바치는 일상의(일상에서 실천할 수 있는) 오마주일 테니.
(2015-1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