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보호 좌회전: 만일의 사태를 껴안는 선택

타이베이에서 운전하기


타이베이에서 운전을 시작한 지 한 달이 좀 넘었다. 베트남에서 지낸 지난 4년 동안 단 한 번도 운전할 일이 없다가 막상 운전대를 잡으려니 조금 긴장이 되기도 했다. 그것도 낯선 나라, 낯선 도시에서. 그러나 몸으로 배운 건 잊지 않는다 했던가. 오랜 운전 햇수 덕분인지 하루 만에 감을 되찾았다.


대만에서 운전할 때 다소 주의를 기울여야 할 점이 있다면, 크게 두 가지. 첫째, 아무 때고 우회전할 수 있는 한국과 달리 반드시 신호를 받고 우회전해야 한다는 점. 둘째, 웬만큼 큰 교차로가 아니고서는 좌회전 신호가 따로 없기에 운전자가 알아서 비보호 좌회전을 해야 한다는 점이다.


# 비보호 좌회전의 어려움

깜빡 잊지만 않는다면 '신호 받고 우회전'은 그런 대로 어렵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비보호 좌회전'은 생각보다 아슬아슬한 장면을 연출해야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특히 교차로에서 그렇다. 건너편에서 무더기로 직진하는 차량의 흐름을 끊어야 한다는 점도 그렇고, 한술 더 떠서 건너편에서 좌회전하려는 차와 아슬아슬하게 비켜가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설상가상으로 횡단보도를 건너는 사람들까지 교묘히 피해 가야 한다. (이곳에선 행인들이 횡단보도 신호가 떨어졌다 해서 안심하고 길을 건널 수 없다. 교차로에서 좌회전 혹은 우회전하는 차량들이 어쩔 수 없이 횡단보도를 건너는 사람들을 뚫고 지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비보호 좌회전은, 좌회전 신호를 기다리는 것(즉 왼쪽을 가리키는 초록 화살표가 켜질 때까지 멍하니 신호등을 바라보는 것)보다 두 배 이상의 주의를 요한다.

건너편 직진 차량을 예의 주시해야 하고(어디쯤에서 끊고 들어갈 것인가), 건너편에서 좌회전하는 차량을 조심해야 하며(자칫하면 충돌할 수 있기에), 심지어 횡단보도를 건너는 사람의 움직임마저 감지해야 한다(자전거로 빠르게 건너가는 사람을 칠 수도 있다).

과감하게 머리를 디밀고, 흐름을 끊고, 일단 핸들을 돌렸다면 머뭇거리지 않고 나아가되 횡단보도 좌우까지 살펴야 사고가 없다.


비보호 좌회전을 위해 초록 직진 신호를 기다리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개인의 삶은 비보호 좌회전과 같은 것이로구나.



# 우리 삶은 비보호 좌회전 같은 것

우리를 크게 둘러싼 환경의 틀은 그 자체로서 보호막의 역할을 한다. 가정, 학교, 직장, 커뮤니티, 국가, 지구 등등. 우리는 그 큰 틀 안에서 보이지 않는 보호막 유지를 위해 알게 모르게 공물을 바칠 것을 약속했으니 이는 바로 (신호등과 같은) 사회적 규범일 것이다.

사회계약론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것은 아니다. 단지 이 자연스럽고도 거대한 ‘계약’의 이면에는 무수한 비보호 좌회전 신호들이 점묘화처럼 무늬를 이루고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을 뿐. 그 무수한 비보호 좌회전을 맞는 개개인의 삶은 ‘선택’과 ‘결정’ 그리고 피할 수 없는 ‘책임’으로 점철되어 있을 것이다.


이번 교차로에서 좌회전을 할 것인지, 다음 교차로에서 좌회전을 할 것인지, 나는 순간적으로 가늠하고 선택한다. 그 선택은 ‘논리적 사고 단계’에 따른 것이라기보다 몸과 마음의 감각이 총체적으로 응축되어 내리는 명령을 순간적으로 따르는 것에 더 가깝다. 단계별 사고를 펼친다 해도 ‘결정’은 결국 어느 순간의 일이며, 그렇기에 ‘선택’은 알지 못하는 ‘사태’의 가능성들을 내포한다. 결정 뒤에 발현될 수도 있는 사태에 대해 우리는 무지하다.


# 만일의 사태를 껴안는 선택

아이가 단어 공부를 하다가 내게 물었다. 하필 묻는 단어가 eventuality이다. "something that might happen : a possible event or occurrence." 우리말로 하면 ‘만일의 사태’가 될 것이다.


만일의 사태(eventuality)를 껴안으며 내리는 결정이 선택일 것이다


만일의 사태들을 껴안으며 내려야 하는 결정이 곧 선택 아닐까. 비보호,라는 단어가 주는 위험 감수, 그 리스크 테이킹(risk taking)이 비보호 좌회전의 미학인지도 모른다. 법이라는 큰 틀 안에서 보호받지 못할 수도 있으니 개인이 알아서 위험 부담을 져야 한다. 대가는 자율성이다. 몇 가지 덕목들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이를테면 판단력, 순발력, 과감함, 추진력, 주의력 등등.


삶의 무수한 교차로에서 만나는(혹은 만나게 될) 비보호 좌회전 표시들. 선택을 요구하는 그 신호 앞에서 우리는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까.


나는 ‘직관’과 ‘용기’라는 두 개의 단어로 겨우 수렴할 따름이다.


(2016)



https://youtu.be/pX6J5-13c-0

Cream의 Crossroads가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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