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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럼에도 불구하고 Jun 21. 2020

평범함에서 비범함으로

에릭 홉스봄 - <재즈, 평범한 사람들의 비범한 음악>

에릭 홉스봄이라는 이름, 그리고 황덕호라는 이름. 이 두 이름이 내가 이 책을 들여다 보지도 않고 주문한 이유이다. 에릭 홉스봄의 책 <극단의 시대: 20세기 역사>를 여전히 진행형으로 읽고 있는(좀더 정확히 말하면 파편적으로 읽고 있는) 내게 그가 쓴 재즈 책이라는 점은 매력적일 수밖에 없었고, 우리나라의 재즈 평론가 중 남무성과 나란히 떠올리게 되는 이름인 황덕호가 옮겼다는 점에서도 일단 신뢰를 확보했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의 저서 <극단의 시대>에도 두 장에 걸쳐 예술 부분이 다루어지고 있긴 하다. 제6장 ‘1914-45년의 예술’과 제17장 ‘전위예술의 사멸-1950년 이후의 예술’이 그것이다. 6장에서는 주로 과학기술과 더불어 발전한 산업적 대중예술(특히 신문이나 영화, 사진과 같은 시각 매체)을 중심으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라디오의 강력한 영향력에 힘 입은 (미국에서의) 재즈의 발전이 살짝 다루어지긴 하나 아주 간단히 짚고 넘어가는 수준이어서, 그가 (마르크스주의 사학자인 동시에) 열렬한 재즈 팬이라는 사실은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홉스봄이 <극단의 시대>에서 재즈에 대해 언급한 부분을 살짝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재즈 시대’의 ‘재즈’는 (…) 전위예술가들로부터 전반적으로 인정받은 것이 거의 확실하다. 그 자체의 가치 때문이라기보다는 아직은 과거와의 단절, 근대성, 기계시대의 또 다른 상징(요컨대 또 하나의 문화혁명 선언)으로서 받은 인정이었다. 지금에 와서는 20세기 음악에 대한 미국의 중요한 기여로 인정되고 있는 재즈류에 대해서 전위예술가이든 아니든 기존 지식인들이 진정으로 열정을 보이는 경우는 세기 후반이 되기 전까지는 여전히 드물었다. 1933년에 듀크 엘링턴이 런던을 방문한 뒤의 필자처럼 재즈에 취미를 붙인 사람들은 작은 소수파였다.

– 에릭 홉스봄, <극단의 시대 (상)>, 260p)


역자가 이 책의 후기에 밝힌 것처럼 마르크스주의와 재즈는 에릭 홉스봄의 자연스러운 배경이기도 하다.


자서전에 의하면 홉스봄은 1932년 열다섯 살 때 마르크스주의자가 되겠다고 결심했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처음으로 재즈의 아름다움에 빠져드는 경험을 하게 된다. 물론 그것이 마르크스주의와 재즈에 대한 그의 신념을 전부 대변하는 것으로 오해되면 안 되겠지만 마르크스주의와 재즈는 십 대의 나이에 ‘30년대를 살아간 한 소년이 체험할 수 있는 자연스런 동시대적 경험이었음을 알 수 있다. (178p)


역사학자라는 본업에서 더 나아가 1950년대 중반부터 ‘프랜시스 뉴턴’이라는 필명으로 재즈 평론을 시작한 홉스봄은 당시 (좌우를 막론하고) 재즈를 비난하는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재즈를 지지한 인물이다.


이 시기 평론가로서 재즈에 대한 홉스봄의 견해는 매우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왜냐하면 나치즘은 물론이고 아도르노의 프랑크푸르트학파 그리고 스탈린 체제에 이르기까지 일종의 ‘좌우 연합전선’이 재즈를 일제히 비난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각기 다른 방향에서 재즈를 퇴폐, 소외, 미국적 병리현상으로 봄으로써 기이한 일치를 이루었다. 이에 반해 홉스봄은 재즈가 민중에 의해서 만들어진 독자적인 음악이며 전통적인 예술의 기준에서도 일관되게 평가할 수 있는 20세기의 마지막 음악이라고 옹호했다. (182p)


원래 역자는 홉스봄의 유일한 재즈 단행본 <재즈 동네 The Jazz Scene>를 번역할 계획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홉스봄이 이 책의 재출간을 원치 않았다는 것. 대신에 그의 또 다른 저서 <비범한 사람들> 중 제 4장인 ‘재즈Jazz’만을 독립적으로 떼어내 단행본으로 묶은 것이 바로 이 책이다. 실린 글들 역시 홉스봄이 각기 다른 매체에 기고한 서평이나 논평을 적절히 편집해놓은 것이다 보니 일목요연하게 초점이 모아지는 느낌은 없다. 네 명의 전설적인 재즈 거장들을 다룬 1부와, 재즈를 역사적 및 사회적 맥락에서 고찰한 2부로 이루어진 이 책은 (개인적으로) 뒷부분으로 갈수록 알차다는 느낌이다. 재즈에 대한 홉스봄의 (역사학자로서의) 지적 통찰이 빛나는 것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홉스봄은 <재즈 동네>에서 재즈가 민중들에 의해 만들어진, 그들의 정서를 담은 음악이며 그것이 오늘날까지 끈질기게 하나의 독자적인 예술로 생존해 올 수 있었던 것은 그 음악의 가치를 인지하고 진지하게 대했던 소수의 재즈 팬들의 열정에 힘 입은 바 크다는 사실을 정연한 논리와 풍부한 자료를 통해 주장했다. 그리고 이 요점은 다행히도 저자가 출간을 허락한 본책에도 여전히 강조되고 있다. (177p)


이미 고인이 된 저자가 원치 않았다니 <재즈 동네>를 읽을 일은 묘연하지만, 뜻 있는 사람들의 노력으로 그의 생각들을 이렇게라도 접할 수 있다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역자가 전문 번역가가 아닌 탓에, 군데 군데 매끄럽지 않은 번역으로 집중력을 다소 떨어지게 만든다는 점을 빼고는 (아마도 직역 때문인 듯) 그런 대로 잘 읽힌다. 각각의 장 앞에 역자가 짧게 덧붙인 해당 인물에 대한 간략한 소개나 본문의 이해를 돕는 요약 및 보충의 글은 오히려 도움이 된다.


평범한 사람들

1부격인 '평범한 사람들'에서 다루어지는 네 명의 거장들-시드니 베셰, 듀크 엘링턴, 카운트 베이시, 빌리 홀리데이-은 시대적 분위기에 맞물려 (혹은 영리하게 시대의 흐름을 타고) 자신의 재능을 십분 발휘한 (어쩌면 평범해질 수도 있었을) 비범한 사람들의 일면을 조명하고 있다.

전설적인 인물들의 평범성(심지어 비루한 속성들)이 어떻게 전전前戰 혹은 전후戰後 시대의 흐름(부름)에 부응하며 (후대의 평가와 찬미를 통해) 비범한 날개로 굳혀지게 되는지 짚어보게 된다.

비범함 이면의 평범성인지, 평범함 안에 감추어진 비범성인지 아무튼 이 둘 모두에 영향을 미치는 시대적 분위기(사회적, 음악적 환경)와의 상호작용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게 하는 글이다. 한 시대를 풍미한 재즈 인물들을 바라보는 시각에서조차 역사학자다운 통찰이 담겨 있어 흥미롭다.


비범한 음악

인물들에 대한 평이 아닌 '재즈'라는 음악 장르의 역사적, 사회적 맥락을 짧게 개괄하고 있는 2부격 '비범한 음악'은 꽤 집중해서 읽게 된다. 나의 관심사와 맞아떨어지기 때문.

2부 '비범한 음악'은 유럽에서의 재즈 수용에 대한 고찰, 민중음악으로서의 스윙, 1960년 이후 재즈의 변모에 대한 이야기 등 3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미국 음악인) 재즈가 유럽에 전파된 사회적 조건과 과정을 분석한 ‘5장: 재즈, 유럽에 가다’와, (역자가 그토록 번역 출간하고 싶어 했던) <재즈 동네>의 서문을 바탕으로 쓰인 ‘7장: 1960년 이후의 재즈’는 재즈 평론가인 역자의 짧고도 명료한 요약 설명이 곁들여져 더 쉽게 읽힌다.


마지막으로 ‘에릭 홉스봄과 재즈’라는 제목의 역자 노트는 이 책을 마무리하는 데 야무진 매듭이 되어준다.

수많은 재즈 서적들이 세상에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홉스봄은 여기 몇 편의 글을 통해 재즈에 대한 독특하고도 예리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중략) 하지만 모든 질문 중 가장 깊이 생각해 봐야 하는 것은, 아울러 모든 질문의 대답을 수렴하고 있는 것은 재즈의 성격, 다시 말해 재즈와 대중의 관계다.

홉스봄이 누누이 강조하지만 재즈는 하층 계급의 틈바구니에서 태어나 그들의 정서를 담고 있는 음악임에도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듣는 음악이다. (…) 재즈를 실용음악의 한 부류로 단순히 취급했을 때 이 음악의 특성과 가치는 결코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 음악이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그 가치를 인정하고 후원했던 사람들, 진지한 재즈 팬들의 헌신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연스럽게 생성된 음악적 생태계 속에서 자족적인 공동체를 꾸리고 살아간 음악인들 스스로의 노력 덕분이었다. (187-188p)


나는 진정한 재즈 골수팬은 아니다. 그럼에도 재즈(라고 분류된 음악들)를 자주 즐겨 듣고, 재즈라는 음악 장르 자체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이 적지 않다. 그런 면에서 대중문화와 예술의 영역 안에서 그동안 재즈가 자리 잡아온 역사적, 사회적 문맥을 (20세기의 위대한 역사학자 홉스봄의 시각을 통해) 이해하는 것은 매우 즐거운 지적 유희임에 틀림없다.


홉스봄이 이야기한 것처럼 재즈는 "소수자의 예술이고 늘 그래온"(64p) 음악이다. 그 '소수'라는 어감에 끌려, 그리고 (흑인 음악이라는 같은 뿌리를 둔) 블루스와 록으로부터 자연스럽게 관심을 이동해 이 재즈 동네에 발을 디딘 나 같은 사람들(시작은 어설프게 했어도 재즈의 반짝이는 매력에 점차 청각적 탐험을 확장시키고 있는)에게도 재즈는 (처음엔 다소 배타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차츰 자신의 속내를 열어 보이는 우물 같은 음악이다.


전형적인 재즈 관련 책이라면 으레 실려 있을 법한 추천 앨범(소위 명반)이나 명곡들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도 이 책의 특징이다. 그러나 글을 풀어나가는 데 있어 불가결하게 언급될 수밖에 없는 곡들(익숙한 곡들이 아님에도)이나, 내용 중에 문득 환기되는 익숙한 곡들을 찾아 들으며 읽어 나가는 즐거움이 꽤 쏠쏠하다.


일요일 오후 이 책을 읽으며 빌리 홀리데이의 Gloomy Sunday를 듣는 재미라든가, (배경음악으로 재즈를 틀어주는 이 시대의 대표 공간) 스타벅스에서 흘러나오는 존 콜트레인의 블루 트레인을 들으며 1960년 이후 재즈의 미래를 염려하는 홉스봄의 글을 읽는 소소한 즐거움도 놓칠 수 없다.


(2015-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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