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별 인사에 관한 잡념
Y네 가족이 떠났다. 조만간 S네 가족도 떠난다. 여름 방학을 전후로 헤어짐과 만남이 이어진다.
얼마 전 S를 잠시 만났다. 대만에서 태어나서 캐나다로 이민 갔다가 남미 곳곳에서 살다 대만으로 돌아온 후 다시 캐나다로 떠나는 S. 떠도는 이들에게 작별 인사는 일상이다. 새로운 곳에서도 건강하고 행복하기를, 언제 어디서나 늘 즐겁고 평안한 시간 보내기를, 계속 연락하고 지내자는 등의 메시지가 골자를 이룬다.
S와 헤어지며 포옹을 나눈다.
Wish you and your family all the best.
건강이든 행복이든 상대방에게 최상의 상태를 빌어주는 관용어가 납득할 만하다. 현실은 그렇지 않더라도. 아니 현실은 그렇지 않기에.
행복한 시간, 건강한 나날, 즐거운 시간, 평안한 상태…… 문득 이 모든 것이 ‘시간을 보내는 것’에 관한 기원(祈願)이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든다.
가만 생각해보니, 내가 다른 사람에게 보내는 ‘시간’에 대한 기원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수식어를 앞세운다. 충만한, 의미 있는, 평온한 등등.
어쩌다 독특한 멋을 부리고 싶을 때(멋을 부려도 좋을 상대라고 생각될 때)에는 ‘단단한’ 혹은 ‘흐드러진’과 같은 표현을 쓰기도 했다.
‘좋은’ 시간 보내세요,라고 써놓고 보면 어째 여의치 않고, ‘즐거운’ 시간 되세요, 라고 쓰면 마뜩잖다. ‘행복 가득한’ 시간 운운하는 것은 영 못마땅하다.
시간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에 대한 이상적 기준은 오롯이 개인에게 달려 있다. 시간에 대한 추상적 클리셰는 진부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만 때로 그 진부함은 (간혹 부닥치게 되는) 자기 부정을 통해 좀더 독특하고 구체적인 옷을 입어보려 시도하기도 한다. (‘입는’ 것이 아니라 ‘시도하는’ 것에 방점을!)
나는 ‘납득할 만한’이라는 말을 떠올린다.
누구에게? 바로 각자 자신에게.
각자 자기 자신에게 ‘납득할 만한’ 시간을 보내는 것이야말로 ‘어떻게’ 시간을 보낼 것인가,에 대한 기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추상적으로 행복한, 막연하게 건강한, 무턱대고 즐거운, 상태란 없다.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 '납득할 만한’ 시간을 보내는 것.
흠…… 이렇게 써놓고 보니, 순환적 모순에 빠진다. ‘납득할 만한’ 시간이란 어떤 시간인가?
--> 자기 자신이 ‘납득할 만한’ 시간이다, 라는……
결국 자기 자신만 알 수 있는 노릇이다. 타인은 ‘자기 자신만 알 수 있는 노릇’인 그 납득할 만한 시간을 추상적으로 빌어줄 수밖에 없는 존재이고.
그런 점에서 본다면, 내가 상대방에게 ‘스스로에게 납득할 만한 시간 보내세요’라고 하는 것이나, ‘행복 가득한 시간 보내세요’라고 하는 것이나 추상적이긴 매한가지 아닌가.
아, 결국 타인을 위한 기원이나 축원은 ‘발화자 자신이 납득할 만한 것’일 필요는 없는 것이로군.
오늘의 깨달음이다.
행복,이든 즐거움,이든 납득할 만한 정의는 각자에게 귀속되는 것이므로.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