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로 아는 것과 몸으로 아는 것 사이의 거리
펑리가 만나자마자 대뜸 오전에 커피를 마셨나고 물어본다. 이미 마셨다고 하자 나중에 드립해서 마셔보라며 가방에서 주섬주섬 작은 유리병을 꺼낸다. 게이샤 커피라고 했다.
게이샤?
응, 들어본 적 있어?
아니, 처음 듣는데. 일본의 게이샤 말이야?
# 몸으로 아는 것
일본의 게이샤가 아닌 에티오피아 지역 이름에서 따온 커피라 했다. 뚜껑을 열어 향을 맡아본다. 눈이 절로 휘둥그레졌다. 드립 커피를 마셔본 지 오래되어서 원두 분말 향을 맡아본 지도 오랜만이다. 밀려드는 풍부한 향에 아주 잠시 행복해졌다.
신맛이 덜하고 꽃과 과일향이 뛰어나다고 펑리는 설명했다. 블루마운틴이나 하와이안 코나 커피를 뛰어넘을 만큼 유명하다고도 했다. 스페셜티 커피 중에서도 고급 커피라는 것이다. 몇 년 전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열린 월드 바리스타 챔피언십에서 이 게이샤 커피가 처음으로 우승을 했다고도 덧붙였다.
바리스타 자격증이 있으면 뭐하나! 게이샤 커피는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다. 아니면 예전에 배웠는데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일까. 내친 김에 5년 전 커피 교재를 찾아 들여다본다. 에티오피아산 커피에 시다모, 이르가체프, 하라르, 짐마, 리무 등이 있다는 것까지 배웠는데, 게이샤,라는 이름은 대체 어디서 튀어나온 거지?
커피 원산지 '에티오피아'가 교재 첫 장을 장식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커피의 기원 또는 커피의 역사에 '에티오피아'를 빼놓고는 이야기가 안 되기 때문이다. 커피의 어원을 설명할 때 가장 신뢰할 만한 설이 카파(kaffa)라는 지명에서 유래되었다는 점 때문이다. 에티오피아의 카파로 추정되는 곳에 자라던 야생의 커피나무가 남아라비아로 전파되었다가 15세기경부터 재배되었다,는 것이 요점이다.
그건 그렇고 일단 마셔보자. 오랜만에 드립퍼를 꺼내고 여과지를 얹는다. 추출하는 데 생각보다 시간이 걸린다. 마신다. 펑리의 말대로 신맛이 덜하고 엷고 신선한 꽃향이 은은하게 입 안에 퍼진다. 오늘 펑리가 가르쳐준 ‘요우썅(幽香)’이라는 표현이 딱 들어맞는다. 그윽한 향.
# 머리로 아는 것
펑리가 보내준 Geisha Coffee에 대한 위키피디아를 읽어본다. 아무리 최근 들어서 수요와 재배가 급증했다고 해도 대중적 인기와 명성을 얻은 것은 이미 2000년 초반이다. 내가 베트남에서 커피 공부를 했던 것은 불과 5년 전 일이다.
"It was imported from Costa Rica to Panamain the Boqueteregion"이라는 문장에서 퍼뜩 멈춘다. 그렇다면 아프리카 대륙이 아닌 중남미 대륙 쪽에서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다시 교재를 뒤적인다.
역시나! 아메리카 커피를 소개하는 거의 끄트머리 부분에 파나마가 등장한다. 교재에 프린트되어 있지는 않지만 내 필기체로 "게이샤(대표적인 파나마 커피)"라는 말이 적혀 있다. 노랑 형광펜으로 굵게 표시를 해놓은 것도 모자라 별표까지 달아놓았다. (이런......)
"파나마 커피의 상당량은 SHB급의 고급 마일드 커피이다. 무게는 가벼우나 달콤하고 알맞은 신맛, 균형잡힌 깊고 풍부한 맛과 향을 가진 고급 커피로 평가되고 있으나 생산량은 그리 많지 않다. 파나마 커피 중에서도 진짜 고급 커피는 '보케테(Boquete)' 커피인데, 소규모 농가들에서 생산되는 타이피카 품종이다. (기타 어쩌구 저쩌구)"
한술 더 떠서. 당시 (베트남에서) 커피를 가르치던 선생이 수업 시간에 칠판에 써준 것을 고스란히 받아 적은 흔적.
커피 종사자들이 꼭 마셔봐야 할 커피
- 에티오피아의 오리지널 모카
- 케냐 AA
- 과테말라 SHB 안티구아
- 파나마의 게이샤
- 인도네시아의 만델린
- 콜롬비아
그리고 밑에 reference로 이렇게 적혀 있다.
블루마운틴이나 루왁, 하와이안 코나가 유명하긴 하지만 맛이 유난히 특별한 것은 아니다.
이런 낭패가 있나. 내가 커피 종사자가 아니라는 것이 변명은 될 수 있겠으나, 한때 유난스럽게 표시해놓은 부분을 이토록 깡그리 잊었다는 것은 어째 민망한 일이다.
아니지. 생각을 달리해보자.
1) 꼭 마셔봐야 할 커피 중 하나를 이런 식으로라도 마셔보게 되었으니 다행이다. 운이 좋았다.
2) 추상적으로 아는 것과 몸의 감각을 통해 아는 것 사이에 이토록 큰 차이가 있다는 점을 새삼 체득했으니 오히려 고마운 일이기도 하다. 머리로 아는 것과 몸으로 아는 것 사이의 거리는 좁힐수록 좋다.
3) 비록 한번에 상기해내지는 못했지만(어쩌랴 나는 천재가 아니다), 어설프게라도 짜놓은 배움의 틀이 있어 그나마 용이하게 불러내 참조할 수 있었다. 아는 게 힘이다. (모르는 게 이따금 약이어도.)
4) 대만 와서 주로 별다방 커피만 마셨다. 최근 집 앞에 ‘제대로 된’ 커피 전문점이 새로 생겼으니, 유리 선반에 정성껏 전시해놓은 각 산지별 커피를 유심히 살피고 골라 마셔봐야겠다. 평준화보다는 특별함을, 획일화보다는 차이를 선호한다고 생각해왔으니.
그건 그렇고, 게이샤(Geisha) 커피의 게이샤는 어디서 온 말인가. 에티오피아의 Gecha라는 곳에서 유래했다 한다. 검색해보니 “신이 내린 커피, 파나마 게이샤의 매력”이란 제목의 기사도 눈에 띈다.
“게이샤란 이름은 생두 원산지인 에티오피아 서남쪽 카파의 '겟차(Gecha)'라는 숲의 영어식 발음으로 케냐 탄자니아와 코스타리카를 거쳐 '파나마 게이샤'란 이름으로 알려지게 된다.
게이샤 커피는 상큼한 과즙향, 꽃향기, 가벼운 바디감, 청량감 등 우수한 품질과 향미로 세계 3대 커피라 불리는 자메이카 블루마운틴, 하와이안 코나, 예멘 모카를 제치고 세계 최고의 커피라는 명예를 얻었다.
특히 에스메랄다 농장에서 재배되는 '파나마 하시엔다 라 에스메랄다 게이샤'는 킬로그램당 수십만 원을 훌쩍 넘을 만큼 높은 몸값을 자랑하는 커피로 파나마 커피의 자존심 그 자체다."
참, 또 하나 재미있는 점. 중국어로 게이샤 커피는 음차(音借)를 하지 않고 일본식 의미를 따서 표기한다는 것. 즉 게이샤(일본 기생)의 의미를 그대로 풀어 ‘이찌 카페이(藝妓 咖啡: 기생 커피)’로 쓴다 한다. 어째 좀 아쉬운 부분이다.
몸으로 알지 못하면 머리로라도 제대로 알아야 할 텐데.
아니, 머리로만 제대로 안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이긴 할까?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