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가해자가 된다.

by 손사쁨

나에게 분노란 통제 불능의 상태이다. 상대가 질려 넘어갈 정도로 집요하게 따지고 드는 탁월한 능력이 발휘되는데 그 때문에 나는 가해가자 된다. 나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만 조절되지 않는다. 화라는 단어 쯤으로는 어림도 없다. 치밀어 오르다 못해 폭발해 버릴 것 같은 감정, 통제할 수 없다. 나처럼 화를 내는 남편이 있었다면 맘카페에서 난리가 났을거다. 백프로다. 너무 많은 댓글이 달려 카페 첫 화면에 추천글이 되겠지. 엄마들이 뭐라고 욕할지도 이미 읽힌다.


내가 가장 많은 듣는 말, ‘그러지 마’. 부부싸움 후 보통의 아내, 여자들이 경험하는 과정과 좀 다르다. 엄마도, 언니도, 친한 직장 동료도 미리 입을 맞춤 듯 모두 ‘그러지 마’라고 한다. 내 편은 없다. 없어도 굴하지 않는다. 난 강한 자인가 약한 자인가.



'니가 뭔데 날 지적해. 어떤 자격으로, 뭐가 그렇게 뛰어나고 대단해서 날 지적했는지 설득해봐'


이렇게 시동을 걸었다. 설득하라니, 논술형 시험인가. 화가 나면 너라고 부른다. 고치고 싶지만 고쳐지지 않는다. '네가 뭔데'라는 정직한 표기법은 나의 상태에 어울리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네'가 아닌 '니'. 그래야 말맛이 산다.


이전에도 나에게 비슷한 방식으로 상처를 준 적이 있는데 또 같은 일을 반복했다며, 바보 같은 자신을 용서해 달라고 했다. 진정성 담긴 사과가 돌아왔지만 중요하지 않다. 내면의 불을 밖으로 다 끄집어 내는 것, 내 모든 에너지는 거기에 집중되어 있다.


'니 말 한마디로 어제부터 지금까지 내 모든 시간이 철저히 망가졌어. 내 기분, 감정, 망가진 상태로 흘러가는 이 시간 어떻게 책임질거야.'


남편이 쏘아붙인 다음 날은 내 생일이었다. 아무리 고민해 봐도 내 기분을 어떻게 풀어줄 수 있는지 모르겠다는 답이 돌아왔다. 좀 알려달란다. 순수한건가.


'시간 관리 잘해서 니가 원하는 거 잘 실천하고 있다고, 그런 식으로 거들먹거리면서 나보고 당연한 소리 답답하다느니 말 한마디로 내가 얼마나 한심한지 너랑 비교해 가면서 날 깎아 내릴거면 투자니 뭐니 부동산 공부며 축구 다 그만둬'


그리고선 책장에 잘 정리되어 있던 책들을 현관 밖에 던져놨다. 남편이 읽은 부동산 관련 책부터 내가 읽은 글쓰기와 자기 계발 관련 도서까지 전부, 싹 다. 더 이상 쓰지 않는 전동 푸시카 안에 최대한 격정적으로 처박아 놓았다. 슬슬 느껴진다. 미친자의 기운. 이 구역 미친년은 정말 나다.


남편은 가족을 위해 하는 공부라고 했다. 그럼 나는 왜 공부할까. 왜 뭔가 하고 싶어할까. 잠도 많고 체력도 안 되는 사람이 왜 꾸역꾸역 아침 일찍 일어나려고 할까. 저만 대단하지. 저만 가족 위하는 줄 안다.


내 기분은 풀리지 않는다는 정보도 주었다. 니가 망쳐 놓은 내 기분을 어떻게 푸는지, 왜 내가 고민해야 하느냐고도 따졌다. 집에서 부동산 영상 같은 거 보지 말라고도 했고, 임장도 다니지 말라고 했다. 대화가 이어지는 순간 따질 수 있는 만큼 따지긴 했지만 성에 안 찬다. 일목요연하게 지난 일까지 소환해 알려줬지만 여전히 속이 안 풀린다. 지옥 같은 내 기분을 남편도 느껴야 한다.




'어제부터 내 기분은 지옥 같아. 이제 너도 이렇게 살아.'


악마인가. 이 모든 분탕질의 핵심은 '앙갚음'이다. 내가 당한 만큼, 내가 고통스러운 만큼 남편도 그랬으면 좋겠다. 글자 한자 한자에 얼마나 정성스레 독기를 담아내는지. 내 분노는 악랄하고 폭력적이며 파괴적이다. 그래서 난 가해자가 되고, 피해자인 남편을 모두 불쌍히 여긴다. 하지만 다들 모른다. 분노라는 괴물이 내 머리채를 휘어잡고, 나를 이리저리 마음껏 패대기 치도록 스스로를 포기한 그 기분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마음껏 화를 내는 그 순간, 난 벌을 받고 있는 것이다.


길길이 날뛰는 그 사람, 강한 자인가 약한 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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