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름'에 대하여: 코끼리 사나이와 마주친 날

정상과 비정상에 대한 시선들-<코끼리 사나이>와 <다섯째 아이>

by 그럼에도 불구하고


머리카락이 어지럽게 날린다. 거센 바람이 뒤로 느슨하게 묶은 머리 끈마저 벗겨낸다. 종잡을 수 없는 바람의 방향은 앞에서 뒤로, 뒤에서 앞으로, 온 머리카락을 뒤집고 헤집어 댄다. 짜증이 인다.



# 코끼리 사나이, 그리고 그를 바라보는 시선들


순간 흠칫한다. 앞쪽에서 걸어오는 압도적인 형체. 2미터는 족히 될 법한 키에, 건장한 일반 남자 어른의 두 세배쯤 되어 보이는 몸뚱어리, 폭포수처럼 쏟아질 듯한 살덩어리 밑으로 코끼리의 그것을 연상케 하는 거대한 다리, 제멋대로 살을 뭉쳐놓은 듯한 다리는 살아 있는 인간의 피부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검고 푸르딩딩한 색이다. 형용할 길 없는 기괴한 두상, 엄청나게 불거져 나온 이마와 일그러진 얼굴은 언젠가 박물관에서 본 심해 괴물 물고기와 흡사하다.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인간의 통념에서 보자면, 그는 외계인 혹은 괴물이다. 비정상의 범주를 넘어 아예 인간과는 다른 종으로 보이는.


미친 듯이 흩날리는 머리카락 뒤에 숨어 나는 그를 본다. 나의 눈이 그의 눈과 마주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며. 광풍은 이제 고맙다. 머리카락을 휘감아 내 겁 먹은 눈동자를 가려주니까.


다발성신경섬유종증을 앓았던 코끼리 사나이의 영화 속 장면

걸음을 늦춘다. 되도록 천천히. 빨리 지나치고 싶은 마음과, 적당한 간격을 두고 관찰하고 싶은 마음이 교차한다. 그의 걸음걸이는 몹시도 느리고 힘겨워 보인다. 뒤뚱거리는 몸을 끌다시피 움직인다. 반바지 차림에 배낭을 짊어지고 한 손엔 빨대가 꽂힌 음료를 들고 있다. 어딘지 모르게 다섯 살배기 아이의 모습이 스친다. 손에 음료수를 들고 좋아라 하며 순진하게 걷고 있는 모습. 그와 나 사이가 좁혀질 때 즈음 땅을 내려다 보며 걷던 그가 왼쪽으로 몸을 틀어 골목으로 꺾어 들어간다. 나는 안도한다. 그와 정면으로 마주치지 않은 것에 대하여, 그리고 그가 최소한의 귀소본능으로 가야 할 곳을 가고 있는 듯한 모습에.


측은지심이 일어난다. 동시에 그의 모습을 노골적으로 바라보는 어느 남자의 시선을 발견한다. 더러운 작업복 차림에 담배를 피우고 있는 그의 표정이 섬뜩하다. 비웃는 듯하기도 하고, 잔인한 호기심이 일 때 지을 법한 표정인 듯도 하다. 처음 그 거대한 남자를 보았을 때보다 이 남자가 더 무섭다,고 생각한다.


우리 집 근처엔 특수 학교가 있다. 그래서인지 다른 곳에 비해 장애인들(이라고 소위 분류된 이들)이 자유롭게 활보하는 편이다. 버스에서도, 길거리에서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어는 날, 사거리 카페 창가에 앉아 있던 나는 눈물겨운 장면을 목격한다. 휠체어 두 대가 나란히 횡단보도를 건넌다. 휠체어에 타고 있는 이들은 중증 뇌성마비 환자로 보인다. 휠체어 옆을 걷고 있는 이도 몸이 불편해 보인다. 그러나 휠체어에 타고 있는 이에 비하면 증상이 훨씬 가벼워 보인다. 횡단보도를 다 건너 인도에 이를 무렵 보도 블록의 턱이 걸림돌이 된다. 휠체어는 속수무책이다. 증상이 가벼워 보이는 이가 힘껏 휠체어를 보도 위로 밀어 올린다. 모두 무사히 인도에 진입하여 가던 길을 계속 간다. 이상하게 눈물이 나온다.


낮에 본 그 거대한 남자의 잔상이 자꾸 떠오른다. 데이빗 린치(David Rynch)의 영화 <코끼리 사나이(The Elephant Man)>가 생각 난다. 동시에 도리스 레싱의 소설 <다섯째 아이>도 떠오른다.


poster-2 엘리펀트 맨 데이빗 린치.jpg 데이비드 린치 감독의 영화 <엘리펀트 맨>(1980). 선천적인 기형을 가지고 태어나 사람들에게 '엘리펀트 맨(코끼리 사나이)'이라 불리던 19세기의 실존인물 존 메릭을 다루었다.


그러고 보니, 그 거대한 남자는 영화 속 코끼리 사나이를 닮은 것 같기도 하다. 차마 선뜻 바라볼 수 없는 흉측한 기형. 영화 속 코끼리 사나이처럼 그도 다발성신경섬유종증을 앓고 있는지도 모른다. 거기에 더해 어린 아이의 정신 세계에 머물러 있는, 소위 정신지체를 앓고 있는지도 모르고. 기괴한 외면을 상쇄하는 천진한 내면을 상상해보려 애쓴다. 코끼리 사나이의 끔찍한 외모와 대비되는 순수한 내면처럼. 상상해야만 짐작할 수 있는 그 내면에 비해, (의도하지 않았으나) 즉각적이고도 직접적으로 타인에게 두려움과 당혹감을 일으키는 외면이란 참으로 서럽고도 야속하다.



# 이질적인 존재에 대한 공포와 거부


도리스 레싱의 <다섯째 아이>는 또 다른 이야기이다. 데이비드와 해리엇 부부에게 찾아 온 다섯째 아이. 그 아이의 이름은 벤이다. 벤이 묘사되는 방식만 보더라도 그는 인간보다 외계인에 가깝다. 다른 네 아이들과는 달리 아기 때부터 (아니, 태아일 때부터) 벤이 보이는 기괴하고 (때로는 끔찍한) 장면들은, 활기차고 따뜻했던 한 가정을 서서히 무너뜨린다. 벤에 대한 가족들의 공포는 그들 모두를 뿔뿔이 흩어지게 만든다.


처음에 부부는 자조한다.


“네안데르탈 아기야. (…) 이번에는 아마도 유전자들이 특별한 것을 만들었나 보지.”


수용소에서 짐승 같이 죽어가는 벤을 다시 집으로 데리고 왔다는 이유로 암묵적인 비난에 시달리는 엄마 해리엇. 온갖 악몽 같은 시간을 거쳐 엄마 해리엇이 어느 한 전문의와 상담하는 장면은 인상적이다.


“우리가 복권 추첨에서 무엇이 나올지를 선택할 수 없듯이 아기를 갖는 일도 마찬가지랍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간에 우리는 선택할 수 없습니다. 당신이 해야 할 첫번째 일은 자신을 비난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images 다섯째 아이.jpeg 도리스 레싱 <다섯째 아이>


의사의 얼굴에서 그녀는 자신이 기대했던 것을 보았다. 그 여인이 느끼고 있는 것이 투영된, 어둡고 고정된 시선이었다. 그것은 인간 한계를 넘어서는 것에 대한 정상인의 거부, 이질성에 대한 공포, 또한 벤을 낳은 해리엇에 대한 공포였다.

- 도리스 레싱, <다섯째 아이>, 민음사



# 명명할 수 있는 다름, 명명할 수 없는 다름


다르다는 것. 코끼리 사나이와 다섯째 아이는 모두 (보편적 인간 사회에서) 다른 존재이다. 정상인 사회에 받아들여질 수 없는 비정상인. 내게 그 둘 사이의 차이는 이렇다. 코끼리 사나이의 경우 그나마 (객관적으로 규정할 수 있기에)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는 여지가 있는 ‘다름’인 반면, 다섯째 아이의 경우는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는 ‘다름’ 그 자체이다. 인간에 의해 이름 붙여질 수 있는 ‘다름’과, 불가해한 (이름 붙이기를 포기한) ‘다름’의 차이라고나 할까. 사회적으로 수용 가능한 ‘다름’의 범주 안에 살고 있는 우리는 얼마나 안도하는가. 그리고 불가해한 ‘다름’에 대해 얼마나 두려움과 경계심을 품고 있는가. 이 ‘다름’으로 고통 받는 이는 누구일까. 당사자인가, 주변 사람들인가. 둘 다인가.


나는 그 거구의 ‘비정상적인’ 남자를 생각하며 (아마도) ‘정상적일’ 그의 어머니에 대해 생각해본다. 비정상인을 낳은 정상인(어머니)의 공포, 비정상인과 그를 낳은 정상인에 대한 사회의 공포. 비정상인과, 그를 낳은 정상인과, 그들을 바라보는 정상인들이 이루는 관계와 시선을 다이어그램으로 표현해본다면 어떤 형태일지 상상해본다.


스산하다.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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