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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럼에도 불구하고 Aug 12. 2024

수평선과 동그라미에 관한 사유

임소담 개인전, <Horizon — 수평선>에 부쳐

도무지 갤러리(같은 장소)가 있을 것 같지 않은 곳. 지하철 9호선 선유도역 근처. 창고와도 같은 건물을 개조해 만든 Hall1. 바로 옆 건물에 붙어 있는 문구가 인상적. 드라이 아이스 - 팔렛. 닫힌 문에 붙어 있는 전시 포스터가 없었다면 아무도 이곳을 전시 공간이라고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예상치 못한 외관, 흥미로운 공간.

재는 손, 18x18x9cm, 도자, 2024

전시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오른쪽 벽면 위에 전시된 작품. ‘재는 손 (Measurer)’.​

 

물거울  Mirrored water, 181.8x227.3cm, 캔버스에 유채, 2024


​주요 작품으로 보이는 ‘물거울’. ‘반영’에 대한 사유. 오리의 형태(로 짐작되는 자리)를 빈 공간으로 표현했다. 오리를 ‘그린 것’이 아니라 오리일 수도 있는 대상을 여백으로 남겨 놓은 것이 아닐까.

다듬는 손, 17x9x6cm, 도자, 2024

입구에 들어서자마 보이는 ‘재는 손’에 이어 ‘더듬는 손’(Tamer). 손 시리즈의 제목을 이어 보면 배치의 의도를 가늠해볼 수 있지 않을까.

연못 The pond, 130.3x130.3cm, 캔버스에 유채, 2024

연못(The pond)이라는 제목을 가진 작품이 벽면 위쪽에 배치되어 있다. 선과 (특히) 원의 형상을 눈여겨보게 된다.

두 달 Two moon, 181.8x227.3cm, 캔버스에 유채, 2024

또 다른 대형 작품. 가장 인상적으로 본 작품이기도 하다. 수평선,이라는 주제와 조응하며 두 개의 달을 암시하는 (물에 비친) 두 개의 달그림자를 표현했다. 그러나 (우리가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달(의 형태)은 보이지 않는다. 희미하게 흘러내리듯 세로의 선으로 처리한 자리에 달의 위치가 있으리라는 짐작만 가능할 뿐. 재미있는 점은 또 있다. 세로선을 달의 은유라 해도. 두 개의 달이므로, 물에 반영된 달빛에 걸맞는 위치에 또 다른 세로선이 있어야겠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 이런 식의 의도된 어긋남. 달의 실재에 대해 생각해보게끔 하는 그림. 달빛을 반영하는 두 개의 반짝임. 달은 두 개일수도. 한 개일 수도. 여러 개일 수도. 아예 부재하는 것일 수도 있다.

잔돌 Father and pebbles, 115x105cm, 캔버스에 유채, 2024

역시 물의 반영성이 드러나 있다. 한국어 제목은 잔돌,이지만. 영어 제목은 사뭇 다른 뉘앙스를 준다. 돌의 형상은 다양한 둥근 원으로 처리되어 있다. ‘동그라미’에 대한 작가의 생각을 짚어보지 않을 수 없다. 옆에 나란히 걸린 ‘포도’라는 작품은 ‘동그라미’에 대한 작가의 사유를 드러내는 쌍둥이 그림처럼 보인다.

포도 The grape, 45.5x45.5cm, 캔버스에 유채, 2023

물의 반영은 ‘유동성’을 표상한다. 유동하는 일련의 흐름은 시간과 공간을 동시에 아우른다. 임소담 작가에게 형상 혹은 실재를 포착하는 일은 동그라미를 그리는 일과 다르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전시에 부친 작가노트 중 인상적인 일부를 옮겨본다.

“오래 전의 동그라미를 떠올리며 캔버스 앞에 서 있다. 내 눈앞의 동그라미는 미묘하게 연결된 변주를 해가며 내 삶을 가로지르고 있다. 돌탑의 돌이자 손안의 흙덩이이고, 할머니가 꿈에서 건넨 포도, 파도를 기다리는 서퍼의 눈동자, 강아지의 공, 연잎이고, 혹이며, 열매다. 캔버스 표면 위의 동그라미는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이다가 어느새 모서리에 닿는다. 모서리로부터 수평선이 만들어지는 것을 우연히 본다.

(…) 작업하며 시골길을 종종 걸었던 작년에는 주로 개울가와 내렸던 비가 고인 낮은 웅덩이 모양의 물거울에 눈길이 머물렀다.

(…) 광활한 바다나 사막을 가로지르는 선에 대해서 생각하다 보니 새삼 신기하다. 분명히 존재하지만 정해진 자리에 위치한 선이라고 할 수 없다는 점에서 말이다. 시각적으로 이렇게 또렷한데 유동적이고 관념적이다. 그러고 보니 지구에서 보는 수평선은 거대한 동그라미의 일부가 아닌가!

선명하게 보이는 것 너머에 명확하지 않은 것을 담아보고 싶다는 마음을 오래 품다가 수평선을 보아서 그런지, 마치 나의 그리기와 닮은 면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 한편으로는 이 모든 시각적인 흔적들은 영원히 손에 잡히지 않을 수평선-거대한 동그라미를 향해 움직이는 손짓의 집합이다.”

오월 May, 162.2x130.3cm, 캔버스에 유채, 2024

‘오월’은 물거울, 동그라미, 수평선의 이미지가 비교적 명료하게 담긴 그림이다. 수평선을 거대한 동그라미로 치환하는 과정에서(정말 그렇지 않은가!) 작가는 닿을 수 없는(닿고자 할수록 멀어지는) 수평선에 대한 사유를 실재에 대한 사유로 겹쳐놓는다. ‘선명하게 보이는 것 너머의 명확하지 않은 것을 담아보고 싶다’는 마음은 포착할 수 없는 실재를 포착하고자 하는 마음과 다르지 않다. 이를 고스란히 담은 작품이 (전시 제목과 일치하는) ‘수평선’이라는 작은 그림이 아닐까.

수평선 Horizon. 27.3x40.9cm,  캔버스에 유채, 2024

가로로 펼쳐진 붓질을 바탕으로 ‘분명히 존재하지만 고정된 실체로서의 선으로 존재하지 않는 수평선’이 가시화된다. ‘유동적인’, ‘고정되지 않는’, ‘모호한’, ‘불명확한’ 등과 같은 형용사는 실재를 수식하는 말들의 목록이다. 가로로 움직이는 붓질의 방향은 일련의 시간적 공간적 흐름을 상기시키고, 그 흐름을 일시 멈추게 하는 듯한 미세한 세로 방향의 붓질은 ‘명확하게 포착할 수 없는 것’을 포착하고자 하는 작가의 몸짓을 대변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세로 방향의 (흘러내리는 듯한/예기치 못한) 붓의 흔적은 앞서 보았던 작품 ‘두 달’에 나타나는 (하늘로 구획될 수 있는 그림 상단에 표시된) 희미한 세로줄과 같은 맥락에 놓인 것이 아닐까. 작가는 ‘달’이라는 대상을 명확한 실체를 가진 무엇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선명하게 보이지만 명확하게 포착할 수 없는 너머의 존재’로 바라보는 것 같다. 그런 점에서 ‘두 달’은 마치 ‘부재하는 실재’의 효과를 물에 비친 형상으로 가시화한 것처럼 보인다.

위: 땅거미 Sun down, 130.3x130.3cm, 아래: 일몰 Nightfall, 130.3x130.3cm, 두 작품 모두 캔버스에 유채, 2024

위 아래로 걸려 있는 이 두 작품 역시 ‘물거울’의 연작처럼 느껴진다. 물에 비친 반영을 (작가의 표현을 빌어) ‘물거울’이라는 말로 수렴한다면, 이 ‘물거울’이야말로 ‘수평선’에 가닿기 위한 작가의 방법론적 키워드라 할 만하다. 그 방법론을 구현하는 과정에서 원의 형상은 중요하다. 땅거미 혹은 일몰의 풍경 속에서 드러나는 ‘수평선’의 형상은 작은 ‘동그라미’의 형태로 응축되어 나타난다.

‘동그라미’에 대한 사유는 ‘수평선’과 더불어 전시의 한 축을 구성한다. 2층의 작은 공간으로 올라서면 ‘우물’이라는 작품을 중심으로 여러 개의 손 조형물이 전시되어 있다. 수평선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실행되는 ‘동그라미 그리기’의 결과물로서 산출된 작품들과, 그 ‘그리는 작업’을 가능케 하는 물리적 조건으로서의 신체를 형상화하는 ‘손’의 연작을 병치시키려는 작가의 의도가 전시 공간의 배치를 통해 드러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

 

우물 The well, 162.2x130.3cm, 캔버스에 유채, 2024

 

2층 공간에 전시된 ‘손’ 연작.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집는 손 Pincher, 흘리는 손 Spiller, 돕는 손 Helper, 마는 손 Roller

작가가 손 연작에 붙인 제목을 임의적으로 이어보면 다음과 같다. 재는 손 - 다듬는 손 - 드는 손 - 집는 손 - 흘리는 손 - 마는 손 - 돕는 손. 이 손들은 작가가 작품을 제작하는 과정을 드러내는 메타적 시선의 형상화가 아닐까. 작가와 사물-대상 사이의 공간을 탐색하는 과정에서 출현하는 어떤 ‘보이지 않는 것(정신적인 것, 상상의 영역)’을 가시화하는 작업과 그 과정 자체에 대한 사유를 가시화하는 작업의 양립이라고나 할까. 어쩌면 임소담의 이번 전시는 이 ‘이중의 가시화’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런 맥락에서 작가가 작가노트에 붙인 ‘동그라미, 수평선, 실패하는 손짓’이라는 제목은 의미심장하다. 작가의 지향점(수평선), 방법론(동그라미), 과정에 대한 메타적 사유(실패하는 손짓)를 동시에 드러내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얼마 전 우연한 계기로 임소담 작가의 짧은 글을 읽을 기회가 생겼다. 어떤 작품에 부치는 단상이었는데, 그때 나는 "주황색 동그라미를 그렸는데, 결국 이 원을 그리기 위해서 그림 전체를 그린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라는 문구에 잠시 머물렀다. “그림을 그리게 만드는 힘과 작업에 마침표를 찍어주는 마음속의 감각에 대해서 생각했고, 이것을 주제로 작업하고 싶었다”라는 문장도 눈여겨보았다. “그동안 그림을 그리면서 수많은 동그라미들을 만났지만 모든 동그라미는 이전의 동그라미와 같지 않으며 새로운 의미를 끊임없이 형성시켜간다"라는 문장도. 밑줄을 긋고 싶은 마음이 들기까지 한다,는 피드백을 작가에게 전달하기도 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이번 전시에 부친 작가노트의 첫 문단이 인상적으로 다가오지 않을 수 없었다.

“오래전 그린 그림 속에서 오렌지색 동그라미를 보았을 때, 어쩌면 이 동그라미를 그리기 위해 그림 전체를 그린 것은 아닐까 생각한 일이 있다.”

“동그라미를 만나는 것이 그림을 그리는 목적인 것 같다”는 작가의 말에서 다양한 층위의 관점을 추출해볼 수 있겠지만 나는 ‘시적 태도’라는 키워드로 작가의 세계를 이해하고 싶다. 동그라미를 만나는 것에 대한 기대는 그림 그리기를 추동하는 힘이 되면서도, 쉽게 잡히지 않는 동그라미를 붙잡기 위해 끝없이 다가서는 움직임은 실패가 예정된 몸짓이기도 하다. 실패할 것을 알면서도 수평선(실재)을 담기 위해 자신의 신체를 매개로 움직이는 것. 그 과정에서 수없이, 무한한, 그리고 불완전한 동그라미를 그리는 것. 실패 자체를 사유하는 메타적 시선을 통해 다시 시작해보는 지점을 마련하는 것. 시적 태도란 그런 것이 아닐까. 자기와 세계 사이에서 서로를 반영하고 서로에게 얽혀들고 스며드는 과정을 붙잡아두려는 자세. 탐색의 의지. 그 의지의 일환이 (이번 전시에서는) ‘수평선’으로 표상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

‘수평선’이라는 동명의 제목으로 강남의 봄화랑에서도 또 다른 작품들을 8월 16일까지 전시한다고 한다. 마침 화랑 근처에서 약속을 잡은 날이 있어 조만간 여기도 들러볼 생각이다.

(2024-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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