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리법 기준 인원 표기에서 ‘표준’의 힘을 배우다.
긴 글을 계속해서 쓰려니 글 발행 간격이 길어지는 것 같아, 짧은 글을 한 편 올린다.
코로나가 기승을 부려 재택근무를 하는 동안, 세 끼니를 다 지어서 먹는 일이 참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때 [오늘의 일인분 일식]이 정말 큰 도움이 되었다.
[오늘의 일인분 일식]은 제목대로 일인분 상차림에 맞춘 요리책이다. 재료의 양 표기도 1인분 기준으로 되어 있고, 적은 양을 조리할 때의 팁도 곳곳에 나온다. 혼자 밥을 해먹기 위해 많은 재료를 구비하기는 어려우니, 몇 가지 안되는 재료로 만들 수 있는 다양한 조리법 위주로 구성되어 있고, 대체할 수 있는 재료도 알려준다. 조리법이 간단해 다른 재료로 바꿔가며 변주하기에도 좋다. 2인 가정인 우리집에서 사용하기에도 딱 좋았다.
평소에 인터넷에서 접하는 조리법은 대개 4인분이고, 1인분을 기준으로 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일본 가정식 요리책은 대개 1인분을 기준으로 한다. 아마도 일본 가구의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1인 가구이기 때문일 것이다. (일본의 1인 가구 비중은 2020년 기준 전체 가구 수의 38% 정도로 추정된다 - 참고자료)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상황은 어떨까?
일본의 1인 가구 비중은 70년대에 이미 20%대였고, 1980년대 말부터 빠르게 증가하기 시작해, 90년대 중반에 25%를, 00년대 중반에 30%를 돌파한다(참고자료). 우리나라는 일본보다 15년 정도 늦은 10년 즈음에 25%를, 20년에 30%를 돌파했다. 00년까지만 해도 4-5인 가구가 우리나라 가구의 절대 다수를 차지했지만, 이제는 1인, 2인, 3인, 4-5인 가구가 어느정도 균등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참고자료1, 참고자료2).
가구 구성이 이렇게 변화하는 동안 가구 구성원수에 영향을 받는 제품들 역시 변화해왔다.
레토르트 카레는 4인분이 기본이었으나, 최근 마트나 마켓컬리 등에서 살 수 있는 파우치형 카레는 대개 1인용이다(티아시아, 피코크, 고베식당, KART 등). 밀키트의 평균 용량은 2인분 기준이라고 한다(참고 자료).
밥솥 용량도 변하고 있다. 201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3인 가구를 위한 5~6인용 밥솥, 4인 가구를 위한 9~10인용 밥솥이 전체 시장의 거의 반씩을 각각 차지하고 있었다(2017년 다나와 판매량 기준). 현재의 판매량 순위는 알 수 없었지만, 전기밥솥을 검색했을 때 다나와 첫 페이지에 나오는 제품의 용량 비율은 3인, 6인, 10인의 비율이 각각 10%, 50%, 40%로, 3인 이하 가구를 대상으로 하는 제품의 비율이 더 커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요리책 역시 변화하고는 있다. 강남 교보문고의 요리 베스트 코너에 진열된 요리책 기준으로 살펴보았을 때, 예상했던 것보다 많은 절반 가까운 책이 1~2인 기준으로 조리법을 소개하고 있었다. (총 16권 중 3권이 1인분 기준, 4권이 2인분 기준). 다만 1인분 기준으로 작성된 책은 전부 일본 사람이 쓴 일본 가정식 책이었다. 하지만 백종원 씨 등 유명 요리전문가들이 쓴 3권의 책은 4인 기준이었고, 만개의레시피, 이밥차 등 커뮤니티 기반의 요리책은 1~6인까지 다양한 기준 인원으로 작성되어 있어 가족 수에 맞추려면 셈을 잘해야할 것 같았다. 기준 인원을 표시하지 않은 책도 2권이나 있었다.
언뜻 보았을 때 ‘옛날 사람들’은 4인 기준으로 레시피를 작성하는 것 같아, 호기심에 중고서점에서 80-00년대의 옛날 요리책들을 몇 권 찾아보았다. 놀랍게도 기준 인원 수가 써 있는 레시피책을 찾을 수가 없었다. [하숙정의 요리전집], [며느리에게 주는 요리책], [이지영의 요리솜씨], [베비로즈의 요리비책] 모두 조리법을 설명하는 페이지 안에는 기준 인원이 표시되어 있지 않았다. 최근 책 중에서 본문 중에는 표기되어 있지 않지만 책머리에 기준 인원 수가 4인이라고 표기한 경우가 있어, 혹시 그렇게 표현했을 수는 있을 것 같다.
책머리에 4인이라고 써 있던, 아니면 아예 기준 인원을 표시하지 않았던, 그 시절에는 4인분이 표준이었기 때문에 본문에 기준인원을 쓸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1인분 기준으로 표기를 했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4를 곱하느라 머리가 아팠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의 가구 구성 상에서는 이야기가 다르다.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가구 유형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커뮤니티 기반의 요리책에서 기준 인원 수가 매우 다양한 것도 커뮤니티를 구성하는 가구의 형태가 다양해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1인가구의 증가는 단순히 1인 시장이 커진 것을 넘어, ‘표준 가구’가 사라진 것으로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면 ‘표준 가구’가 사라졌을 때 조리법은 어떻게 표기되어야 할까? 요리 베스트 코너의 책들을 보았을 때에는 크게 세 가지 전략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1. 특정한 상황이나 분야로 범위를 좁혀, 표준 인원 수 기준으로 제공한다 - 예시) 1, 2인 가구를 타깃으로 덮밥 조리법만 다루는 요리책
2. 최소 단위인 1인분을 기준으로 제공한다 - 예시) [오늘의 일인분 일식] 등 대부분의 일본 가정식 책
3. 기준인원을 고려하지 않고, 한 번에 조리하기 편한 양을 기준으로 제공한다 - 예시) 프라이팬에서 한 번에 조리할만한 양, 닭 1 마리 기준 등.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유럽 요리책이 이렇게 작성된 경우가 많았다.
이 세 가지 전략 중에서 어떤 것이 특별히 우월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어떤 요리책을 쓰고자 하느냐에 따라 더 유리한 방법이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내가 만들고 있는 제품이 어떤 고객을 대상으로 하는지를 분명히 알아야 어떤 전략을 사용할 것인지를 정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가정에서 수시로 해먹는 요리책을 목표로 한다면, 1인분 단위로 레시피를 제공하는 편이 보다 폭넓은 독자에게 편리한 방법일 것이다. 우리나라보다 15년 앞서 가구 구성의 변화를 겪은 일본의 가정식 레시피책들이 1인분 위주로 작성된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손님 접대용 요리책을 목표로 한다면, 조리하기 편한 양을 기준으로 하고 기준 인원 수를 작성해주는 편이 더 편할 수 있다.
요리책의 기준 인원 수 표기에 ‘표준’ 가구 인원 수가 반영되는 것처럼, 어떤 제품이 해결하고자 하는 문제는 동일하더라도 가구의 구성과 같이 그 제품이 가정하는 ‘표준’이 변하기 때문에 제품이 그에 맞추어 변화해야 하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제품에서 상정하고 있는 ‘표준’이 무엇인지 의식하고 있지 않으면, 기획하는 사람에게 익숙한 것을 ‘표준’으로 가정하여 제품을 만들어버리게 될지 모른다. [오늘의 일인분 일식]에서 배운 오늘의 교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