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 짐은 그만 들고 말이나 들어

by 손사쁨

연두색의 폭이 좁고 기다란 쇼핑백과 소담한 꽃다발을 조심스레 내려 놓는다.

“나도 너처럼 말해볼까?”

남편은 침묵으로 동의한다.


“너 부동산 투자할거라고 했지. 너 혼자 힘으로 돈 천만 원 모아본 적 있어?”

“아니.”

대답할 줄 몰랐다. 역할극인줄 아나. 소리반 공기반 처럼 대답 끝에 긴 숨이 남아 있었다.


“내가 답답해서 그래. 돈 천만 원도 모아본 적 없으면서 무슨 투자야?”

남편이 고개를 숙인다.


“어때. 기분 좋아?”

“아니.”

“어, 내 기분이 그랬어. 그런데 난 이런 말 너한테 안 해. 할 필요도 없고. 왜 인 줄 알아?”

“음.... 상처 줄까봐?”

“아니. 내가 하면 되니까. 니가 잘 못하지만 내가 할 수 있으니까. 돈은 내가 모아야겠다고, 그래도 내가 돈을 모을 줄 알아서 다행이라고 난 그렇게 생각해.”

“...미안”



그렇게 대화는 끝났고, 몇 마디 더 건네보던 남편은 투명인간 취급에 집을 나가 버렸다. 침묵이 3일째 이어지고 있다. 토요일 아침 가방을 챙겨 카페로 나왔는데 아이가 가자고 했을까, 남편이 아이를 꼬신걸까. 오후 다섯시가 넘어 스파이더맨 졸쫄이를 입은 아이가 어린이집 배낭을 메고 카페로 들어온다. 두 테이블을 오가는 아이가 나와 남편의 관계를 설명해 줄 뿐, 남편은 옆 테이블에 앉아 유튜브를 보며 종이 팽이를 접고 있다. 부슬부슬 비가 내리는 토요일 저녁, 이 동네 사람들은 모두 가족과 화목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 카페가 조용하다. 아이가 한마디 한다.


“아 똥 마려.”


똥은 못 참지. 부리나케 짐을 챙겼다. 노트북에 연습장 여러 권, 필기도구, 주제 파악이 안 되는 탓에 책도 다섯 권이나 있다. 노트북 가방을 어깨에 걸치니 그 무게만큼 기우뚱 한다. 남편이 가져가겠다고 가방끈에 손가락을 걸어 당겨보지만, 어깨를 돌려 손을 뿌리쳤다. 돌 같은 엉덩이에 탄탄한 복근까지, 엉밑살이 없을 수 있다는 걸 이 사람을 보고 처음 알았는데 내 앞에선 머리칼 잘린 삼손처럼 힘을 잃는다.


'나한테 필요한 건 이깟 짐이나 들어주는게 아닌데. 이런건 나도 얼마든지 들 수 있는데. 짐 들 생각말고 내 말이나 좀 들어줬으면.'


아무리 말해도 남편은 나를 모른다. 알고 싶지 않은건가.


그래 너 혼자 어디 한 번 잘 해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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