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중 단편 '내 의자를 돌려주세요’에 부쳐
"현재 당신은 글을 쓰고 싶어 하는데, 그다지 열의가 없는 것으로 보아 이것이 가장 정직한 욕망인지 확신하지 못하는군요. 당신은 중산층의 삶에 공포를 느끼지만, 한편으로 중산층의 삶에서 완전히 멀어질까 봐 두려워하고 있어요. 이쪽이든 저쪽이든 소질이 없다면 넌덜머리를 내고 있는 게 가장 정확한 상태일 겁니다. 이것에 대한 처방은 딱 한 가지입니다. 행동하고 또 행동할 것! 아무리 짧더라도, 혹은 완전히 무위의 시간을 보내더라도 저에게 와주십시오."
- 김성중, <개그맨>, 문학과지성사, 2011, ‘내 의자를 돌려주세요' 중에서
김성중 작가의 2008년 등단작 '내 의자를 돌려주세요'의 앞부분이다. 구립도서관에서 만난 의자 하나가 글을 쓰고자 하는 ‘나’에게 말을 걸어온다. 등단 전까지 작가 자신이 겪었을 심리적 흔들림의 궤적을 '의자'의 말을 빌어 고스란히 전하는 듯하다.
김성중 작가가 단편 ‘상속’으로 2018년 현대문학상을 수상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다시 읽어본 작품. ‘내 의자를 돌려주세요’를 처음 읽었을 때 가슴이 쫄깃해지는 기분이었다. 말을 걸어오는 사물,이라는 (나를 오래도록 붙잡아온) 모티프를 이토록 멋진 단편으로 뽑아낸 신인의 역량에 신선한 자극을 받았달까.
“언제나 예술가의 후원자가 되는 삶을 동경해왔”다던 작중 도서관 의자는, 글 쓰는 이가 글을 쓰는 동안 품어줄 몸뚱이 역할이자 영감의 원천을 자처한다. ‘나’는 이 굉장한 달변가 위에 앉아 줄줄이 흘러나오는 문장들을 받아 적기 시작한다. 문장은 모두 의자에서 나오고 ‘나’는 그저 받아 적는 타자수이다. ‘나’는 스스로를 “이국의 포로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옮겨 적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번역가”라고 생각한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한 포장마차에서 플라스틱 의자와 대화를 나누게 된다. 자신 말고도 의자와 우정을 나누는 사람이 더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나’는 문득 울고 싶어진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간 함께 이야기를 만들어왔던 도서관 의자와 의견 차이로 말다툼을 벌이게 되고, ‘나’는 태업으로 응수하며 ‘의자와 거리 두기’를 지속한다. 결국 돈을 벌 수 있는 새로운 일거리가 들어오자 ‘나’는 의자에게 작별인사를 건넨다. 이야기는 완성되지 못하고, 이별의 순간 ‘나’는 그간 품어온 복잡한 애증의 감정을 폭발시키며 의자를 넘어뜨린다. 꿈을 꾸어온 나날에 펼쳐진 파란 창공이 사라지고 검고 더러운 우주가 드러난다. 이후 어떤 의자도 ‘나’에게 말을 걸어오지 않는다.
어느 날 ‘자신이 나무인 줄 아는 공원 벤치’가 오랜만에 ‘나’에게 말을 붙여온다. 나무와 자신은 형제라고 생각하며 나무를 사랑하던 공원 의자. 어느 밤, 나무가 번개로 몸이 부러져 죽자 의자는 긴 잠에 빠진다. 공원은 꿈으로 가득 찬다. 단편의 뒷부분을 옮겨본다.
나무의 꿈을 너무 많이 꾼 것일까? 시간이 지날수록 의자의 몸은 점점 녹색으로 변해갔다.
“늙을수록 푸르러지는 몸뚱이. 그런 게 존재할 수 있나요?”
이 말을 듣고 나는 공원 의자를 내려다보았다. 온몸에 이끼가 껴서 앉을 데도 마땅치 않은 낡은 의자를. 비로소 나무가 되어버린 의자를. 당신이 나라면 무슨 말을 해주겠는가? 난 너무 가벼운 엉덩이를 가지고 있어서 이런 순간을 감당하기가 어렵다. 푸름에 몸을 내준 채 녹이 슬고 있는 저 의자는 좀 더 무거운 엉덩이, 백지의 끝까지 걸어간 자에게 말을 걸었어야 했다. 나이 오십에 초경을 치르는 여자처럼 수줍음이 가득 차 자신의 몸을 내보이는 그에게 ‘당신은 늙고 나서 젊어졌다’는 모순을 멋있게 말해줄 요량이 내게는 없는 것이다. 만약 내가 꿈꾸기를 다시 시작한다면 그처럼 푸른 몸뚱이를 가질 수 있을까?
오래 전 나에게는 도서관 의자가 있었다. 그가 없다면 나는 아무것도 쓸 수 없다. 세상엔 쓸 만한 이야깃거리들이, 그러니까 진리라는 것들이 아무 데서나 옷 법고 눕는 여인처럼 떠다닌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받아 적으려면 내 도서관 의자가 필요하다. 나는 타자수, 그는 내 두뇌이자 영감이기 때문이다. (같은 책)
작가의 말,에서도 김성중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제 나는 세상 어디에나 멋진 이야기들이 떠다닌다는 것을 알고 있고, 대단한 작가일수록 이야기를 가둔 벽돌의 색이 옅어진다는 것을, 옅어지다 못해 투명해지기도 한다는 것을, 그리하여 사막 한가운데 신기루처럼 홀연히 독자 앞에 이야기를 펼쳐 보인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 문학의 영웅들이 투명한 벽돌을 얻을 때까지 걸었을 여정을 생각하면 참으로 아득하다.
투명한 벽돌을 얻기까지 걸었을 김성중 작가의 여정을 생각해도 아득하긴 마찬가지다. 첫 소설집 <개그맨>을 통해 본격적으로 쏘아 올린 김성중 표 소설들은 <국경시장>에서 한층 무르익고 정교해졌다. 등단 전 도서관 의자에 앉아 있던 작가 지망생의 긴 시간은 영감을 ‘기다리는’ 시간이 아니었을 것이다. ‘행동하고 또 행동하는’ 시간이 양질 전환을 일으켜 영감을 만들어냈을 테니까. 쓰고 또 쓰는 과정에서 그녀의 별난 상상력은 날개를 달고 허공에 둥실 떠올랐으리라. 또 다른 단편 <허공의 아이들>에서 끊임없이 하늘 위로 올라가는 집 속의 소년과 소녀처럼.
기다리지 않고 ‘만들어내는’ 영감에 대해 우리는 익히 들어왔다. “영감(靈感)이 아닌 오직 작업이 있을 뿐”이라고 말한 이는 로댕이었나. 많은 예술가들이 불꽃같은 영감보다는 매일매일의 성실한 작업을 더 신뢰한다는 것도 우리는 알고 있다. 각자의 의자에 앉아 성실히 작업하다 보면 영감은 만들어지는 것인지도. 쓰면서 생각하고 생각하며 쓰는 과정 자체가 영감의 시간이라는 것도 믿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기다린다. 영감이라는 의자를. 찰나의 스침과 계기 그리고 의지를. 의자가 의지가 되는 화학적 변용의 시간을.
이 단편의 마지막 두 문장은 다음과 같다.
오늘 같은 오후에 나는 내 인생에게 말하고 싶어진다.
내 의자를 돌려주세요,라고.
돌려받을 무엇을 그리워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아름다울 수 있을까. 아니, 돌려받을 그 무엇이 내게 있기나 한 걸까. 오늘 같은 오후, 나도 내 인생에게 묻고 싶어진다.
다시 꿈꾸기 시작하면 의자는 나무가 될 수 있을까,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