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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럼에도 불구하고 Jun 11. 2020

품사와 시인

품사 오답에서 시인의 오감으로 : 언어에 관한 잡념들


문법을 좋아하지 않는다. 학생 시절 영어를 배울 때도 나는 문법책을 좋아하지 않았다. 대신 사전과 예문을 좋아했다. 나의 사전은 가지치기, 혹은 꼬리에 꼬리 물기 놀이를 원 없이 하게 해주는 언어의 놀이터였다. 하나의 단어에서 출발하여 유의어(synonym)와 반의어(antonym)를 살펴보고, 그 쓰임새를 문장을 통해 통째로 익히는 것. 암기보다는 이해, 문자보다는 문맥,을 선호하였(던 듯하)다. 동시에, 의미소(semanteme)와 형태소(morpheme)를 짚어보는 것에 대해서도 묘한 흥미를 느꼈으니, 뭐, 되는 대로 탐구정신을 발휘하며 ‘놀았다’고 해야겠다. 너덜너덜해진 사전과 함께.



# 아이의 문법 시험 결과에 대한 고찰(?)


아이의 Vocabulary Test 결과를 보다가 재미있는 점을 발견했다. 54문제 중 틀린 문제는 7개. 문맥에 맞게 단어 고르기, 유의어, 반의어 등은 거의 다 맞는 답을 골랐다. 다소 어려운 단어와 문장 구성에도 불구하고 '웬만큼' 뜻을 파악했다는 이야기다. 틀린 문제 대부분은 어이없게도(까다로운 문제는 되려 다 맞추고) 품사(品詞, part of speech)에 관한 것이었다.


형용사, 명사, 동사, 부사 등등은 이미 수없이 접한 (문법)언어임에도, 아이는 여전히 이 '문법적' 구분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아이의 머릿속에서 - 고유의 독자적인 체계(?) 속에서 - 명사는 형용사로, 형용사는 부사로 얼렁뚱땅 뒤바뀐다. 어찌 보면 뒤죽박죽, (자신의 수용 체계 안에서는 나름 정연한 이유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한마디로 '오답'이다.


예상치 못한 걸림돌이다. 문득 도올 김용옥 선생의 어릴 적 이야기가 떠오른다. 왼쪽 신과 오른쪽 신을 구별하지 못해 난감해 하던 어린이 김용옥.


나는 어릴 적 ‘분수’와 ‘빙수’를 구분하는 데 애를 먹었다. 어찌된 일인지 시원하게 뿜어져 나오는 분수를 보면 '빙수(氷水)'가 떠올랐고, 소복하게 솟아오른 빙수를 보면 '분수(噴水)'가 떠올랐다. 김용옥 선생이 스스로를 일컬어 '돌대가리'라고 했듯, 나 역시 엉뚱한 돌뎅이였나.


그 어미에 그 아들,을 얘기하려 했던 것은 아니고. 무슨 이야기를 하려다 말았지? 아, 품사,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오답인가 아닌가.


오답인가? 굳건한 문법 체계 안에서는 오답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문법적 분류는 정확하지 않다 하더라도, 단어와 단어 사이에 흐르는 의미의 기류(氣流)를 포착하는 데 별 어려움이 없다면? 예컨대, 자연스레(혹은 의도적으로) 문법적 약속이 파기되기도 하는 시어(詩語)에 관한 것이라면?


문법에 약한 아이를 어떻게든 긍정적으로 봐주려 하는 어미의 딱한 제스처가 아니다. 언어적 규약의 틀 안에서 틀린 것은 틀린 것이다. 다만, 그 (재미없는) 약속에 의거한 정답을 ‘설명’해주어야 하는 나의 제스처가 딱해서이다. ‘고집불통의(headstrong)’라는 형용사가 어째서 부사가 아닌지, ‘차질(setback)’이라는 명사가 어째서 형용사가 아닌지. 명사를 수식하는 형용사,와 동사를 수식하는 부사,를 어떻게 구별해내는지 여러 번 설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의 이해(아니, 수용)체계 속에서는 headstrong이라는 단어의 이미지가 동사와 관계를 맺는 그 무엇처럼 ‘느껴지도록’ 흔적을 남긴 것일지 어찌 알겠는가.



아이의 Vocab Test 결과 중. 국제학교에서도 이런 식의 영어 문법 테스트를 본다.



# 의미는 기호와 기호들의 '관계'에서 발생한다


소쉬르는 언어 체계를 형성하는 단위를 기호로 본다. 기호는 기표(記票)와 기의(記意)가 결합된 것이다. 기표(시니피앙 signifiant)를 청각적 이미지, 기의(시니피에 signifie)를 개념이라고 각각 정의한다. 청각적 이미지란 말의 물질적인 차원을 말하는 것으로, 우리가 ‘나무’라는 소리를 들을 때 그것이 우리 정신에 남기는 심상과 흔적을 말한다. 개념은 우리 머리에 떠오르는 ‘나무’에 대한 생각을 말한다. 소쉬르가 기호를 언어의 최소 단위로 보는 것은 언어가 사물과 그것을 지칭하는 어휘들의 목록이고 그 발달 과정을 연구하는 게 언어학의 과제라는 전통적인 생각을 비판하기 위해서다. 어휘들의 목록이 언어라면 이미 개념들이 선행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이고, 개념에 상응하는 사물들이 언제나 존재해야 한다. 그렇다면 ‘사랑’, ‘미움’ 같은 단어들은 어떤가? 우리는 그것에 일치하는 대상들을 쉽게 제시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추상 명제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은 기호와 기호들의 대립적 관계가 의미를 발생시키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지 우리가 기호에 상응하는 대상을 미리 알기 때문이 아니다.

- 김석, <프로이트 & 라캉>,김영사,132p



누군가에게 ‘빙수’는 뿜어져(噴) 나오는 얼음(氷) 화산의 이미지를 선사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빙수(氷水)는 분수(噴水)와 관계를 맺게 된다. 이 관계 속에서 보다 적극적인 시도, 즉 빙수=분수,라는 메타포적 등가 관계가 발생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시인의 시각에서 빙수는 얼마든지 분수일 수 있고, 분수는 기꺼이 빙수가 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처럼.


다음은 아이와 나눈 대화.


나: Headstrong이 무슨 뜻인지 알지?
아이: 네, 알아요.
나: 우리말로 표현해볼래?
아이: 음…그러니까…고집이 세다라는 뜻 아니에요?
나: 맞아. 그럼 형용사일까 부사일까.
아이: 고집이 세다… (갸웃거리며) 동사인가? 아니, 부사인가?
(몇 마디 나누지 않았는데 아이는 벌써 피곤하다는 표정이다. 그게 왜 그리 중요하냐는 듯. 그리고 내게 날린 한마디).
아이: 뜻을 알면 된 거 아니에요?


딱히 할 말이 없다. 아니 할 말은 있는데 딱히 말하고 싶지 않다.


중국어에서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형용사가 동사로 분류되기도 한다. 동작동사(Action Verb)와 구별하기 위해 상태동사(State Verb)라는 말을 사용한다. 예쁘다, 좋다, 많다, 비싸다, 충분하다, 등등. 딱히 문법적 설명을 듣지 않더라도, ‘감’이 온다. 중국어에서 고집이 세다,라는 뜻의 주웨찌앙(倔强)은 동사일 수도 있는 것이다.


어떤 단어가 일으키는 시각적 혹은 청각적 이미지는 그 단어가 지닌 개념과 어우러져 순간적으로 ‘이해된다’. 그것은 이성적일 수도, 직관적일 수도, 둘 다일 수도 있다. 그 개념이라는 것이 얼마나 보편적인 것인지, 혹은 개별적이고 특수한 (경험에 근거한) 의미인지에 따라서.


시는 우리의 언어체계에서 자주 미끄러질 수밖에 없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말로 표현하려 애쓰는 것이 시의 본질이므로.


그러니 시인이 부리는 품사란 지극히 보편적일 수도 있고 지극히 개별적인 것일 수도 있는 것. 그 지극히 개별적인 품사를 이성적으로 읽을지, 직관적으로 느낄지, 혹은 둘 다 섞어 받아들일지는 각자의 몫.


최근 어느 블로그에서 읽은 구절이 생각난다.


"예민하고 둔한 것은 각자 타고난 것이지만, 시인은 오감의 모든 문을 열어놓는 성의를 가진 것은 분명하다."


말과 글,에 관한 한 발화자와 수용자 모두 오감의 모든 문을 열어놓는 성의를 가져볼 필요는 있겠다 싶다.


(2017-3-10)


- 아이의 품사 오답에서 어쩌다 시인의 오감으로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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