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녀의 감정 쓰레기통이 되었다. 작년부터 이혼한다는 이야기만 몇 번을 들은건지. 자신의 불안과 분노가 치솟으면 그 감정을 담아 가정에서 있었던 일을 나에게 쏟아 놓는다. 처음 담임을 맡았을 때부터 어머니가 건강한 상태가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러려니 했다. 하소연 할 친구 하나 조차 없나보다 했다. 그렇다고 내가 친절 강박이 있는 사람도 아니다. 모든 연락에 답을 한 것도 아니다. 나름대로 걸러가며 건너뛰었다. 아이 이야기가 아니면 메시지를 읽는 것까지만. 제법 괜찮았다. 그런데 아이가 클수록 더 나빠진다.
틀어질대로 틀어진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내가 왜. 얼마나 어떻게 무슨 일로 그 지경이 된 건지 아무리 세세하게 알아도 어쩔 도리가 없다. 아이가 제 남동생을 그리고 여동생을 괴롭히는 문제를 내가 왜. 부부간의 불화마저 내가 왜. 내가 왜 모든 것을 알아야 할까. 왜 알고 있을까. 막을 방도가 없다. 그 메시지를 작성한 그 순간의 감정이 어떠했는지 예민한 나에게는 모든 것이 흡수된다. 알고 있는 죄, 나는 알고 있는 벌을 받는다.
그걸 담임한테 왜 얘기해?
학교에 얘기할 게 아니지.
학교가 뭘 해줄 수 있어.
다들 바보같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내용이 문제가 아니다. 내가 그걸 몰라서 이러는 게 아니다.
도와달라잖아!
도움을 요청하는 행위. 나에게 알리는 그 이유가 나를 미치게 만드는 거다. 가정의 서열은 박살이 났다. 엄마를 엄마라고 부르지 않는다. 욕설을 서슴지 않는다. 모자간의 대화가 찍힌 사진 몇 장에 돌덩이가 빅혀 들어왔다. 누군가가 명치 어딘가쯤을 움켜 잡고 지옥으로 끌어내리는 고통. '유일하게 도움을 요청받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책임감, 그 벌을 오지게 받는다.
가정폭력 신고번호를 안내했지만 그럼 끝인가. 원치 않게 내가 알아버린 모든 상황이 남긴 감정의 흔적들은 처리되지 않는다. 앞으로 연락받지 않으면 끝인가. 모두가 가해자이고 모두가 피해자인 한 가정, 그 식구 전체가 가슴에 얹혀져 있는데 그런다고 끝인가.
남편이 메시지를 봐도 되는지 묻는다.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 내려간다. 남편이 '허', '허' 한다. 이게 아이가 엄마에게 보낸 문자가 맞느냐 묻는다.
"어. 내가 그걸 읽는데 가슴이."
말을 맺지 못했다. 얼굴에 오만 주름이 잡힌채 고개가 주저 앉았고 소리 없이 운다. 하이가 놀랄까봐. 얼굴을 보고 이미 놀랐겠지만 곡소리까지 울려 퍼지면 놀라움이 충격이 될까봐 소리를 내지 못한다. 식탁에 앉아 있던 남편은 곁으로 다가와 어깨에 나를 품고 등을 쓰다듬는다. 소리가 새어나오지 않도록 꾸역꾸역 누르니 큽큽 하는 이상한 콧소리가 난다. 텔레지벙(텔레비전)을 보고 싶다고 리모콘 들고 설치던 하이도 잠잠하다. 눈치가 빠르니까.
"가슴이.
뽑히는 것.
같더라고."
한 마디 한 마디 간신히. 하고 싶은 말은 끝까지 해야 한다. 남편은 손수건을 가져와 눈물을 닦았고, 옆에서 빤히 쳐다보던 하이도 한 마디.
"엄마가 우는 냐이 없어쓰면 좋겠어."
엄마의 슬픈 얼굴에 하이도 슬픈가보다. 한참 후에 씻고 있는 나를 찾아와선 살짝 묻는다.
"엄마, 아까 왜 우여써?"
"엄마 울어서 놀랬어?"
고개를 끄덕인다. 속상한 일이 있었다고만 했다. 남편은 물음표 없이 묻는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자기야 이게 지금 상황이 너무 복잡해."
"자기야!"
"난 그집 관심 없어. 그집 말고 자기. 나한테는 자기가 가장 중요해. 자기가 안 힘들었으면 좋겠어."
이거 뭐 위로와 사랑이 난무한다. 두 남자의 사랑이 무너진 마음을 토닥인다. 사랑받는 엄마이자 사랑받는 아내임을 확인하니 감사한 밤이다. 엄마의 중보 기도 덕분인지 밤새 평안했지만.
ㅅㅂ 그래도 짜증나.
교사는 욕 하면 안될까요?
그럼 신발이나 식빵쯤으로 그렇게 말 맞춰요.
이건 직업에세이일까 육아에세이일까. 주제는 가족의 사랑일까 위기의 교사일까.은유작가님이 그랬지 글은 사랑으로 쓰는거라고. 배설이 되면 안된다고. 그게 이건가. 아으. 그러든가 말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