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수경의 시 '그날의 사랑은 뜻대로 되지 않았네'에 부쳐
____ 추억. 추억의 앞자리에 빈칸을 놓아두면 사람들은 어떤 형용사를 골라 넣을까.
소중한, 아름다운, 즐거운, 과 같은 밝고 긍정적인 단어들이 놓일 확률이 높지 않을까. 반복된 학습에 의한 클리셰. (슬픈, 이라는 형용사도 쉽게 떠오르지만 슬픔은 추(醜)보다 미(美)에 가까운 말이지 않던가.)
클리셰를 파괴하는 것은 작가들의 의무이자 특권이다. 시인 허수경은 자신의 시에서 이렇게 말했다.
(…) 과거는 소멸되지 않았으나 우리는 소멸했네
오 오 나는 추억을 수치처럼 버리네
내 추억에서 나는 공중변소 냄새
- 허수경,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창비, 2001), '그날의 사랑은 뜻대로 되지 않았네' 중에서
추억이라는 단어 앞에 ‘변소 냄새 나는’이라는 표현이 들어갈 수 있다는 것.
수치처럼 버리는 추억, 공중변소 냄새 나는 추억이라니!
추억과 기억의 차이는 무엇일까. 언뜻 떠오르는 부분집합 표시, A ⊂ B. (A는 B의 부분집합이다.) 내 마음대로 대입해본다. A=추억, B=기억,이라고. 그렇다면 추억은 기억의 부분집합이다,라는 명제가 성립한다. 싱거운 생각이다. 사전을 찾아본다.
추억(追憶): 지나간 일을 돌이켜 생각함. 또는 그런 생각이나 일. (유의어: 그리움, 회상)
기억(記憶): 1. 이전의 인상이나 경험을 의식 속에 간직하거나 도로 생각해 냄. 2. (심리) 사물이나 사상(事象)에 대한 정보를 마음속에 받아들이고 저장하고 인출하는 정신 기능. (유의어: 생각, 암기)
추억이 기억의 부분집합일지도 모른다는 나의 가정은 그럴듯한 걸까. 기억이 좀더 포괄적인 영역으로 다가오는 것은 사실이다. 이전의 인상이나 경험이 의식 속에 차지하고 있는 총체적 공간(및 호출될 수 있는 가능성). 그것이 기억이라면, 추억은 그 공간(및 가능성)에 적극적으로 접속하려는 움직임(의 집합)을 떠올리게 한다. 추억 ⊂ 기억. 과연 말이 되는 걸까. 기억에 접속하려는 움직임을 추억이라 한다면 왠지 추억은 기억의 부분집합이 아닌 바깥의 영역일 것만도 같다.
기억에 남아 있는지조차 모른 채 무의식 속에 묻혀 있던 기억의 요소(이미지, 소리, 촉감, 냄새, 맛)마저 바깥으로 꺼내려는 움직임. 기억을 과거로 거칠게 등치시킨다면, 추억은 그 과거의 영역을 현실로 호출해내는 행위인지도 모른다. 기억을 명사로, 추억을 동사로 간주하려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추억하는 나,는 과거라는 방과 현재라는 방 사이에 서 있다. 추억을 굳이 공간화한다면 (벤야민이 말한 매력적인 개념인) ‘문지방 영역’ 같은 것이 아닐까. 어쩌면 ‘문지방에 서 있는 것’과 같은 '행위'일지도 모르고. 저쪽도 이쪽도 아닌 ‘건너가는’ 지점에서 양쪽을 동시에 포착하고 조망하는 것.
나쁜 기억보다는 좋은 기억을 떠올리고 싶어하는 인간의 성향 때문에 ‘추억’은 부정적 기억보다 긍정적 기억에 보다 가까운 말처럼 여겨진다. 굳이 돌이키고 싶은 기억이 나쁜 것일 확률은 높지 않으니까. 그래서일까. ‘추억’이라는 단어에는 유의어로 그리움,이라든지 회상,이라든지 하는 아련한 뉘앙스의 단어들이 따라붙는다. 한편 ‘기억’에 딸려오는 유의어가 생각, 기록, 암기 같은 건조한 것들이라는 점도 ‘추억은 (대체로) 긍정적 기억을 끌어오는 것’이라는 나의 가정을 뒷받침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일반적인 이야기일 뿐이다. 드러난 현실과 그 이면의 세계까지 탐색하는 작가(및 예술가)들에게 ‘추억’은 과거의 지점을 현실로 불러내어 새롭게 재구성할 수 있는(혹은 재구성해야 할) 모든 가능성의 영역일 것이다. 기쁨과 슬픔, 명랑과 우울, 고통과 즐거움, 무력과 활기, 몽상과 성취, 불행과 꿈, 사랑과 증오 등등 그 모든 것을 아우르는 삶의 지대에서 불현듯 켜지는 촛불과도 같은 것. 추억이라는 것은 이렇듯 내가 딛고 있는 발밑의 진흙, 즉 현실을 동그랗게 비춰주는 (내 머릿속의) 활동사진 같은 것 아닐까. 환한 동그라미 바깥은 캄캄한 미래일지라도, 그 작은 반경 안의 불빛을 랜턴 삼아 어떻게든 내 느린 발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
철학자 (故) 김진영은 자신만의 고유한 렌즈로 벤야민을 들여다보면서 그의 사유를 ‘꿈꾸는 우울’로 표현한 적 있다. 벤야민이 말하는 역사철학의 핵심은 미래가 아닌 과거에 있다. 구원의 대상으로서의 과거, 현재에게 구해달라고 메시지를 전하는 과거의 신호. 따라서 현재의 의미는 지나간(그래서 죽었다고 생각되는) 과거를 되살리는 작업의 장으로서 가능하다는 것. 허수경의 시에 나오는 문구처럼 ‘우리는 소멸했어도 과거는 소멸하지 않았’기에. 그래서 시인과 작가들은 수치스럽고 변소 냄새 나는 추억을 애써 (고통스럽게) 불러내어 현재에 부려 놓는지도 모른다. 지금-여기의 의미를 다시 찾고자.
지금-여기의 의미를 다시 찾으려는 일련의 추억 활동. 그 정서를 ‘꿈꾸는 우울’이라고 불러도 어색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2020-8-27
*그림: Edvard Munch - Melancholy (18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