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어가는 대로, 되어가기

고통이 지나가는 방식 (feat. 바람이 지나가는 길)

by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람이 몹시 분다. 바람에 저항하다시피 혹은 바람에 떠밀리다시피 걷는 것도 그새 익숙해졌다. 바람 많은 섬나라 대만, 특히 내가 사는 타이베이 티엔무 지역은 유난히 거센 바람으로 유명하다. 나의 중국어 선생이자 대만인 친구인 펑리(彭凌)는 '바람이 지나가는 길'이라는 뜻의 한자를 가르쳐주었다.


펑꿰이코우(風櫃口). 그 유래를 생각하면 ‘바람을 만들어내는 길목’에 더 가깝다.



# 펑리와 함께하는 '되는 대로' 중국어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 오전은 펑리와 중국어 수업이 있는 날이다. 말이 중국어 수업이지, 실상은 중국어를 빙자한 자유로운 토론 시간에 가깝다. 어쩌면 내가 바란 것도 이런 종류의 (성인과의) 대화였는지 모른다. 주제는 참으로 다양하고도 종잡을 수 없이 뻗어 나간다. 말 그대로 꼬리에 꼬리를 무는 토크 방식이다. 수다에 가깝지만 신변잡기나 루머는 들어설 여지가 거의 없다. 중국 역사, 노자와 장자, 양안관계(兩岸關係), One China Policy (一中政策), (대만의 뜨거운 감자인) 동성결혼 합법화, 제국주의와 식민지, 쇼비니즘(沙文主義)부터, 고고학, 지리, 건축, 철학, 종교, 교육, 기타 다양한 관습과 문화에 이르기까지. 그나마 현지 정보라 할 만한 것은 대부분 박물관 아니면 도교나 유교 사원, (역사적 의미를 갖는) 공원이나 건물 등이다.


불과 두 달 남짓한 기간 동안 우리는 미묘한 동류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이야기를 나누다가 우연히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가 등장한다. 책 속에서 잠깐 언급되고 지나갔을 뿐인 ‘네안데르탈 인’에 대한 나의 관심과 흥미에 펑리가 적극적으로 호응한다. ‘기원(起原)’과 ‘뿌리(根)’에 대해 둘 다 하고 싶은 말이 많다. 우리는 작년 가을 출간된 <사피엔스의 미래>도 이야기한다. 그녀의 관심 분야를 묻는다. 공통 분모를 여럿 알게 된다. 펑리의 집은 바닥부터 천장까지 책이 쌓여 있어 그녀 어머니가 늘 불평한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지진이라도 일어나면 제일 먼저 책에 깔려 죽을 판이라는 것.


나는 그녀를 중국어 선생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녀 역시 나를 중국어 배우는 학생으로 대하지 않는다(고 느낀다). 사실 우리가 나누는 대화는 90 퍼센트 이상 영어로 이루어진다. 어쩌다 흥미로운 단어나 표현에 이르면 그제야 한자가 등장한다. 특별한 교재도 없다. 특정 한자어로 시작되어 그것의 유래, 관련 역사, 연계하여 방문해볼 장소 등이 스토리 텔링 방식으로 이어진다. 나는 계속 질문한다. 나의 질문에 답하기 위해 그녀가 노트에 적어주는 중국어, 그게 다다.


# 솥에서 도덕경까지

예컨대 이런 식이다. 대만의 대표 음식점 딘타이펑(鼎泰蘴)의 ‘딘(鼎)’ 글자가 늘 나의 시선을 끌어왔다. 분명 상형(象形) 글자일 테고 어디선가 집중적으로 본 글자이다. 솥,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는 것 정도만 안다.

이 글자로 촉발된 꼬리 물기는 그 유래인 고대 중국 왕조로 곧바로 소급되고, 세 발 달린 청동 솥의 의미와 변천, 미적 가치, 유물, 그 유물이 전시되어 있는 박물관으로 연결된다. 그러고 보니, 대만고궁박물관의 상설 전시장 중 상당 부분이 이 ‘鼎’(caldron으로 영어 번역된)을 전시하는 데 할애되었다는 점을 상기하게 된다.

중국의 고대 왕조를 짚어 나가다 보니, 춘추전국시대에 방점을 찍게 되고, 백가쟁명(百家爭鳴)과 함께 공자, 맹자, 노자, 장자가 자동으로 따라 나온다. 나는 마침 중국사와 중국 철학사에 대한 책을 읽고 있었다. 언젠가 노자와 장자를 원문으로 읽어보고 싶다는 이야기를 그녀에게 흘린다. 그녀는 내게 우선 노자의 <도덕경道德經> 원문을 조금씩 읽어볼 것을 권한다…… 뭐 이런 식이다. 鼎으로 시작되어 道德經으로 끝난다. 솥에서 도덕경까지, 한 시간 반에서 두 시간 남짓한 시간은 놀랍도록 빠르게 지나간다. 그렇게 되어가는 대로.


# 고통도 되어가는 대로

되어가는 대로. 나는 이 말을 알게 모르게 많이 쓰는 듯하다. 되어가는 대로 따라가다 보면 드문드문 나의 되어가는 꼴을 보게 되기도 한다. 되어가는 대로, 라는 말 속에서 (부정적 의미의) 수동성 혹은 의지 박약을 떠올릴 필요는 없다. 이것은 ‘순리(順理)'라는 말에 더 가까운 듯하다. 순리를 지향하는 것이 꼭 자유의지의 결핍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테니까.


지난 5년의 시간을 요약해보면 '되어가는 대로 되어가기'였다. 그것은 완료되지 않은 진행형 의미를 품고 있으나 딱히 목적을 염두에 둔 정연한 과정도 아니었다. 그저 우연과 필연, 수용(受容)과 분별(分別), 체념(諦念)과 의지(意志), 유위(有爲)와 무위(無爲)가 무수히 교차하며 그려내는 종잡을 수 없는 선들의 연속이라고 할까. 그 산만한 선들이 저들끼리 가닥을 잡아가며 하나의 방향성을 지닌 채 나아가는 여정에 가깝다고 해야겠다.


며칠 전 동네 서점 ‘한국어 코너’에서 <이준기와 함께 하는 한국어>를 보았다. 기본 단어와 간단한 회화 중심으로 이루어진 기초 한국어 교본이다. 지난 해, 나 또한 비슷한 패턴의 중국어 교재를 사용했다. 소위 ‘빡세기’로 소문 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유명 대학 어학 센터에서 한 학기 동안 ‘뼈빠지게’ 공부도 해보았다. 그것은 빠른 시간 내에 중국어를 집중적으로 배우고 싶은 열망이라기보다, 심리적 혼란 상태를 벗어나기 위한 나름의 ‘환기’ 혹은 ‘몰두’ 처방에 가까웠다. 그렇게 되려고 그랬는지, 평소 학원이나 학교(일정 시간에 정해진 학습 내용을 강제적으로 습득해야 하는 시스템)에 대한 거부감이 먼저 사라지더라. 일반 학원보다 훨씬 번거롭고 귀찮은 지원 과정까지 기꺼이 감수하며 원서와 제반 서류(대학졸업증명서에 현지은행잔고액까지)를 제출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살려고.


나는 무척 열심히 공부했다. 아니, 학습했다. 읽고, 쓰고, 외우고, 시험 준비하고. 매일 받아쓰기, 매주 단원 테스트, 정기적 구두 발표, 중간 고사 파워포인트 프리젠테이션, 총정리 기말 지필 고사 등등. 정규 학교 교육 외에 학원이라는 것을 제대로 다녀본 적이 없는 40년 남짓 인생을 통틀어 가장 열심히. 그 무엇에라도 몰두하지 않으면 안 될 듯하여. 살려고.


# 중국어를 빙자한 모국어 공부

마음을 괴롭히는 생각으로부터 자의 반 타의 반 도피하는 시간이었으나 어쨌든 그 시간을 즐기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마음 한 켠으로는 애초 중국어를 배우고 싶었던 동기를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늘 미적지근하게 남아 있었다.


나는 모국어(한국어)의 기원을 더듬고 싶었고, 한자로 이루어진 대부분의 (응축된) 관념어들을 해체하여 내 나름의 방식으로 살펴보고 재구성하여 나의 ‘언어’로 체득하고 싶었다. 마음을 조금이라도 스치는 한자를 만나면 그날의 화두로 삼아 이리 살피고 저리 생각해보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던 것. 전형적인 언어 학습동기(전공, 취업, 비즈니스, 현지적응, 사교, 그것도 아니면 시간 때우기)가 사실 내겐 없었다. 중국어를 배우려는 목적이나 동기를 묻는 면접관에게 나는 그저 “한자가 좋아서(我喜歡漢子)”라고밖에 답할 수 없었다. 실은, (한자를 매개로) 모국어를 더 깊이 있게 이해하여 내 언어 창고를 보다 풍요롭게 만들고, 더 나아가 제한된 사고의 지평을 넓히고 싶다,는 야심(?)을 전하고 싶었으나 중국어로 표현할 수 있는 수준은 ‘나는 한자가 좋아요’ 딱 거기까지였기에.


그렇게(자기 강제에 힘입어) 되어가는 대로 지내다 보니 언어의 기본적인 틀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고, 무엇보다 그 시간만큼은 정신을 딴 데 팔 수 있어 좋았다. 정신적 진통제라고나 할까. 동시에 아슬아슬했던 허리 상태는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었다.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것이 있는 법. 아쉬운 대로 정신적 진통제를 찾은 대신, 나는 육체적 진통제가 필요한 지경에 이르렀다. 그렇게 되어가는 나의 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우연히 개인 교습 기회가 찾아왔고 그렇게 펑리를 만났다. 여러 가지 변수와 우연과 희망사항이 교차하며, 일이 그렇게 되어간 셈이다.


어쩌다 만나는 주변 이웃들은 내가 펑리와 하는 수업 방식에 대해 딱하다는 듯이 말한다. "그렇게 해서는 전혀 중국어가 늘지 않아요”라거나, “내가 이것 저것 다 해봐서 아는데 이런 방법을 써봐요”라거나, “내가 잘 가르치는 사람 소개시켜줄테니 한번 만나볼래요?”라거나.


상관없다. 비로소 나는 만족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에. 되어가는 대로 되어가는 중,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비단 중국어(라는 명목)뿐 아니라, 나의 몸 활용법, 마음 활용법에 관한 문제까지.


# 바람이 지나가는 곳, 고통이 지나가는 곳

최근 나는 펑리의 야심 찬 프로젝트를 알게 되었다. 자신의 뿌리를 찾아(펑리는 타이베이 지역의 원주민들 중 한 부족의 후손이다) 잊힌 역사적 사실을 들추어보고 이를 대중과 공유하는 것. 역사를 전공한 그녀는 미국으로 건너가 대학에서 언어와 문화 관련 강의를 맡고 있었는데 우연한 계기로 자신의 증조 할아버지가 그 부족의 족장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이를 역사적으로 추적하고 고증하기 위해서 그녀는 과감히 미국 생활을 접고 대만으로 돌아온 것이다. 지난 5년간 그녀가 몰두해온 이 독특한 (그러나 내게 특별한 울림을 주는) 프로젝트는 단번에 나를 매료시켰다. 타이베이 시 정부로부터 지원을 받아 인터뷰 형식의 짧은 다큐멘터리 필름도 제작했고, 조만간 (온천으로 유명한) 베이터우 지역의 원주민박물관에서 전시도 열 예정이라고 했다. 자신의 기원을 밝히려는 그녀의 집념과 노고는 알렉스 헤일리의 소설 <뿌리>를 연상케 할 정도로 인상적인 것이었다.


그간 그녀의 여정을 가만히 경청하며 나는 다시 떠올린다. 되어가는 대로 되어가기,에 대하여. 그 안엔 동기와 계기, 우연과 인연, 의지와 추진, 잠재성과 발현, 난관과 해결 등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머지않아 나는 그녀의 전시에 가볼 것이고, 세미나에도 참석할 것이다. 그렇게 되어가는 사이, 나에게는 또 어떤 자극과 영향과 심리적 동인이 불어올 것인지, 그리하여 어떻게 저항하다시피 혹은 떠밀리다시피 바람을 탈 것인지, 궁금해진다.


바람이 지나가는 곳. 나는 자꾸 '바람'을 '고통'으로 바꾸어 읽는다. 고통이 지나가는 시간과 공간.


그러고 보니, '바람이 지나가는 길'은 '바람이 없는 곳'보다 매력적이다. '바람을 만들어내는 길목'이라면 그 의미가 한층 더 짙어질 테고. 바람이 있어야 돛도 펄럭일 것이고, 그래야 무엇이든, 되어가는 대로 되어갈 수 있을 테니 말이다.


(2017)


https://youtu.be/QpUWSyFFdG0

히사이시 조의 바람이 지나가는 길 Path of the Wi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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