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기쁨을 연습하다

6개월 만의 기쁨 실천 연습: 타이베이 동네 유람기


달라이 라마와 투투 주교의 책 <기쁨의 발견>을 발견한다. 기쁨을 발견하기 위해 갖추어야 할 여러 가지 자질들이 눈에 들어온다.


관점, 겸손, 유머, 수용, 용서, 감사, 연민, 그리고 베풂. 특히 현명한 이기심으로서의 베풂,이라는 문구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 반복을 알아차리는 기쁨

오늘 아침, 나는 오랜만에 ‘기쁨’을 발견한다. 유난히 따뜻해진 날씨 덕분일 것이다. 온화한 이른 아침의 공기와 파릇한 나뭇가지, 맑고 파란 하늘, 명랑하게 떠 있는 구름, 휘파람 불듯 길게 소리를 내는 이국적인 새 소리, 커피를 사러 가는 발길과 동선, 그 모든 것이 낯익은 반복이다. 그 낯익은 반복을 경험하는 나, 그러한 내가 있는 이 시간과 장소를 '알아차린다'는 것 자체가 내게 작은 기쁨을 준다.


# 알아차리기 1 - 동네 사람들

사거리 코너에 자리한 카페에서 책을 읽는다.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는 것인가, 책을 읽으며 커피를 마시는 것인가. 혹은 두 가지 행위를 빌어 생각을 하고 싶은 것인가. 익숙한 동네 주민들이 보인다. 일면식 한번 없으나 어느새 익숙해진 얼굴들이다. 책 읽는 것을 멈추고 그들을 바라본다. 거의 매일 그들과 마주쳤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늘 같은 자리에 앉아 기침을 해대며 신문을 읽는 할머니. 지난 번 1면 톱은 대문짝 만한 박근혜 사진이 장식했다. 어느 날은 삼성, 어느 날은 이재용. 한국 정치와 경제 이슈를 민감하게 다룬다는 이곳 대만 미디어의 특성을 체감한다. 할머니는 오늘따라 유난히 기침이 심하다. 천식이 있거나, 기관지가 좋지 않은 모양이다.


늘 같은 자리에 앉아 옛 전화번호부를 연상케 하는 두툼한 영어 원서를 읽는 아주머니. 허름한 등산복 차림에 아무렇게나 묶은 머리. 늦깎이로 공부하는 사람일까, 아니면 학계에 있는 사람일까. 어느 날엔 남편으로 보이는 나이 지긋한 남자가 잠시 들러 격려하듯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늘 창가에 마주 앉아 있는 젊은 남녀 커플. 매일 바뀌는 세련된 운동복 차림. 그러나 둘이 대화를 나누는 것은 거의 본 적이 없다. 커피와 베이글로 아침을 해결한 후 요지부동 각자의 핸드폰에 얼굴을 박고 있기 때문이다.


구석 자리를 선호하는 어느 젊은 남자. 강호동을 연상시키는 풍모. 늘 컴퓨터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꼼짝 않고 앉아 있다. 어느 날 우연히 본 그의 스크린은 게임 화면. 허구한 날 그렇게 게임만 하는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 알아차리기 2 - 거리에서

천천히 커피를 마신 후 거리로 나선다. 어느새 후덥지근해진 거리를 걷는다. 곧게 허리를 펴고 걷는 나의 몸을 알아차린다. 걸으면서, 운전하며 지나갈 땐 보이지 않았을 세밀한 풍경을 관찰한다. '매튜의 선택(Matthew's Choice)'이라는 독특한 이름의 요거트 브랜드가 우리 동네에 단독 매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도 처음 알게 된다. 분명 저 가게를 여러 번 지났을 텐데. 며칠 전 우연히 그 브랜드의 요거트를 직접 맛보았기에 이제야 눈에 들어온 것이 틀림없다. 아는 만큼 보이고, 맛본 만큼 보인다.


# 알아차리기 3 - 서점에서

동네에서 유일하게 외국서적을 파는 서점에 도착한다. 막 문을 열어 아무도 없는 서점 한 켠 의자에 걸터앉아 좋아하는 시리즈 책 여러 권을 뽑아 들고 훑어본다. 그 중 몇 권을 구입하기로 한다. 그리고 서고를 어슬렁거린다. 예전부터 찾던 관심 분야의 심리학 서적을 우연히 발견한다. 찾으려 해도 찾을 수 없었던 영어 원서가 딱 한 권 서고에 꽂혀 있다. 간절할 땐 보이지 않던 것을 이렇듯 무심한 순간에 우연히 만나게 되는 이 야릇한 生의 속성. 채우려 하면 채워지지 않고, 체념 후 비워진 자리에 우연히 채워지는 이 얄궂은 시간의 속성이라니.


계산대 직원이 내게 중국어로 뭔가를 설명한다. 또 다른 직원이 중국어로 내가 한궈 샤오찌에(韓國小姐:한국여성)이라 귀띔한다. 다음 달에 이 시리즈 전체를 15% 할인할 예정이니 참고하라는 말이다. 알량한 셈이 작동한다. 지금 살 것인가. 다음 달에 살 것인가. 하나의 경제적 개체인 나는 합리적 소비자인가, 합리적인 듯 보이지만 제한적 합리성(bounded rationality) 내에서 꼼지락거릴 뿐인 (소위 행동주의 경제학파가 바라보는) 인간인가. 나는 이미 골라든 책을 구입하기로 한다. 당장의 기쁨이 더 중요하다.


1978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그리고 장하준 교수가 '마지막 르네상스형 인간'이라 추켜세운 허버트 사이먼은 이렇게 말핬다.

"인간은 신고전주의 학파의 주장처럼 최선의 선택이 아니라 '최소한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선택(satisfice), 즉 '그만하면 괜찮은(good enough)' 선택을 하게 된다." - <장하준의 경제학 강의> 중에서


# 알아차리기 4 - 다시 집으로

불편한 목과 어깨를 추스르며 돌아오는 길은 아까보다 더 후덥지근하다. 햇살이 강렬하여 선글래스를 꺼내 쓴다. 커다란 교차로에 서서 매연을 뿜으며 연달아 지나가는 버스를 탐탁지 않게 바라본다. 처음 집을 나설 때 느낀 기쁨은 이미 퇴색되어 없다. 도톰한 카디건을 벗을까 말까 고민한다. 종잡을 수 없는 이곳 날씨는 기쁨과 당혹을 오간다.


대각선으로 길을 건너, 도교 사원을 지나, 시장 골목으로 들어선다.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있는 파스타 집을 지나며 흘깃 창 너머를 살핀다. 12시가 다 되어가는데 테이블이 많이 비어 있다. 들어가 점심을 먹을 것인지, 곧바로 집으로 향할 것인지 잠시 멈칫거린다. 12시 5분 전이다. 곧 사람들로 가득 찰 것이고, 아는 얼굴을 만나 번거롭게 인사를 해야 할 수도 있다. 가격도 비싼 편이다. 집으로 발길을 돌린다. 가볍게 챙긴다고 챙긴 가방도, 서점에서 구입한 책들도 한층 무겁게 느껴진다. 그렇게 나는 아침 나절을 보내고 집에 돌아온다. 집에 들어선 순간 알 수 없는 기쁨이 스친다. 집에서 나가는 순간엔 이탈과 활동의 기쁨을, 집으로 돌아오는 순간엔 안도와 휴식의 기쁨을 알아차린다.


# 기쁨 실천 연습

<기쁨의 발견>과 다시 마주친다. 책의 핵심 단어인 '기쁨 실천 연습'에 시선이 간다. 그 '연습'을 한 날이기도 하고 아닌 날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 연습은 오직 '순간'에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루'라는 연속적 시간의 덩어리 전체에 빠짐없이 적용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오늘 나는 또 다른 '기쁨'을 애써 발견했다. 작년 여름 이후 6개월 만에 처음으로 뭔가를 쓰고 있다는 것. 길면 길고 짧다면 짧은 그 시간 동안 많은 것이 힘들고 구차했으나 내내 얼얼한 쓰라림만 있었다고 할 수는 없다. 변화무쌍한 감정의 파노라마 속에 순간 순간의 기쁨을 몰랐던 건지, 모르는 척했던 건지, 아니면 가장 좋지 않은 상태 즉 고통이 주는'무감각' 속에 나를 내주었던 건지.


다시, 연습할 시간이다.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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