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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럼에도 불구하고 Jun 08. 2020

조성진과 <쇼팽 노트>

길들여지고 싶은 대상에 관하여 (feat. 앙드레 지드의 <쇼팽 노트>)


# 계기:조성진이 연주하는 리스트의 라 캄파넬라를 듣는다. 여린 듯 맑고 청량한 그의 타건이 놀라우리만치 유려하면서도 정확하다.


# 발단:지난 겨울, 쇼팽 콩쿠르 우승으로 인해 그의 실황 음반을 처음 사보았다. 쇼팽을 좋아하는(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좋아하게 된) 데다가 워낙 획기적인 일대 사건이라 음반이 나오자마자 주문을 넣었다. 이사 준비로 정신 없는 와중에 그의 음반을 한국에서 모셔온 나는 아무도 없는 조용한 시간에 혼자 그의 연주를 감상했어야 했다. 조성진이 누구냐, 쇼팽 콩쿠르가 얼마나 유명한 것이냐, 등의 질문을 해대는 아이에게 적절한 답을 해주느라 오롯이 집중해서 듣지 못한 탓도 있겠지만, 그동안 아르헤리치, 루빈스타인, 키신, 폴리니, 짐머만 등 내로라하는 쇼팽 스페셜리스트들의 연주에 익숙해져서인지, 그의 손가락 끝에서 피어나는 음들은 어쩐지 조금은 조심스럽고 수줍게 느껴졌다. (물론 나만의 생각이다.) 그렇게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그의 음반을 두어 차례 듣고 CD는 이삿짐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 환기: 그런데 우연히 그가 연주하는 베토벤이나 리스트를 듣고 깜짝 놀랐다. 부드러움과 강함, 섬세함과 대범함, 신중함과 자신감이 동시에 스며 있다. 나는 새삼 그에게서 '균형'을 느꼈다. 많지 않은 나이에, 오래 되지 않은 경력에, 이 정도의 균형이라니. 그의 팬이 될 것 같다. (이미 되었다.)


예를 들어 리스트의 라 캄파넬라처럼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곡만 봐도 그렇다. 화려한 기교를 과시해야 할 것만 같은 이 곡 앞에서 연주자들은 종종 오버하기도 한다. 어딘가 모르게 부자연스러운 감정의 개입이 의도적으로 들어가 있는 게 슬쩍 느껴진다. (나만 그런가?) 여러 (유명) 피아니스트들이 보여주는 초절기교도 좋지만, 어쩐지 피아노와 한 몸이 되어 녹아 들면서도 자신의 위치를 진중히 지키는 그 균형감각만큼은 조성진의 손을 들어주고 싶다. (뭐, 이것도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일 뿐이다.)


# 전환: 이삿짐을 풀고 나서 다시 조성진의 CD를 꺼내어 듣는다. 그가 연주하는 전주곡과 녹턴, 피아노 소나타와 폴로네즈를 듣는다. 아직 익숙하지는 않지만, 어쩐지 나는 그의 연주에 곧 길들여질 것만 같다. 아니 기꺼이 길들여지고 싶다.


길들이기. 생텍쥐페리는 <어린 왕자>에서 여우의 입을 빌어 이렇게 말했다. 길들인다,는 것은 관계를 맺는다,라는 뜻이며, 길들이기 위해서는 참을성이 있어야 한다,고. 길들여지고 싶은(혹은 길들이고 싶은) 대상이 나타난다는 것은 기쁜 일이다. 사랑의 기초이니 말이다.


# 길들이기(혹은 길들여지기): 나는 왜 그의 연주에 매혹되는가? 왜 길들여지고 싶은가? 곰곰이 생각하다가, 나의 초라한 음악 지식과 빈곤한 언어를 메워줄 대상을 찾아 의지하기로 한다. 그런 점에서 앙드레 지드의 <쇼팽 노트>만큼 적합한 책도 드물 것이다.



# 조성진과 쇼팽 노트: 프랑스 지성을 대표하는 작가이자 비평가인 앙드레 지드가 아마추어 피아니스트로서 쇼팽을 평생 깊이 사랑했다는 것은 그동안 몰랐던 사실이다.


쇼팽은 최초로, 웅변적으로 전개되는 음악을 일절 배제했다. 쇼팽의 관심사는 한계를 줄이고 여러 표현 방법들 중에 꼭 필요한 것만 택하는 것, 오직 그것뿐이었다. 예컨대 쇼팽은 바그너 식으로 자신의 감정에 음을 싣지 않고 음 하나하나에 감정을 실었으며, 심지어 ‘책임감을 실었다’고까지 나는 말하고 싶다.

(앙드레 지드, <쇼팽 노트>, 포노, ‘헌정의 글’ 중에서)


옳거니, 이거였구나. 내가 막연하게만 생각하던 것을 앙드레 지드가 이토록 일목요연하게 표현해주다니. 그러나 이것뿐만이 아니다. 그는 세밀한 이론적 지식에 전문 연주가에 준하는 피아노 감각, 그리고 언어를 결합해 쇼팽의 곡에 관한 한 풍부하면서도 예리한 글들을 풀어냈다.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조성진의 연주를 듣는 내내 이 글들이 마치 조성진의 연주에 대한 즉석해설처럼 느껴졌다는 점이다.


앙드레 지드는 쇼팽의 곡들을 자주 보들레르의 <악의 꽃>에 견주어 언급한다. 쇼팽과 보들레르의 수작들이 굉장히 강렬한 집중과 의미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라고 밝히면서. 그는 쇼팽 곡을 마치 리스트 곡 치듯이 연주하는 기교파 연주가들을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본다. (이 대목에서 나는 랑랑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쇼팽은 그런 연주자의 손에 잡히지 않는다. 피아노 치는 쇼팽은 늘 즉흥 연주하는 모습이었다고 한다. 다시 말하자면 끊임없이 자기 생각을 조금씩 조금씩 탐색하고, 지어내고, 발견해가는 것처럼 보였다는 말이다. 만약 그 곡이 우리에게 연속적으로 죽 형성되어가는 것으로서가 아니라 이미 완벽하고 정확하고 객관적인 일체로서 표출된다면, 이런 류의 매혹적인 망설임, 놀람, 황홀 같은 것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 어쨌든 연주자의 조급한 움직임 속에 들어 있는 참아내기 힘든 자신감을 배제하고 연주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 조금씩 조금씩 연주자의 손가락 아래서 빚어지는 악구들이 그 사람으로부터 우러나온 것처럼 보이고, 듣는 이를 연주자의 황홀경 속으로 들어오라며 은근히 불러주는 것이 나는 좋다.

(같은 책, 1장 ‘쇼팽 노트’ 16p)


아, 나는 조성진의 연주에서 앙드레 지드가 그토록 강조해마지 않던 “걸어가야 비로소 풍경이 조금씩 드러나는”면모를 감지한 것인지도 몰랐다.


쇼팽은 제안하고, 가정하고, 넌지시 말을 건네고, 유혹하고, 설득한다. 그가 딱 잘라 말하는 일은 없다. 그리고 우리는 쇼팽의 생각이 수줍게 머뭇거릴수록 더욱 유심히 거기에 귀 기울인다. (18p)


어찌나 적확한 말인지! 내가 처음 조성진 앨범을 들었을 때 느꼈던 그 수줍음, 그 조심스러움이 결과적으로 나를 매혹시킨 요소였던 것이다.


쇼팽을 능수능란하게 연주하는 유명 연주가들 앞에서 감탄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앙드레 지드에게는 거슬릴 뿐이다. 랭보가 들은 새의 지저귐처럼 “당신을 문득 멈추게 하고 얼굴 붉히게 하는”(랭보의 시에 나오는 한 구절) 것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쇼팽은 다시 보들레르와 나란히 서게 된다.


사람들은 쇼팽의 작품들을 가리켜 ‘불건전한 음악’이라고 말하곤 했다. <악의 꽃>에 대해서는 ‘불건전한 시’라고 했는데, 전자와 후자를 불건전하다고 한 것은 분명 이유가 같다는 게 내 생각이다. 쇼팽이나 보들레르나 완벽에 대한 강박을 똑같이 지니고 있었으며, 수사법, 미사여구, 웅변조의 전개 같은 것을 무척 싫어했다는 점이 꼭 같다. 그러나 특히 내가 말하고 싶은 사실은 쇼팽에게서나 보들레르에게서나 서프라이즈(깜짝 놀라게 하는 부분)를 사용한 점이 보인다는 것, 그리고 그 서프라이즈를 얻을 때까지 비범한 응축된 표현을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이다. (20p)


나는 조성진의 연주를 들으면서 그가 불필요한 루바토의 함정에 빠지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했다. 필요 이상 감정을 실어 음을 길게 끌지도 않으며, 필요 이상 흥분하여 빠르고 현란하게 음들을 끌고 가지도 않는다는 점을 느꼈던 것이다. 그의 절제가 단순히 겸손에서 나오는 것일까? 21세라는 나이가 믿어지지 않을 만큼 차분하고 성숙하다. (그러니까 신동 소리를 들었겠지만서도.)


조성진의 연주를 들으며 앙드레 지드의 <쇼팽 노트>를 읽는 시간은 (뜻밖에 찾아온) 즐거운 순간이기도 했다. 지드가 언어로 표현한 쇼팽 곡의 아름다움은 그의 필력만큼이나 유려한 한국의 한 젊은 피아니스트에 의해 배가되었다.


어떤 곡들을 들어보면 쇼팽이 단조에서 헤어나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내가 쇼팽을 좋아하고 그를 칭송하는 점은 이러한 슬픔을 통해,   슬픔을 넘어서 그가 기쁨에 도달했다는 점이다. 쇼팽에게서는 기쁨이 지배적이다(니체가 아주  느꼈다시피). 슈만의 어느 정도 간략하고 범속한 기쁨과는 전혀 다른 그런 기쁨, 모차르트의 지복(至福) 상통하지만   인간적이며 자연에 동참하는 기쁨, 그리고 베토벤의 ‘전원교향곡 나오는 시냇가 정경의 형언할  없는 미소가 그렇듯 풍경과 하나로 녹아드는 지극한 행복. 드뷔시와 몇몇 러시아 작곡가들이 등장하기 전에 음악에 이토록 빛의 장난이며 졸졸대는 물의 소곤거림이며 바람 소리며 나뭇잎과  소리들이 스며들어 있던 경우는 쇼팽 이외엔 없는  같다. (23p)


나는 마치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누군가 꼭 집어 이야기해줄 때 그러한 것처럼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공감했다. 혹자는 공감하지 않을 수도 있겠으나 지드가 쇼팽의 음악적 제안이 얼마나 단순한지를 밝히는 다음과 같은 구절에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쇼팽 이전의 음악가들(바흐는 제외하고)은 시인처럼 하나의 감정에서 출발한다. 일단 출발해놓고 뒤이어 그 감정을 표현할 단어를 찾는 시인처럼. 이와 정반대로 단어에서, 구절에서 시작하는 발레리의 방식처럼, 쇼팽은 완벽한 예술가로서 음표에서 출발한다(쇼팽이 ‘즉흥적으로 작곡한다’는 말이 나온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쇼팽이 발레리보다 한 수 위인 것이, 그는 즉시 이 매우 단순한 자료인 음표에 매우 인간적인 감정을 침투시켜 그것을 웅장함으로까지 확장한다.

그렇다. 이건 아주 중요한 이야기인데, 쇼팽은 음에 의해 스스로 인도도 받고 조언도 받는다. 마치 음 하나하나의 표현적 힘에 대해 명상하는 듯하다. 쇼팽의 표현력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24p)


나는 “음에 의해 스스로 인도도 받고 조언도 받는다”는 표현이 마음에 들었다. 음 하나하나의 표현적 힘에 대해 명상하는 듯하다,는 설명도 와 닿았다. 어쩌면 이러한 쇼팽 곡의 특성 때문에 ‘음 하나하나에 정성을 담으려는’ 조성진의 섬세하면서도 사색적인 태도에 끌렸는지도 모르겠다. 지드의 표현대로라면 “자기를 돋보이게 하는 데 집착하지 않는다는 점, 자기에게 적합한 템포로 쇼팽 곡을 연주하려는 용기를 보인다는 점” 때문일지도 모르고.


모든 명연주가들이 연주하는 대로 친다면 남는 것은 거의 ‘효과’밖에 없다. 다른 모든 것은 듣는 이가 지각할 수 없는데, 이 지각할 수 없는 부분이 특히 중요하다. 어떤 음표도 무시할 수 없는, 어떤 수사법도 어떤 동어반복도 들어가지 않은, 그저 ‘채워 넣기’에 지나지 않는 것이 전혀 없는 그런 곡의 비밀이 바로 이거다. 다른 수많은 작곡가들-심지어 가장 위대한 작곡가들-의 음악에서 종종 그러하듯이 말이다. (29p)


아직 조성진 표 쇼팽에 (즐거이) 길들여지고 있는 중인 나로서는 그가 쇼팽 스페셜리스트를 넘어서 자신만의 템포로 다른 위대한 작곡가들의 곡에 파고들고 스며들기를 바란다. 스스로도 밝혔듯 “과시적인 작품은 지양하고, 집중적으로 탐구하고픈 작곡가와 음악을 통해 자신을 비추어보고 싶은 마음이 있는” 이 젊은 피아니스트에게 나는 진심으로 응원의 박수를 보내고 싶다. 마음의 박수만 보내면 안 될 테지. 그의 앨범이 나올 때마다 기꺼이 사서 듣는 것도 팬의 중요한 역할일 것이니.


(20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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