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문장에 대한 단상
바람이 분다,라는 문장에서 시작된 일이다. 5년 전 호치민, 사이공 강가의 아파트에서 베란다 바깥 풍경을 내다보던 때였다. 바람이 불었고, 나는 “바람이 몹시 분다”라는 문장 하나를 적었다. 나도 모르게 ‘몹시’라는 말을 선택했는데, 써 놓고 보니 (몹시) 무책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람이 몹시 부는 것은 어떤 것인가. 나는 다르게 말할 수 있었다. 원래 쓰려던 것을 잊고 나는 이 문장에 집착했다. 몹시. 당시의 노트를 찾아내 적어본다. 제목은 ‘바람이 분다’로 적혀 있다.
바람이 분다
바람이 몹시 분다.
바람이+(몹시)+분다.
'바람이'와 '분다' 사이의 '몹시'가 마음에 걸린다.
'바람이'라는 주어와 '분다'라는 술어 사이에 가능한 단어는 '몹시'밖에 없는 걸까.
관용적 표현의 반복은 상투적 습성으로 굳어진다.
‘몹시’를 아예 빼버리거나, 당시 느낀 나의 감각에만 의지해 새롭게 부사구를 지어보던가. 그 부사구는 적어도 '바람 부는 현재’의 분위기를 가능한 한 최대치로 담고 있어야 할 것이다. 바람이 분(이미 과거가 되어 버린) 그 순간의 대기, 강과 나뭇잎의 움직임, 하늘의 빛깔 등을 재빠르게 포착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옅은 회색 구름이 슬며시 몰려가는 하늘, 한 단계 높은 돗수의 렌즈를 낀 것처럼 깊고 선명하게 도드라지는 시야, 잿빛으로 뒤척이는 강,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거리는 물결은 시시각각 다른 무늬를 만들어낸다. 일렬로 늘어선 야자수의 거대한 잎들이 강을 향해 일제히 나부낀다. 한쪽 방향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듯. 마침 갈색 바지선 한 척이 사이공 강을 가로지른다. 마치 지나가는 배를 향해 있는 힘껏 초록빛 손수건을 흔드는 것처럼 보인다. 베란다에 놓인 두 개의 화분도 같이 흔들린다. 바람에 접신이라도 한 듯 작은 잎들이 부르르 몸을 떤다. 푸른 살들을 출렁이며 바람에 제 몸을 헌납하는 것 같다.’
‘바람이 분다’라는 말을 불러올 당시 내가 감각했던 바깥 풍경을 빠르게 크로키한다면 아마 위와 같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바람이 분다’ 사이에 ‘몹시’라는 말을 집어 넣음으로써 많은 것을 뭉뚱그린다. 습관적으로, 무성의하게. 바람이 + ( ) + 분다. 나는 괄호 안에 어떤 말을 넣을 수 있을까 곰곰이 생각해본다. 위에 장황하게 늘어놓은 순간의 인상을 언어화하기 위해 어떤 단어를 선택하고 어떻게 배치할 것인가.
이리저리 단어들을 조립하고 다시 흩어뜨린다. 하릴없는 단어 놀이에 잠시 몰두하다가 나는 피로감을 느낀다. 패잔병처럼 늘어선 낡고 닳은 말들이 보기 싫다. 언어 감각은 주어지는 것인가 벼려지는 것인가. 일단 나를 탓한다. 그러다가 (주워들은 대로) ‘실재를 겉도는 언어의 미끄러짐’을 탓한다. 그 미끌거리는 감각이 싫으면서도, 번번이 미끄러지고 마는 순간이 나쁘지만은 않다. 이제는 친숙하고 애틋하기까지 하다.
도리 없이 시의 '불가능의 가능성'을 다시 생각한다. 시는 실재와 언어 사이의 틈을 얼마나 좁힐 수 있을까. 오히려 틈을 벌려 그 간극이 메워질 수 없는 성질의 것이라는 것을 명확히 보여주는 것뿐일까.
바람이 분다. 이 문장에서 조금도 나아갈 수 없다. 괄호 안은 여전히 텅 비어 있고, 그 ‘없음’에 말을 건네려 애쓰는 내가 측은하다. 그러나 ‘있음’에 대한 믿음의 감각은 여전히 나를 고양시킬 것이다.
(2015. 3. 25 바람 부는 사이공 강 옆에서)
5년이 흘러도 괄호 안은 비어 있다. 괄호에 꼭 무엇을 채워야 할까. 바람이 + 분다. 이 간결한 진술을 그저 간결하게 세워두면 안 되는 건가. 괄호 안을 비워두고 누군가 괄호 안에서 내가 했던 하릴없는 감각 놀이를 그만의 경험과 상상으로 펼친다면, 그 문장은 나름의 역할을 다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 이러한 놀이터를 제공하는 ‘공간으로서의 시’를 생각한다.
“바람이 분다.”
이소라는 ‘바람이 분다’라는 노래를 만들었고, 폴 발레리는 자신의 시 ‘해변의 묘지’에서 "바람이 분다…살아야겠다"라고 말했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Le vent se lève... il faut tenter de vivre
세찬 바람은 내 책을 여닫고,
L'air immense ouvre et referme mon livre,
(…)
날아라, 온통 눈부신 페이지들이여
Envolez-vous, pages tout éblouies!
- 폴 발레리, ‘해변의 묘지’ 중에서
Le Cimetière marin , Paul Valéry
나는 간신히 듣고 읽을 뿐이다. 입은 좀처럼 벌어지지 않는다.
다행이다. 눈과 귀는 조금 열려 있어서.
(2020-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