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건 당신이 게을러서가 아닙니다

퇴직에 진심

by 나은권

두 살 터울의 아들과 딸이 있다.


나와 달리 운동을 좋아하는 아들은 시험을 앞둔 전날이면 늘 같은 장면이 반복한다. 책상은 무분별하게 어지럽혀 있고 새벽 2시가 넘어서야 스터디카페에서 집으로 돌아온다. "미리 좀 하지"라고 말이 목구멍까지 차오르지만 쭉 쳐진 아들의 어깨를 보면 이내 단념한다.



요즘 부쩍 다이어트를 한다며 호언장담하는 딸도 마찬가지다. 다이어트를 하겠다고 말할 때는 누구보다 눈이 진지하게 빛나고 있다. 하지만 불과 며칠밖에 지나지 않아 "오늘까지만 먹고 다이어트는 내일부터다"라고 크게 외치며 냉장고로 향한다.


개인적인 에피소드임에도 전혀 놀랍지도 특별하지도 않은 이야기이다. 그만큼 누구나 한 번은 겪어봤을 아주 익숙한 장면이기 때문이다. 심리학에서는 이러한 행동 패턴을 '쌍곡선 할인(hyperbolic discounting)'이라고 부른다. 참고로 쌍곡선은 곡선이 2개라는 뜻이 아니라 아래와 같이 기울기가 가팔랐다가 다시 기간이 지날수록 가치가 급격히 떨어지는 곡선을 의미한다.

우리가 느끼는 가치(보상)는 눈앞에 있는 때 실제보다 과하게 느껴지는 반면 현재와 멀어질수록 그래프가 수직으로 떨어지는 것처럼 매우 작게 느껴진다. 단순히 게을러서가 아니다. 아들에게 좋은 성적이라는 미래의 가치보다 친구들과 땀 흘리며 운동하는 지금 당장의 재미가 더 크고, 딸에게는 다이어트 성공 뒤 건강한 모습보다 지금 당장 입에 넣고 있는 달콤한 초콜릿이 훨씬 강력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퇴직연금 제도는 쌍곡선 할인과 같이 사람들이 시간에 따라 공평하게 가치를 매기지 못하는 약점을 보완해 주도록 설계되어 있다. 즉, 아무 때나 해지할 수 없도록 회사 내부가 아닌 외부금융기관에 맡겨 놓는 방식을 택하고 있으며 퇴직하기 전 중도에 인출할 수 있는 사유를 엄격하게 제한하고 있다.



퇴직급여제도는 기존 방식의 퇴직금 제도와 퇴직연금 제도로 구분된다. 그리고 다시 퇴직연금 제도는 1) DB, 2) DC 그리고 3) IRP로 나눌 수 있다. 명칭이 전부 영문이다 보니 볼 때는 이해가 되는데, 막상 뒤돌아서면 쉽게 잊힌다. 오랫동안 기억할 수 있도록 핵심만 명확하게 알아보자.


1) DB(Defined Benefit, 확정급여형) : 회사가 안정적으로 운전하는 리무진


Defined 즉, 정해져 있다. 뭐가? 내가 나중에 받는 Benefit(퇴직 때 받는 금액)이! 실생활에 사용하는 단어가 아니다 보니 바로 느낌이 안 오는 게 당연하다.


DB는 내가 회사를 다니는 동안 회사에서 [퇴직하기 전 3개월 평균임금 x 근속연수]만큼 쌓아 둔 다음에 퇴직할 때 나한테 준다. 회사에서는 딱 [퇴직하기 전 3개월 평균임금 x 근속연수]만큼만 나한테 주면 끝이다.


이 금액 이상 주지도 않고 그 밑으로도 주지 않는다. 또한 회사에서 '줄 금액'을 책임지기에 내가 따로 운용할 필요도 없다. 회사가 운용을 잘해서 수익이 나든, 안타깝게 손실이 나든 나는 정해진 [퇴직하기 전 3개월 평균임금 x 근속연수]만 받을 수 있다. 퇴직으로 향하는 리무진 운전을 회사에서 하는 것이다.


이러한 특징 때문에 DB는 매년 임금상승률이 높은 대기업이나 공기업 근로자에게 유리하다. 왜냐하면 임금이 상승할수록 퇴직하기 전 3개월 평균임금에는 임금이 상승한 금액만큼 많아지고, 결국 근로자가 받는 [퇴직하기 전 3개월 평균임금 x 근속연수]이 커지기 때문이다.


그래도 헷갈린다면 DB에서 B를 Benefit이 아닌 'Back'으로 생각해 보자. 지금 말고 '나중 뒤(Back)에 퇴직할 때 확정되어 있는 퇴직연금은 DB다'라고 생각하면 오히려 더 이해하기가 쉬울 수 있다.


2) DC(Defined Contribution, 확정기여) : 무슨 소리? 운전은 내가 한다!


이번에는 DC다. 역시 하나씩 단어를 풀어보자. Defined 즉, 정해져 있다. 뭐가? 회사가 퇴직적립을 위해 내야 하는 Contribution (기여하는 돈)이! 회사는 나에게 [매년 임금총액 x 1/12]만큼 근로자 계정에 입금만 하면 모든 의무를 다하는 것이다. 이마저도 어렵다면 DC는 그냥 매년 내 월급정도가 퇴직연금으로 쌓이고 있다 정도로 이해해보자.


앞서 설명한 DB가 나중에 퇴직할 때 금액이 확정된다면 DC는 매년 임금총액의 1/12만큼 꼬박꼬박 입금해 준다. 이렇게 매년 근로자 계정에 입금되는 돈을 운용하는 주체는 바로 근로자 자신이다. 퇴직으로 향하는 차를 근로자가 스스로 운전하는 것이 DC이다. 이 부분이 DB와 가장 다른 점이다.



2025년의 경우 주식을 포함하여 금, 은 등 거의 모든 자산이 엄청난 가격상승을 보여줬다. 만약에 DC를 운영하는 근로자가 2025년 공경적인 투자를 했다면 운영수익이 당연히 많아질 테고 결국 나중에 받는 퇴직급여의 금액 역시 옆자리 직원보다 훨씬 큰 것이다.


이렇듯 투자에 대한 혜안을 갖고 있어 임금상승률보다 많은 수익을 낼 자신이 있는 사람에게 DC는 한껏 유리한 제도이다. 또한 매년 회사가 퇴직급여를 개인계정으로 입금해 주므로 보다 더 안전하게 쌓인다고 볼 수 있다. 실제 DC에 가입한 근자로는 개인계정에 돈이 쌓여 있어서 금융회사 어플을 통해 퇴직급여의 원금과 수익률을 언제든 직접 확인이 가능하며 수시로 상품변경도 할 수 있다.


여전히 DC가 어려운 분들은 아예 C가 Contribution의 줄임말이 아닌 'Center'라고 생각해 보자. 즉, 퇴직급여라는 차의 핸들을 내가 중심(Center)가 되어 방향을 잡는 것으로 간주하자. 원금보장 상품으로 운용하여 천천히 안전하게 목적지로 갈 수 있고, ETF나 주식형 펀드와 같이 공격적인 상품을 이용하여 빠르게 부의 추월차선에 올라탈 수도 있는 것이다.


3) IRP(Individual Retirement Pension, 개인형 퇴직연금) : 마지막 퍼즐은 내가 책임진다!

DB와 DC를 잇는 마지막 IRP다. 이것 역시 단어를 하나씩 살펴보자. I(Individual) 개인형 R(Retirement) 퇴직, P(Pension). 풀어쓰면 회사도 아니고 국가도 아닌 개인인 내가 준비하는 퇴직연금을 의미하는 것이다. 차라리 I를 Individual이 아닌 그냥 대문자 'I'로 외워서 IRP는 내가 주인공이 된다라고 외우자.


위에서 살펴본 DB와 DC는 기본적으로 내가 다니고 있는 회사가 입금의 주체가 된다. 하지만 IRP는 말 그대로 내가 주체가 되어 나의 노후를 준비하는 금융상품이다. 그래서 이번 달은 10만 원만 IRP에 입금할 수 있고, 다음 달에는 보너스로 받은 5백만 원을 한꺼번에 입금하는 등 자유롭게 설계할 수 있다. 매월 자동이체 50만 원을 거는 방식 역시 가능하다.


IRP를 여러 금융상품을 한꺼번에 담을 수 있는 큰 바구니라고 생각하자. 그 안에는 예금을 넣을 수도 있고, 펀드도 넣을 수도 있으면 ETF도 물론 가능하다. 개인의 취향에 따라 상품과 비율을 선택하면 그만이다.


한편 IRP를 가입할 수 있는 대상은 소득이 있는 모든 사람이다. 회사를 다니는 근로소득자는 당연히 가입할 수 있고, 사업을 하는 자영업자 사장님도 역시 가입이 가능하다. 하나의 금융기관에 1개만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신한은행에 1개 만든 뒤에 국민은행에도 1개 만들 수 있다.


※ IRP는 소득이 없는 사람은 가입이 불가하니, 당장 입금을 안 해도 지금 회사를 다닐 때 2개 이상 IRP를 만들어 놓는 것을 추천한다. 나중에 급하게 목돈이 필요해 계좌 하나를 정리하더라고, 남은 계좌를 이용해 여전히 노후 자금으로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IRP를 다시 정리하면 소득이 있는 사람이 본인의 퇴직 후를 위해 스스로 준비하는 상품이다. 간혹 회사를 그만둬야지만 만들 수 있다고 오해하는 분들이 있는데 절대 그렇지 않다.


한 가지 더 있다. 퇴직을 할 때는 그동안 회사에서 열심히 일하는 동안 쌓인 DB 또는 DC를 일반 입출금통장이 아니라 오로지 IRP를 통해 받을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퇴직 또는 이직을 경험하신 분이라면 인사과나 총무과에서 IRP통장계좌를 틀림없이 요청받았을 것이다.


※ DB, DC를 IRP가 아닌 현금으로 받을 수 있는 예외사항이 있으나 이번장에서는 생략한다.




은행에서 고객들과 퇴직연금에 상담을 할 때면 이런 생각이 든다. 퇴직연금은 단순한 금융상품을 파는 것이 아니라 멀리 보이는 퇴직시점을 조금은 진지 하게 받아들이도록 돕는 일이라 생각한다.


혹시라도 이 글을 읽는 분들 중 지금껏 언급한 퇴직연금을 이미 시작했고, 아래 항목 중 1개 이상 해당된다면 스스로를 칭찬해 주길 바란다.


▶ DB, DC, IRP를 대략적으로 알고 있다.

▷ 우리 회사의 퇴직연금 제도를 알고 있다.(DC인지 DB인지)


▶ 최근 내 DC의 수익률을 한 번이라도 확인해 본 적 있다.

▷ 원금보장상품 정기예금 말고 투자상품을 알아본 적이 있다.


▶ 세금을 아끼기 위해 IRP에 단 만원이라도 추가입금을 해본 적 있다.

▷ 은행에서 보낸 퇴직연금 안내문자를 바로 지우지 않고 읽어본 적이 있다.


매번 퇴직연금을 대할 때 어색한 부분도 있고 완벽하게 이해가 되지 않아 바로 잊을 수도 있다. 그건 당신이 게을러서가 아니다. 우리의 뇌가 쌍곡선 할인과 같이 현재를 더 즐기라고 끊임없이 유혹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강력한 본능을 이겨내고 미래의 나를 위해 시작했다는 것 자체가 이미 대단한 일을 해낸 것이다.


(사실 이렇게 긴 글을 여기까지 읽어주신 분들이 더 대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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