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은 특별한 보통의 존재

고급 수용자로 사는 것에 관하여

by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의 꿈을 적는 칸 앞에서 늘 주저하게 된다. 학년 초마다 담임 선생님이 돌리는 설문지에는 '아이의 꿈/장래희망'을 적는 칸과 더불어 '부모가 원하는 아이의 미래 직업' 칸이 항상 따라나온다.


그 나이 또래가 그렇듯 수시로 바뀌는 '꿈' 혹은 '장래 희망'은 딱히 구체적이지도 현실적이지도 않다. 어쩌면 뾰족히 생각해둔 것이 없기에 꿈을 강요하는 문화 속에서 마지못해 추려낸 몇 가지 옵션 정도일 확률도 높다.


# 꿈을 권장하는 사회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잘하는지, 어떤 일을 하며 어떻게 살고 싶은지를 '안다'는 것은 굉장한 일이지 않은가. 평생에 걸쳐 그것을 알고 찾아내려 애쓰는 이(어른)들도 부지기수인데. 요즘 아이들은 어렸을 때부터 구체적이고 현실적으로 자신의 꿈을 설계하고 가급적 빨리 실행 계획을 세워 실천해나가도록 요구(=강요)받는다. 꿈이 없다는 게 부끄러운 일은 아닐 텐데, 꿈이 없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는 없는 현실.


어렸을 적 남편은 꿈이 뭐냐는 선생님의 질문에 '없는데요'라고 불쑥 말했다가 뺨을 얻어맞은 적이 있다고 했다. 실제로 없어서 없다고 솔직히 말한 것뿐인데 선생은 그것을 반항과 무례로 읽은 것이다. 한 대 후려치고 나서 선생은 다시 물었다고 한다. 네 꿈이 뭐야? 남편은 뭐라도 둘러대지 않으면 안 되겠다 싶어 생각나는 대로 말했다 한다. 대통령이든 과학자든 뭐 그런 따위의 정형화된 대답 말이다. 어린 마음에도 살고자 하는 생존본능이 발동했을 것이다. 지금도 그때 생각을 하면 분하고 억울하다는 그를 보며, 그 무지막지했던 시절(선생의 폭력이 정당화되던)에 비하면 '꿈을 권장하는' 요즘의 방식은 상당히 부드럽고도 교묘해지지 않았나 싶다.


꿈을 권장하는 사회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바람직하고 아름다운 일. 다만 꿈이라는 것이 평범하기보다는 (사회적 기준에서) 특별하고 대단한 것이어야 한다는 전제가 암암리에 깔려 있다는 것. 누군가에겐 '내가 그저 나로 사는 것' 혹은 ‘아무것도 되지 않는 것’이 꿈일 수도 있을 텐데.


인디 밴드 '언니네 이발관'의 리더인 이석원은 그의 산문집 <보통의 존재>(2009)에서 이렇게 쓴 바 있다. 2008년 5집 앨범 <아주 보통의 존재>가 널리 알려지고 나서의 일이다.


내 나이 서른여덟. 나는 아직도 생의 의미를 명확하게 발견하지 못했다. 그래서 무엇을 하며 살 것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여전히 고민한다. 다만 분명한 건 누구나 배우가 되고 감독이 되고 싶어하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누구나 배우나 감독이 될 자질이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고. 그러니 남은 생을 사는 동안, 내가 그저 관객의 안온한 자리를 지키며 살아간다 한들 꿈이 없다 뭐라 할 수 있을까.

청소년들이여, 꿈이 없다고 고민하지 마라.

그럼 관객이 되면 되니까.

그뿐이다.

- 이석원, <보통의 존재>, '꿈' 중에서



# 생산자로 사는 삶, 소비자로 사는 삶


관객이 되는 꿈. 보통 '창작자'가 되는 꿈은 가져도 '감상자'가 되는 것을 꿈으로 삼지는 않는다. 삼십대 중후반까지 나를 괴롭히던 생각은 '나는 왜 생산자로서 살지 못하는가'였으니까. '소비자'로만 사는 나의 자리를 '전락'의 위치로 여겼으니까.


먹거리를 생산하는 농부, 가구를 만드는 목수, 영화를 제작하는 사람, 그림을 그리는 사람, 가죽 제품을 만드는 사람, 방송을 제작하는 사람, 도자기를 굽는 사람, 옷을 짓는 사람, 음악을 만드는 사람, 책을 만드는 사람 등등. 자격지심의 발로였는지 순진한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는지, 주위를 둘러보면 생산자들(이라고 내가 여긴 사람들)만 눈에 띄었다. 당시의 나 또한 분명 무언가(기획안이라든가 상업적 텍스트와 비주얼 따위)를 만들고 있었을 게 틀림없지만, 그것이 온전히 나로부터 시작되어 나의 결과물로 수렴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 때문에 가벼이 여겼을 것이다.


생산자로 살지 못하는 상태를 고민하는 것 역시 무용한 일이었고, 이런 무용한 고민을 가진 또 다른 친구와 무용한 대화를 나누는 것도 무용한 일이었다. 세월이 흘러 이런 무용함 자체를 더이상 무용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나이에 이르렀을 때, 예컨대 문학과 예술의 소위 '쓸모없음의 쓸모'를 체감하게 되었을 때, 어느 날 그 친구와 내린 결론 중 하나는 다음과 같다.


생산(창작)하고자 하는 욕망에서 정성껏 소비(수용)하는 태도로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그녀가 어디선가 들었다는 'Noble Appreciator'라는 표현에 완전히 꽂힌 나는 그 적확함에 크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Noble'이라는 단어가 어떻게 적절히 번역되어야 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의역하자면 ‘고급 수용자(감상자)' 정도가 될까? 절실함, 치열함, 정확함, 치밀함, 뭐 이런 종류의 (창작자가 갖춰야 할) 덕목이 수용자(감상자)의 태도에도 온당하게 깃들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문학비평가 테리 이글턴은 독일의 '수용이론'을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현대 문학이론의 역사를 '작가에 대한 관심'(낭만주의와 19세기), '텍스트에 대한 전적인 관심'(뉴크리티시즘), '최근 수년간에 걸쳐 두드러지게 나타난 독자에 대한 관심의 전환' 등 세 시기로 대충 구분해볼 수 있다. 독자 없이는 문학텍스트가 존재할 수 없음에도 이상하게도 항상 독자는 그 셋 중에서 가장 특권 없는 존재였다. 문학텍스트는 서가에만 존재하는 건 아니다. 문학텍스트는 책읽기의 실천을 통해서만 구현되는 의미작용(siginification)의 과정이다. 문학이 생기기 위해서는 독자도 작가만큼이나 필수적인 존재라는 것이다.

- 테리 이글턴, <문학이론입문>, 인간사랑, 152쪽



일찌기 롤랑 바르트가 말했던 '저자의 죽음'과 '독자의 탄생'도 이와 같은 맥락일 터이다.


“이제 우리는 글쓰기에 그 미래를 되돌려 주기 위해 글쓰기의 신화를 전복시켜야 한다는 것을 안다. 독자의 탄생은 저자의 죽음이라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 롤랑 바르트, <텍스트의 즐거움>, 동문선, ‘저자의 죽음’, 35쪽



사르트르가 <문학이란 무엇인가>에서 밝히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사르트르의 저서가 명백히 하고 있는 것은 한 작품의 수용은 그 작품의 '외적인' 수용 - 북리뷰와 책 판매의 문제 - 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이다. 단지 그것은 작품 자체를 구성하는 한 차원이라는 것이다. 모든 문학텍스트는 저마다 잠재적인 독자에 대한 인식으로 이뤄지며, 그 작품이 지향하는 수용자의 이미지를 담고 있다고 말한다. 즉, 모든 문학 작품은 볼프강 이저가 '내포된 독자(implied reader)'라고 부른 것을 자체 내에서 약호화하며, 작품이 예상하는 '수신자(addressee/destinataire)'의 유형을 그 모든 제스처 속에서 암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른 종류의 생산에서처럼 문학생산에서도 '소비'가 생산과정 자체의 일부이다."

- 테리 이글턴, 같은 책 167쪽



# 고급 수용자로 사는 삶


‘소비’가 생산과정 자체의 일부라는 것. 적확한 말이다.


이석원이 말했듯 “그저 관객의 안온한 자리를 지키며 살아간다”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여기에서 좀더 나아가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 관객이 되는 꿈, 보통의 존재가 되는 꿈에서 조금 더 특별해지는 것.


생산의 일부가 되는 ‘절실한’ 소비자,

저자를 죽이는 ‘치밀하고 부지런한(쓰는)’ 독자,

텍스트의 의미작용을 실천하는 ‘치열한’ 수용자,

미학적 대상에 대한 ‘정확한’ 감상자가 되는 것.


요컨대 '고급 수용자'로 사는 것.


조금은 특별한 보통의 존재 말이다.


(2020-4-28)

이전 08화꿈, 무의식이 보내는 메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