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평선’ @봄화랑
지난 주. 임소담의 개인전이 열리고 있는 또 다른 장소인 봄화랑에 들렀다. 일면식 한 번 없는 미술작가의 전시를 연달아 두 번이나 찾은 적이 있던가. 무엇에 끌리는 걸까.
아주 작은 공간. 5점의 그림. 그럼에도 예상한 시간보다 좀 더 오래 머물렀다.
전시장엔 아무도 없었고. (그리고 의자가 있었다!) 작가의 예전 전시를 볼 수 있는 도록이 (친절하게) 놓여 있어서. 혼자 의자에 앉아 찬찬히 그리고 곰곰이.
왜 끌릴까. 아무래도 '물'이라는 모티프 때문인 것 같다는 개인적인 결론. 특히 '수면'이라는 이미지가 불러오는 다양한 층위의 단어들이 호출되면서. 나의 오랜 관심사(이자 키워드)들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어서. 예컨대. 수면이 주는 어떤 경계의 영역. 표면과 심연 사이. 혹은 반영성. 거울. 고정되지 않음. 흐름. 유동성. 흔들림. 꿈. 무의식과 의식 사이.
물질적 표면으로서의 수면(水面)은 나로 하여금 잠이라는 수면(睡眠) 상태를 연상케 한다. 이는 동시에 의식과 무의식 사이의 반수면(半睡眠) 상태와 연결되고. 이는 다시 내가 지향하는 상태인(상태였던) 바슐라르식의 '몽상' 개념과도 연결되는 듯. 이제는 다소 고리타분한(할 수도 있는) '질료적 상상력'으로서의 물과 꿈을 생각해서일까.
실제로. 도록에서 임소담 작가의 이전 작품을 살펴보다 '물 꿈(Dream of Water)'이라는 제목의 그림을 발견했을 때. 멈추어 들여다보는 동시에(매력적인 그림이다) 바슐라르의 <물과 꿈>이 떠오른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버드나무'나 특히 '여름 정원'을 보면서, 모네의 수련에 부치는 바슐라르의 글('수련 혹은 여름날 새벽의 놀라움', <꿈꿀 권리> 중에서)이 떠오른 것도. (혹자는 구닥다리 감성이라고 할지도 모르지만.)
‘재현하지 않음'은 현대미술의 주된 경향이지만. 구상과 추상 사이에서 '재현하지 않는 재현'에 대한 사유를 작가 자신의 고유한 방법론으로 연결하는 지점을 살펴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임소담의 방법론이 흥미롭게 느껴졌던 것은, 사진 촬영을 통해 기억 혹은 과거의 이미지를 호출하면서도 사진 이미지를 세워두고 이를 다시 재현하는 방식은 거부함으로써, 지금-여기 작가가 작업하는 과정에서 그 기억-이미지에 대한 상상력을 새롭게 작동시키는 데에 무게중심을 맞추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마치. 꿈속의 장면을 포착하기 위해 (꿈과 깨어 있음 사이의) 반수면 상태에서 꿈을 기록하는 안간힘과도 유사하다. 유동하는, 난삽한, 모호한, 산발적인, 알 수 없는 이미지들을 어떻게든 상징적 언어로 붙들어매기 위해 눈을 뜨기 직전(눈을 뜨는 순간 휘발될 것을 알기에) 의식적으로 꿈의 내용을 복기하는 경계성 작업이라고나 할까. 물 속(수면 아래)에서 물 바깥(수면 위)으로 나가기 직전 물 속 풍경을 조금이라도 더 담으려는 몸짓이랄까. 이는 꿈 노트를 적기 위한 나의 습관이기도 한데. 나는 이를 '의도적 반수면 상태'라 부른다. 어쩌면 임소담의 사진 찍기(혹은 기억-촬영)는 이 '의도적 반수면 상태'와 같은 것이 아닐까. 꿈의 이미지를 실제로 촬영하는 것은 불가능하기에 나는 하릴없이 희미한(때로는 더할 나위 없이 또렷한) 이미지 조각들을 언어로 번역하고, 번역하는 과정에서 작동하는 (해석을 동반하는) 상상력이 좀 더 자유롭게 뻗어나갈 수 있도록 길을 터줄 뿐이다. 한때 나는 이런 식으로 시를 쓴 적도 있다. (나는 이를 '꿈 시'라 이름 붙였다. 꿈 시 1, 꿈 시 2, 꿈 시 3... 이런 식으로.) 언어로 번역되는 것과 그림으로 번역되는 것의 차이일 뿐이라고 한다면 지나친 단순화일까. 막상 번역된 언어(그림)를 펼쳐놓는다 해도 그것이 현실의 풍경을 재현한 것처럼 선명할 리는 만무하다. 그 기억-이미지(언어-이미지 또는 그림-이미지)는 늘 흐릿하고 흔들리고 희미하게 무언가를 비추고 있을 뿐이다. 그 무언가는 염두한 사물 대상일 수도, 예기치 않게 포착된/끼어든 우연한 형상일 수도 있다. 마치 수면(水面)에 일렁이는 그림자처럼.
코로나로 집 근처 천변을 매일 걷던 때, 나는 물에 비친 풍광을 자주 찍곤 했다. 그 행위의 연속성에 대해 깊게 생각해보지는 않았지만. 실제 대상과 물에 비친 이미지를 함께 포착하는 통상적인 수직적 대칭 구조보다는, 물 표면에 맺힌 상의 형태나 색감 자체에 좀더 흥미를 느꼈던 것 같다. 물, 꿈, 반영 혹은 거울과 같은 단어에 끌리듯, 이러한 말이 시각적으로 구현된 듯 보이는 이미지에 끌렸는지도 모른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임소담의 그림들 앞에서, 그리고 작가가 실제로 예전 전시 제목으로 붙인 '물거울'이라는 단어 앞에서, 나는 새삼 '반수면' 혹은 '물 꿈'이라는 단어를 추스리게 된다. 어쩌면 내가 말을 얹고 싶어하는 (예술작품) 대상들을 관류하는 키워드 혹은 나만의 (개똥)예술론은 이 '반수면'에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에까지 이르게 된다.
예술론이라니. 이 거대한 단어를 사적으로 남용해도 되는 걸까. 앞에 ‘개똥’이라는 수식어를 붙인 것은 나의 소심한 제스처. 실제로 ‘반수면’ 운운하는 나의 (지극히)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접근은 ‘론’이라는 이름으로 작가의 세계를 수용하기엔 터무니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임소담이라는 작가의 예술관과는 하등 관계가 없는 일인지도 모르고. 어쩌면 이러한 태도는 이동휘와 이여로가 쓴 <시급하지만 인기는 없는 문제: 예술, 언어, 이론>이라는 (몹시 흥미로운) 책의 영향 때문인지도. 예컨대 이런 것.
하지만 내가 ‘예술은 사적이다’에서 이미 밝혔듯이 예술이론의 경우에는 이론 대상 즉 예술이 "사적-해석적 존재”이기에, 예술이론성의 대안적 기준이 필요하다. 예술에 대한 박식함만으로는 독자가 해당 예술이론의 이론성을 경험할 수 없다.(161쪽)
혹은
예술이 “공적-사물적 존재”가 아니라 “사적-해석적 존재”라면, 예술이론은 어느 시점에 예술이론으로 태어나는가?(153쪽)
물론 나는 이 책 역시 내 멋대로 오독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전인수격. 그렇다면 내친 김에 또 다른 아전인수격 인용을 들어보자면. 그레이엄 하먼의 <비유물론> 중 한 구절.
최고의 예술 비평가들이 암시적이고 비유적으로 글을 쓴다면, 그 이유는 그들이 '안이한 신비주의자'이거나 비합리적인 사기꾼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주제가 바로 그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훌륭한 글은 (…) 그 주제를 명시적이고 검증 가능한 성질들의 다발로 대체하기보다는 오히려 살아 있게 하는 생생한 글이어야 한다. 때때로 우리는 사물을 단지 비유적으로 드러낼 수 있을 뿐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사물에 이르는 통로로서 직서적으로 정확한 술어보다는 오히려 역설을 추구하게 된다.
- 그레이엄 하먼, <비유물론>, 김효진 옮김, 갈무리, 83쪽
위의 두 책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흥미로운 텍스트여서 몇 년 전 퍽 재미있게 읽었던 터라. 언젠가 말을 얹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늘 그렇듯) 기약 없는 보류 상태.
때로는 망설임이나 보류를 강렬히 거부하고 싶은 때가 있는데. 아마도 지금이 그러한 듯. 또 알겠는가. 언젠가 이번 잡문을 계기로 각 잡고 앉아서 ‘임소담의 작품 세계’ 운운하는 모종의 작가론을 써보게 될지.
알 수 없는 것은 알 수 없는 대로 일단 놔두기. 되어가는 대로 쓰고, 되어가는 대로 되어가는 것. 요즘 나의 삶의 태도.
(2024-8-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