찢어진 저금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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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

아이들에게도 희망을 심어주며 매일 페트병에 돈을 넣는 의식을 거행했다.

그 의식은 매우 경건하고 사뭇 진지했다.

초반에는 막내 서연이가 두 손을 모으고 무언가 기도하는 듯한 포즈를 취하기도 했다.

그 작은 두 손은 무엇을 빌었을까.


어느덧 페트병이 가득 채워져 갔다.

꽉꽉 눌러 담으려면 아직 공간이 한참 남았지만 겹겹이 쌓인 현금이 볼수록 듬직했다.


‘역시! 돈이 최고야!’


돈이 쌓이면 쌓일수록 여행에 대한 열망은 조금 더 구체적으로 변해갔다.

여름에 가면 좋을까, 가을에 가면 좋을까?

바다가 좋을까, 산이 좋을까?

좀 더 무리해서라도 매일 모으는 금액을 올려 볼까?

행복한 상상은 매일 날개를 달고 먼 곳까지 다녀오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들 아빠의 그림자 드리운 얼굴을 마주하게 되었다.

이제 겨우 마음을 잡고 무언가를 시작하겠다는 그인데, 그런 그가 돈이 필요하단다.

지금 그 돈이 없으면 업무차 중요한 일이 무산된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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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일 때문에 필요한 돈일까.

내막을 알기가 두려운 난 한껏 움츠러든다.

정말이지 나답지 못하게.


누군가에게는 턱없이 적은 돈일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나에게만큼은 결코 적은 돈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언제나처럼 진지하게 들어주고 있는 나.

무엇이 그렇게도 두려운 걸까.


어릴 때부터 개미처럼 모으는 게 습관이 된 나였기에

없는 살림에도 조금씩 모아 두었던 돈을 급할 때 사용하곤 했었다.

그러려고 모은 돈이었을 테지만 그 돈을 내 손으로 써 본적이 없던 난 어쩐지 좀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그런 나를 꿰뚫고 있던 아이들 아빠는 이렇게 종종 돈 이야기를 꺼내곤 했다.

그동안 내가 버릇을 잘못 들였던 걸까.

나는 돈이 어디서 솟아나는 줄 아나?

그 돈을 내가 무슨 수로 만드나.


탄탄대로일 줄만 알았던 나의 결혼 생활은

부끄러워 누구에게도 차마 말하지 못한 가난과 온갖 형태의 폭력 속에서

몸을 말아 웅크리며 끝없이 추락하기도,

그 안에서 꾸역꾸역 행복을 찾기도 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나는 정말 내가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아니, 행복해야만 했으리라.

아이들이 나를 지켜보고 있으니, 나는 절대로 무너지면 안 되었다.

누구보다 해맑은 얼굴을 하고, 그 가면 뒤에 숨어 현실을 외면하고 도망치려 했다.

이런 삶이, 메마른 사막처럼 끝이 보이지 않을 때면 깊은 우울감에 빠져들곤 했다.


돈이 당장 필요하다는 아이들 아빠의 말을 난 또다시 흘려들을 수가 없었다.

그저 머릿속엔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저금통...


그러면 안 된다는 생각보다, 지금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나의 무기력은 해서는 안 될 생각으로 나를 이끌었다.


결국.

찢어진 저금통은 텅 빈 채로 쓰레기통에 버려졌다.

나와 아이들의 희망도 그 자리에 처참히 버려졌다.

버려진 걸까, 아니면 내 손으로 차갑게 내동댕이친 걸까...


끝을 알 수 없는 자괴감과 죄책감으로 한동안은 세 딸들의 낯을 바로 볼 수 없었다.

그 초롱하게 빛나던 눈빛들이 떠올라 나를 매섭게 할퀴었다.


어쩌면 나는 이렇게 될 거라는 걸 처음부터 알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그렇게도 상상 속을 헤매고 그 안에서 행복을 찾았으리라.


언제나처럼 며칠 앓고 나면 괜찮아지겠지.

그리고 미련하게도 다시 페트병을 채우며 꾸역꾸역 헛된 꿈을 꾸고 있겠지.


그 뒤로 찢어진 채 버려진 페트병은 하나가 더 추가되었고,

그 이후 더 이상은 저금통을 만들지 않았다.


하지만 결코 그 어떤 꿈도 헛되지 않다는 걸 보여 줄 거야.

나는 똑같이 웃는 얼굴의 가면을 쓰고 마음속으로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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