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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땡복 May 25. 2023

'돈이 없어서 밥을 굶으니 돈 좀 보내주시오'

자발적 좋좋소(좋은 게 좋은 것 아니겠소?) 지원. 행복의 시작?

[경남사람 서울 상경기]


퇴사하고 집으로 가는 길. 서울의 퇴근시간이라 2시간은 넘게 걸렸으려나.

나름 오래 연애했던 여자친구(현 내무부장관)는 내 결정을 존중해 주었다. 나보다 4살 연하인데, '밥 사주겠다'는 멋진 멘트에 그날은 누나라고 불렀다.


수도권에서 서울로 출퇴근하는 대부분의 사람은 철학자다. 그들의 긴 출퇴근시간은 혼자만의 사색에 잠기기  좋으며 눈동자 안엔 다들 나름의 계획이 있으리라.

나 역시도 집으로 가는 지하철 안에서 평온한 표정으로 생각을 정리했다.




"와씨...조지놨다...우짜지"

('아이고, 큰일 났다. 어떡하지?'의 경상도 방언)


커다란 결단 앞에 세상이 아름다워 보임도 잠시, 철학자도 밥은 먹고살았으니 각종 명언을 남긴 게 아니겠는가. 

배고픔 앞엔 그 누구도 소크라테스가 될 순 없었고, 지난 화에서 '내면의 평화'를 외치던 철학자 땡복은 순식간에 밥 걱정을 하고 있었다. 


당장의 허기, 다음끼니, 친구에게 줄 집세, 통신비...

땡복은 그나마 일했던 10일 치 급여도 다음 달 정산해서 넣어준다는 대표에게 차마 '돈이 없어서 밥을 굶으니 돈 좀 빨리 보내주시오'란 연락을 할 순 없었다.


오케이. 절망은 딱 10분만. ENTJ 땡복은 현실을 깨닫고 구인구직 앱을 켰다. 이번엔 배가 고프다고 닥치는 대로 이력서를 넣을 수 없었다. 학습했지 않는가.

이 회사가 건전한 회사인지, 무언가 미심쩍은 곳은 없는지, 대표의 평판은 어떠한지(몇몇 앱에선 볼 수 있다.), 조직이 돌아가는 분위기는 어떤지 배고픈 와중에도 나름대로 따질 건 다 따지며 회사를 찾았다. 그리고 눈에 들어온 한 곳.


-주민이 참여해 만든 성역 없는 지역 언론, 어떤 세력에게도 독립된 정론을 지향 

-지역의 환경친화적 발전과 교육문화예술에 기여하는 것을 목표로 함

-규모가 크진 않으나 양심적인 기사를 쓰기 위해 노력함

-편집권 독립.

......


'1년 안에 연봉 2배 인상 가능'같은 휘황찬란한 문구는 없었다. 건강검진, 보너스, 자녀 학자금 지원, 경조사비 등 그 당시 기업들이 내세우던 복지 또한 없었다.

다만 이 상황에 놓인 내 눈에 들어온 건 회사소개 글 중 '양심적인'이란 문구였다.

그리고 그 뒤에 적혀있는 글이 땡복의 가슴을 때렸다.


-시민들의 알 권리를 위해서 노력하는 ㅇㅇ지역언론사입니다. 규모는 작으나 주민이 출자한 후원금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사업의 확장을 위해 마케터를 모집합니다.


'연봉은 면접 후 협상'. 규모는 좋좋소(좋은게 좋은 것 아니겠소?). 당연히 좋은 처우를 기대할 수 없었다.

그러나 주식리딩방 대표와는 정반대로 솔직하게 공개한 내부사정과 명확히 명시해둔 내 임무에 이곳에선 '양심을 지키면서도 일할 수 있겠다' 싶었다.


회사는 생년월일, 학력, 어릴 적부터의 자기소개 등이 모두 갖춰져 있는 전형적인 '옛날 자소서'를 요구했다.

80곳에 이력서를 제출해 온갖 이력서 양식을 보유하고 있던 땡복은 곧바로 기본 스타일의 '땡복 이력서.pdf'를 보냈다.




심지어 회사는 거주하고 있는 친구 집과도 가까웠다. 그날 밤 10시, 이젠 조심성이 아주 철저해진 땡복은 회사 주소가 적힌 곳으로 슬그머니 찾아갔다.

번화가도 외지도 아닌 그 어딘가 경계 구석에 자리 잡은 2층 건물. 1층은 적어도 20년 맛집으로 보이는 오래된 식당이었고 언론사는 페인트가 벗겨진 식당 건물 2층에 있었다.

물론 들어가 보진 못했다. 불이 꺼져서였다기보단 친환경 보안시스템 '멍콤' 한 마리가 목줄에 묶인 채 내 앞을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뒤돌아가며 가로등 불빛에 비친 회사를 바라보았다. 유리창에 붙여진 회사 로고 스티커는 색이 바래 떨어지기 직전으로 보였고, 누가 봐도 좋좋소(좋아요 좋아요 소 굿) 분위기를 풀풀 풍기고 있었다.

그러나 땡복은 낭만의 20대 후반이 아니겠는가. 그 자리에서 내 마음을 지킬 수 있는 회사이길 기도하며 집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과연 땡복은 작은 지역언론사의 선택을 받을 수 있을까?

(썸네일 스포 주의)

'나 잠시 왔다 갑니다'. 땡복을 출산한 캘리그라피 작가의 솜씨. 해운대 백사장에 나뭇가지로 글을 써놨다. 물론 이 작품은 지금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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